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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7화 (127/221)

127화 검술 스승

건국제 연회가 끝나고 벨로나 공작 저택에는 수많은 서신이 당도했다.

모두 페루제 공작부인을 향한 서신이었다.

산처럼 쌓은 서신들은 그녀가 얼마나 관심을 받고 있는지 보여줬다.

그러나 정작 관심의 당사자는 서신 중 하나도 읽지 않았다.

시녀장이 궁금해 할만 했다.

“어찌하여 서신을 하나도 읽지 않으십니까?”

“서신을 지금 읽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녀는 우아하게 밖을 보면서 대답해 줬다.

기분이 좋았기에 말도 부드럽게 나왔다.

전날의 승리는 그녀에게 아량을 베풀게 했다.

하찮은 질문에 대답해 주는 자비였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시녀장이 힐끔 서신들을 바라봤다.

무슨 내용인지, 누가 보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의연하기만 했다.

시녀장 자신은 궁금해서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인데 말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아둔한 인사들이 많아.”

“네? 네. 그렇지요.”

“일주일까지 기다리고 난 뒤에 읽어 보면 되네.”

페루제 공작부인은 잘 알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잘 이해했다.

“어제의 일을 봤으면서, 들었으면서도 서신을 보내지 않다니 참으로 징글징글하군.”

자신이 그들을 이끌 능력과 배짱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냈거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자신의 인맥, 성향, 능력.

여기서 더 뭘 보여줘야 움직일지 떠올리기도 싫었다.

머저리들은 아직도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느라 조용히 있었다.

사실 지금 바로 움직인 이들만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리할 수는 없었다.

“덜 무능한 것들도 다 가치가 있으니까.”

일주일 안에라도 자신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하는 인물들은 그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런 ‘덜 무능한 인간’들은 무능한 것들보다 유용했다.

그게 설령 버림 패더라도 말이다.

시녀장은 그녀의 혼잣말을 듣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님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여유롭게 혼잣말을 하는 것인데도 마치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밖을 보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저 란델리노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란델리노가 편한 옷차림으로 들어왔다.

잠시 페루제 공작부인이 눈을 찡그렸다.

품위와 격식을 중요시했으니까.

자신을 만나기에는 맞지 않는 옷차림이라고 여겼다.

“그런 옷차림으로 나를 찾아오다니. 확실히 내가 편하기는 한가 보구나.”

“어머니, 연무장에 가기에는 알맞은 옷차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비꼼에 란델리노는 여유가 넘쳤다.

능청스럽게 그녀의 날카로운 말투를 받아냈다.

“연무장?”

“예.”

그녀는 연무장을 떠올리며 왜 아들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남편이 하지 않는 일을 자신이 대신 해주기로 했었다.

자신 교육은 어머니의 역할이다.

귀족 가문의 아들로 목숨을 지키고 공적을 세울 수단인 검술은 아버지가 담당했던 것이다.

“아! 그래. 네 검술 스승을 내가 찾아주기로 했지.”

“벨로나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미리 검술 스승을 정해 주셨으면 해서요.”

“그래. 내가 근래에 바빠서 잊고 있었구나. 잘 차려입었다. 너에게 필요한 일인데 네가 마땅히 움직여야지.”

다정한 눈빛으로 란델리노를 쳐다봤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남에게 기대어 기다리는 짓은 추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얻는 행동력이 필요했다.

지배자라면 말이다.

그녀는 순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왜 란델리노를 ‘지배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처럼 굴었을까?

그 아이는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될 수 없는데 말이다.

2인자에 만족해야 하는 아이였다.

1인자는 언제나 루비로즈여야 하니까.

“그러면 지금 같이 연무장으로 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그러자구나.”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방을 나왔다.

란델리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 검술 스승은 제가 결정해도 될까요?”

“네가 말이냐?”

“네. 저를 가르치실 분이니 제가 선택하여 배움을 청하고 싶어서요.”

“그러렴.”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싶은 인물에게 배우는 것.

그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맞는 스승을 찾는 것이 배우기에도 더 좋지 않겠는가.

단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마음속에는 란델리노의 스승으로 정해 놓은 상대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그 인물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만한 일은 아니란다.”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씨익 웃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첫 단추를 잘 끼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연무장에 금방 도착했다.

어머니의 기사들이 훈련 중이었다.

로빈 단장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였다.

“주군, 이리 귀한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다른 기사들도 훈련을 멈췄다.

그리고는 일사분란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얼마나 위계질서를 잡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주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가 같은 동작과 말을 하는 모습은 상당히 멋있었다.

각자 훈련 중에 멈춰서 줄을 맞추거나 한 것도 아님에도 말이다.

