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25화 (125/221)

125화 각자의 입장

연회장에 음악이 흘렀다.

건국제에 어울리는 밝은 음악.

그 음악이 무색하게 분위기는 흉흉했다.

홀에서 춤을 추는 남녀는 소수였고 그것도 마지못해서 하는 느낌이 강했다.

건국제의 분위기를 완전히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발악처럼 말이다.

그 남녀 중 한 커플이 작게 서로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이 숨이 막힐 것 같은 연회장에서 당장 나가고 싶어.”

“얼른 폐하께서 연회를 끝내겠다고 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도 당신과 같은 마음이야.”

메트레상티트르로 인해 망신을 당한 국왕은 심기가 불편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기분을 드러냈다.

“표정 좀 웃어요. 건국제잖아요.”

“지금 멍청이처럼 웃으라고?”

왕비가 우아하게 웃었다.

아주 속이 시원하다는 웃음이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왕비답게 굴라고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정부 때문에 상한 기분도 왕비답게 참았다고요.”

“그러니까 나도 왕답게 굴라? 지금 그거랑 이거랑 같다고 봐?”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면 기껏 분위기 살리려고 노력하는 남녀들이 슬퍼하지 않겠어요.”

국왕은 여기서 건국제를 더 살벌하게 만들 수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화를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에 왕비가 더 환하게 웃었다.

사람 하나가 힘을 실어 줬을 뿐인데 이렇게 상황이 달라졌다.

당연히 친왕파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보통 여인이 아닌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게 말일세. 누가 이 건국제를 왕실의 건국제라고 하겠는가?”

“메디치 백작 혹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건국제였다고 하겠지.”

국왕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친왕파 내부에서도 동요하는 것은 당연했다.

친왕파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할 귀족들이 생길 만한 일들이 벌어졌으니까.

“일단 친왕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친왕파 가문 간의 연회를 열어야겠군.”

“연회보다는 티 모임이 좋지. 부담이 덜하고 자주 할 수 있으니까.”

친왕파의 수뇌부는 그런 세력을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써야 했다.

국왕이 망신을 당했으니 반왕파는 기분이 좋을까?

아니다.

그들도 그리 좋지 않았다.

반왕파 수뇌부도 친왕파 수뇌부와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 일로 내부적으로 동요가 클 것이야.”

“그렇겠지요. 저희는 친왕파와 그동안 밀고 밀리고를 반복했으니까요.”

“그래. 그런 국왕을 가지고 놀듯이 했으니까.”

“반왕파끼리의 모임을 자주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동반한 모임을 최대한 만들어야겠군.”

“아이들 간의 교류를 명목으로 하는 모임이라. 좋습니다. 정치적 목적을 감출 수 있으니까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왕실이 주도해야 할 건국제를 그녀의 건국제로 탈바꿈했다.

그 과정을 본 반왕파의 귀족들이 엄청나게 눈을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자신을 받아 달라고 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반왕파의 어떤 이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자신들이 당신을 돕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있다는 듯이 바라봤다.

친왕파도 반왕파도 분위기는 별로였다.

그러면 중도파는?

그들도 그리 좋지 않았다.

중도파는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의 완충재와 같았다.

웬만해서는 세력이 흔들릴 일이 없었다.

겉으로 보자면 그들은 반왕파와 친왕파만큼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중도파 내부에서도 각 가문의 이익에 따라 따로 움직이는 일이 많았으니까.

각자의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는 파벌이 중도파였다.

그렇지만 이 일은 너무 컸다.

“이제 중도파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그럴 리가… 반왕파와 친왕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균형을 맞춰 왔지 않는가.”

“이제까지 없던 독자적인 세력이 형성될 것이야. 그 수는 점점 늘어나겠지. 중도파 소속 귀족들이 얼마나 이탈하느냐에 따라서 중도파는 해체될 수 있어.”

“일단 우리 파벌 귀족들에게 외부활동은 자제하라고 해야겠군요.”

“최대한 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조용히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

중도파의 존폐 앞에서 의연할 수는 없었다.

중도파가 파벌로 인정받는 것은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를 넘나드는 유연함과 친왕파와 반왕파도 함부로 굴 수 없는 세력이 있어서였다.

만약 다수의 중도파 귀족이 페루제 루비로즈 메디치를 따르겠다고 나선다면?

더는 세력다운 세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면?

중도파는 사라지는 것이다.

각 세력의 수뇌부가 세력 유지를 위해 고심했다.

“오늘 연회는 이만 마치도록 하지.”

드디어 국왕의 선언이 들려왔다.

다리가 떨리는 긴장감을 주던 연회장이었다.

귀족들은 아쉬움이라고는 없는 얼굴로 빠르게 연회장을 벗어났다.

마치 함정에 빠진 사슴이 탈출하는 모양새였다.

페루제 공작부인도 나가려고 했다.

남편과 함께 말이다.

그녀가 벨로나 공작을 봤다.

그 시선을 느낀 벨로나 공작이 말했다.

“나는 폐하와 할 말이 있으니 나중에 가지.”

