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26화 (126/221)

126화 그들만의 소통방법

페루제 공작부인이 대비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을 때에 벨로나 공작은 국왕과 이야기 중이었다.

“건국 이래로 이런 최악의 건국제는 없었네.”

“송구합니다.”

“그대는 그녀가 벌일 일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국왕은 정말 답답했다.

벨로나 공작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그가 그녀를 상대로는 맥을 못 췄다.

국왕이 당하기만 할 때에도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사실 벨로나 공작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나서지 못한 것은 같았다.

그렇지만 신임하는 벨로나 공작이었기에 더 크게 실망스러웠다.

“그녀는 이 왕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말이지. 가령 어마마마와의 접선 같은 것?”

“맞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무대를 준비해 뒀습니다. 수상한 모습을 보여줄 리가 없죠.”

벨로나 공작은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도대체 여기에 얼마나 더 음흉한 계획을 준비해 놓았을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국왕도 다르지 않았다.

단순히 반왕파 성향이라기에는 너무 계획적이고 악의적이었다.

그 목적이 무언인지 알기라도 한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

그 심중은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 자신만 알 것이다.

“그것도 미칠 노릇이야. 도대체 어떻게 두 사람의 연이 닿을 수 있었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동안 받았던 보고에서도 둘이 뭔가를 주고받은 것은 없었습니다. 정황도 없었고요.”

“그래. 이런 일을 벌이는데 서신 하나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그런데 하나도 없단 말이야.”

국왕도, 라보 공작도, 벨로나 공작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비는 국왕의 형님이 죽은 이후로 침거하듯이 조용히 지냈다.

하품이 나올 만큼 규칙적인 일상이었다.

대비궁에 오는 사람들조차 한결 같았고 변화가 없었다.

대비궁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몸수색까지 감행하며 감시를 했는데 말이다.

수색마법까지 펼치며 경계했다.

“기껏 와 봐야 그분의 동생이나 조카, 몇몇 상인들이 전부야.”

“왕비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부인들도 있지요.”

“그들 대부분도 대비가 침거하면서 서서히 연을 끊었지 않은가.”

한숨이 나왔다.

대비와 페루제 공작부인이 서로 비밀리에 연락을 하고 있다.

궁안의 정보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새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대비가 침거했지만 이제는 달라지겠다고 선언했다.

더 적극적으로 궁정 일에 나서고 그 정보를 그 악인에게 보낼 것이 뻔했다.

참으로 짜증이 났다.

페루제 루비로즈 메디치라는 여인이 알펜 왕국의 귀족이 되었다.

그 사실 하나로 이렇게 왕국이 들쑤셔지고 있었다.

“내가 태자가 되자마자 대비궁의 인사에 변동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었다.”

“특별히 문제될 만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만약 수상한 인물이 대비궁에 새롭게 왔다면 쫓아냈을 것이다.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말이다.

국왕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어도 가슴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라보 공작에게 두 사람이 어떻게 소통했는지 조사해 보라고 했으니까 이 문제는 잠시 넘어가지.”

“지금 문제는 다른 것이니까요.”

“대비가 적극적으로 궁정 일을 나서겠다고 했어. 대비궁에 자기 사람들을 꽉 채우려고 할 것이야.”

“제 아내에게 대놓고 궁정 일을 보고할 사람들이겠지요.”

“게다가 왕비의 마음까지 얻었어. 호구니라 후작가문도 나에게 적의를 드러냈고 말이야.”

국왕에게 순종만 하던 왕비는 오늘을 기점으로 달라질 것이다.

아니, 이미 달라졌다.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부를 공격하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궁 안의 일은 왕비마마의 영역입니다. 그것을 개입하려고 한다면 크게 분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호구니라 가문뿐 아니라 반왕파도 이때가 기회라며 공격을 퍼붓겠지.”

그동안은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던 일이다.

왕은 왕국에서 가장 높은 이였고 모두가 그 아래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으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왕비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할 것이고 그녀의 가문도 그것을 따를 것이다.

국왕이 자신들을 내칠 수 있다는 불신이 심어졌기 때문이다.

반왕파도 왕비의 영역은 국왕이 침범할 수 없다며 편을 들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네 부인의 능력은 인정해 줘야지.”

이제껏 문제가 아니었던 일을 문제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대법관 사건 때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말이다.

국왕이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기왕 대화 나누게 된 거 다른 이야기도 하지.”

“무엇입니까?”

“그대의 아들에 관한 것이야.”

벨로나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란델리노.

그의 아들은 참으로 자신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했다.

자신이 외면했던 아들, 이제는 자신을 외면하는 아들.

참으로 이중적이다.

자신이 외면한 아들이 자신을 외면했다고 마음이 어지러운 것을 보면…….

“그대가 그대 아들을 칸나 백작부인의 손에서 자라도록 둔 것을 알아.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 아이에 관해서 폐하께서 말하고 싶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를 너무 공작부인의 손에만 맡겨 두는 것이 아닌가?”

국왕은 란델리노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아버지 없이는 일도 못해서 수도에만 있도록 한 것이 아니냐는 의미를 담아서 비꼬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순수한 의도를 가진 척하면서 그러는 꼴이 페루제 공작부인과 닮았다.

정치적 성향까지 닮게 된다면 친왕파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 아이가 커서 반왕파 성향으로 자란다면 왕실에는 화가 닥칠 것이야.”