“모두 몸을 일으키게.”

“예.”

그녀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절도 있게 일어났다.

란델리노는 자신도 이런 기사단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경외하게 만들 최고의 기사단을 갖기를 원했다.

로빈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의외의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훈련을 방해하는 방문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주군,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아들이 검술 스승을 구하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정식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

그녀가 아들을 살짝 앞으로 밀었다.

부드럽게 밀어서 전혀 아프지도 않았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마치 너는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란델리노, 여기는 소드마스터이자 기사단 단장인 로빈이다. 로빈. 이 아이가 누군지는 알겠지?”

“네. 물론입니다.”

“로빈 단장님, 안녕하세요?”

“영식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로빈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인사한 것처럼 예의를 다했다.

겉으로만 보면 충성스러운 기사 그 자체였다.

절대로 자신의 아들을 페루제 공작부인의 후계자로 만들 야망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배우고 싶은 이가 있니?”

“아직은 모르겠어요. 저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러면 그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보자구나.”

그녀는 란델리노의 의견을 존중했고 받아들였다.

“훈련을 다시 이어서 하게.”

“알겠습니다! 어서 다시 훈련을 재개하라!”

“네!”

그들은 기사들의 훈련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자신의 주군이 그들을 지켜본다는 생각에 기사들은 평소보다 빡세게 훈련을 임했다.

란델리노는 흥미진진해하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니 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속은 초조하다 못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자신이 스승으로 원하는 인물이 없었으니까.

아까까지 있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초조함이 극에 달하던 순간이었다.

“훈련을 이만 마치도록 하지.”

“네!”

하필이면 훈련이 끝났다.

여기에 로빈과 그의 사람들만 있었다.

‘절대로 꿈처럼 되도록 둘 수는 없어.’

그는 꿈속에서 봤다.

자신의 검술 스승은 사실 자신의 적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줄 것처럼 굴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꿈과 다르게 내가 승자가 되어야 하니까.’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곁에서 정보를 빼오고 이용했다.

나중에 그 진실을 알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꿈속에서 자신은 설마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조카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심장이라도 내어줄 것처럼 행동하던 로빈을 너무 믿었음이다.

“어떠니?”

“정말 다들 대단했어요. 기사 중의 기사란 이런 분들이구나 싶었어요.”

팔을 크게 움직이며 일부러 과장스럽게 말했다.

아이의 극찬이 싫지 않았는지 기사들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그런 란델리노에게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아들의 순수함에 목적을 잃을 여인이 아니었다.

“만족스러웠다니 다행이구나. 그러면 검술 스승이 될 사람도 정했겠지?”

“다들 대단해서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며칠만 더 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이런 일에 며칠씩이나 시간을 할애하다니. 이 어미가 검술 스승으로 사람 하나 추천하마.”

“추천이요?”

란델리노가 주춤거렸다.

꿈속에서도 이랬다.

어머니는 로빈을 검술 스승으로 추천했다고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은 좋다고 받아들였다.

어머니에게 자신은 후계자 후보조차 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자신을 후계자 후보로 염두에 뒀다면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해줬을 것이다.

꿈속처럼 로빈을 스승으로 지정할 것이 아니었다.

“그래. 나는 소드마스터인 로빈이 네 검술 스승으로 옳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로빈 단장을요?”

“그래.”

소드마스터.

검의 극의에 이른 존재다.

그런 이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산속의 나무처럼 많았다.

그런 기회를 친자도 아닌 의붓아들에게 준다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었다.

자세한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느껴지기 충분했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좋다고 받아들일 제안이었다.

“어머니, 그건 아닌 듯싶어요.”

“소드마스터의 가르침이 싫다는 말이냐?”

란델리노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후계자가 되어서 모든 것을 잇겠다는 야심을 지녔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로빈도 당혹스러워서 잠시 표정이 멍해졌다.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리기는 했다.

“영식,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그러십니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란델리노는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함을 잘 이해했다.

이 기사단의 단장인 로빈을 거절했다.

그것도 소드마스터인 단장을 말이다.

소드마스터인 단장은 그 아래의 기사들에게 자부심이 될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답변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미움을 살 수 있었다.

가령 어린 나이부터 오만방자하기 극에 다다랐다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연무장의 모두가 란델리노를 주시했다.

그는 침을 삼켰다.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꿈처럼 로빈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방해받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데 거절을 한다? 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무엇이냐?”

“물론이에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소드마스터를 거부했다는 것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최고의 스승 곁에서 최고가 되도록 돕겠다는 호의를 거절한 셈이었으니까.

그녀가 생각하는 아들의 최고는 알펜 왕국 내에 국한되었다.

란델리노가 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빛에도 당당함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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