“본디 성정이 올바르지 못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범상치 않은 성정은 아버지의 방치와 고모할머니의 학대로 만들어졌다.

벨로나 공작은 그것을 떠올리지 않았다.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 아이가 후계자로 적합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방관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어찌 되었든 그 아이는 벨로나 가문의 장남이야. 훗날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지.”

“가능성이 높은 것이지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국왕은 순간 눈이 커졌다.

지금 벨로나 공작의 유일한 아들이자 적통인 아이를 후계자로 삼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니까.

“다른 아이가 있는 것인가?”

“후계로 세우고 싶은 아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어미를 공작부인으로 삼았어야지!”

후계자가 되기를 원하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응당! 그 아이의 어미를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으로 들여야 했다.

국왕은 잠시 욱했다가 진정이 되었다.

벨로나 공작의 성격상 그것이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바로 진행했을 것이다.

“그 어미가 귀족의 양녀로도 들일 수 없는 신분인가?”

“네.”

벨로나 공작은 밝히고 싶지 않던 일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것이니까.

국왕은 두통이 났다.

귀족의 양녀로 들일 수도 없는 여인은 하나다.

반역 가문의 생존자.

그 가문의 여인인 경우였다.

절대로 귀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신분이다.

그런 신분에서 귀족이 될 방법은 하나다.

반역이 누명으로 밝혀져서 가문이 복권되는 것이었다.

“복권될 가능성조차 없는 가문 출신이면 자네 전 부인의 가문 출신이겠군.”

“네. 그들은 실제로 반역을 저질렀으니까요.”

“자네 부인은 보통 여인이 아니야. 자네의 심중을 알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라 말일세.”

“그래서 방도를 고심하고 있습니다.”

벨로나 공작은 그녀가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의 생각을 읽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롯이 가문 내부의 문제이고 그녀와 자신의 문제다.

국왕은 왜 이제껏 란델리노를 벨로나 공작이 방치했는지 알았다.

벨로나 공작이 하찮은 가문의 여식과 혼인하려고 했는지도 말이다.

“한미한 가문 출신을 들여서 그 여인과의 아이를 양자로 입적하려고 했던 자네 계획은 실패했어.”

“죄송합니다.”

“되었네. 이미 지나간 일을 신경 써서 뭐하겠나.”

국왕이 짜증을 겨우 삼켰다.

여기서 벨로나 공작과 사이가 벌어져 봤자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그 여자가 빈틈을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정했으면 확실하게 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기왕 다른 아이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던 하루다.

* * *

그들과 다르게 대비와 페루제 공작부인은 화기애애했다.

“제가 보낸 아이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물론이네. 어찌 마음에 들지 않겠는가!”

대비 곁에는 한 시녀가 있었다.

청소나 그 외의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시녀였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왕궁의 일꾼이었다.

왕궁일이 힘들어서 빠지기도 하고 새롭게 들어오기도 하는 일이 잦은 하급 시녀.

누구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았다.

청소나 하는 하급 시녀가 대비를 만날 일은 없으니까.

“끔찍하게 남을 의심하는 놈이야. 그대가 이 아이를 보내지 않았다면 서로 입을 맞출 수 없었겠지.”

“기억력이 좋은 아이지요. 한 번 본 것은 웬만해서는 잊지 않고 쓸 수 있답니다.”

그래서였다.

국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소통하기 위한 이 하녀가 필요했다.

“까탈을 떨면서 다른 하급 시녀들의 청소는 내치고 이 아이만 내 방 청소를 할 수 있도록 했지.”

“아들을 잃은 슬픔에 대비마마께서 변하셨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죠.”

“정신줄을 놓았다는 소문이 잠시 돌았으나 그 정도는 내가 감내해야지.”

그녀는 대비궁에 배정된 이래로 대비의 방 청소를 담당했다.

홀로 대비의 방에 있는 동안에 자신이 암기한 내용을 종이에 적어서 책상서랍에 넣어 뒀다.

뒷방늙은이 신세가 된 대비의 서랍을 궁금해야 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청소를 끝내고 방을 나갔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명목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니 종이와 펜을 써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어.”

“정말 섬세하셨습니다. 저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대비는 그 서신을 읽고 내용을 전부 파악하면 바로 태워 버렸다.

증거가 남을래야 남을 수 없는 것이다.

대비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마지막 장례식날에 그대가 사람을 보내지 않았는가.”

“네, 그때의 연이 지금까지 이어졌지요.”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네. 내가 만나지 않았다며 어찌할 요량이었나?”

“글쎄요. 그러면 신의 뜻인 줄 알고 조용히 지냈겠지요.”

대비가 자신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알펜 왕국으로 진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렇군. 그날 자네를 만난 것은 신께서 나를 도우신 일이야.”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자네도 바빠질 것이니 이만 돌아서 쉬게나.”

오늘의 일로 여러 가문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녀를 따르고 싶어서, 다른 누군가는 그녀의 뜻을 떠보기 위해서 등 그 목적은 다양했다.

“한동안 또 뵙지 못할 것이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 패륜아가 의심이 깊거든. 나는 왕비와 친분이나 다져야겠어.”

“며느리와 사이가 좋은 것은 왕실의 복이지요.”

왕비를 자신들 쪽으로 돌아서게 해야 일이 편해진다.

대비는 그것을 알고 친해지겠다고 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