“그러시지요.”

부부 동반으로 온 연회에서 따라 나간다는 것은 부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는 꼴이었다.

물론 정말 업무로 인해 같이 나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는 부부가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되 남편은 바로 다시 돌아왔다.

아내를 존중한다면 ‘같이 나가는 척’이라도 할 수 있음이다.

벨로나 공작은 그녀를 위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눈썹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벨로나 공작은 그런 모습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로 인해 경악한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다시 보내지 않겠습니다. 왕궁에 말이 많으니 폐하께서 한 마리 정도는 빌려주시겠죠.”

“내가 알아서 갈 것이니 그 입 좀 다물게.”

담담하다 못해서 국왕을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설마 국왕이 말 한 마리도 빌려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냐는 뜻이거나, 측근에게 그것도 빌려주지 못할 만큼 옹졸하냐는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둘 다를 내포할지도 모른다.

벨로나 공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는 손을 휘저었다.

빨리 꺼지라는 뜻이다.

“다물고 가라고 하면 가야지요. 폐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벨로나 공작의 말처럼 어서 가게.”

왕의 반응도 벨로나 공작과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언짢음에도 그녀는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고 아주 우아하게 연회장을 나갔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복도를 걷다가 어느 순간에 멈췄다.

귀족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곧 복도는 조용해졌다.

그러자 한 시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안내해라.”

“예.”

그녀는 한 시녀를 따라 걸었다.

다른 곳에 비해 관리가 덜한 듯한 느낌이 드는 곳으로 갔다.

목적지를 좀 돌아서 가는 느낌도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덜한 곳으로 가느라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이해한다. 뭐, 알릴 만한 일도 아니지.”

그리고 그들이 도달한 곳에는 신전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3, 4명 정도가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여기저기 보수해야 할 곳이 많아 보였다.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알았다.”

그녀가 신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한 여인이 보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대비마마, 오늘 어떠셨습니까?”

“오늘 어땠냐고?”

대비가 되물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참고 인내한 보람이 있는 하루였네.”

“그동안 잘 참으셨습니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듯이 잠시 멍하게 허공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페루제 공작부인을 응시했다.

“그대가 그들의 주인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그 세월 동안 폐하와 그 측근들을 속일 수 있었지요.”

“맞아. 그리고 그대는 나와 가문의 은인이지.”

“과찬이십니다.”

대비의 말처럼 페루제 공작부인은 대비와 그 가문의 은인이었다.

친아들처럼 여기던 태자를 잃고 얼마나 분했는가.

사생아가 정식으로 왕족이 되고 태자가 되는 것을 누구보다 막고 싶었다.

친동생처럼 아꼈던 사생아 동생에게 죽임을 당한 그 아이가 불쌍해서라도 말이다.

죽은 아이의 장례식에서 가문의 힘을 써서 막아내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녀가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과찬이 아니지. 그대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의 가문은 몰락하거나 멸문되었을 것이야.”

“조언은 조언일 따름입니다.”

선왕은 자신의 자식이 다음 대의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사생아는 왕의 자식이라도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그러니 죽은 태자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현왕의 입적을 추진한 것일 테지.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기간 따위는 없다는 행보는 대비의 분노를 더 크게 만들었다.

동시에 아끼던 정부의 아들을 후계로 삼고 싶어서 사생아와 함께 장남을 죽였다고 여기게 했다.

“그 조언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대비마마의 몫이지요. 그러니 마마는 자신의 선택으로 가문을 지켜내신 것입니다.”

“그리 나를 치켜세워 주니 고맙네.”

대비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누구보다 그녀를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겠지.”

“물론입니다.”

“나는 그대가 한 약조를 잊지 않았네.”

“저도 잊지 않았지요. 제가 약조했지요. 가장 높은 절벽 끝에서 국왕이 떨어지도록 도와드리겠다고요.”

“그래. 그래야 절망도 깊을 것이니까.”

대비의 눈빛이 경멸로 돌변했다.

국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혐오감이 올라왔다.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긴 아이를 죽인 원수였으니까.

“그대의 말처럼 우리 가문은 중앙 정치에 손을 떼고 내실을 키우는데 집중했지. 나와 가문은 이제 준비가 되었어.”

“그래서 제가 건국제에 참석을 한 것이지요.”

대비가 자신과 가문은 준비가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의 뜻은 왕실과 한 판 붙을 준비가 되었다고는 것이고, 대놓고 반왕파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일단 궁의 사람들을 싹 바꿔야 합니다.”

“나는 대비궁 말고는 그리 영향력이 있지 않아.”

왕궁에서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 안에 자기 사람이 많아야 한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사람을 많이 심어 둘수록 왕궁 안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그들이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것이니까.

“압니다. 폐하께서 대비마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요.”

“그래. 내정 업무는 철저하게 왕비에게 결정권이 있지.”

“그러면 걱정할 것이 없군요. 오늘 왕비의 신뢰를 얻었으니까요. 왕비과 친해진다는 명목으로 자주, 자주 궁에 출입할 생각입니다. 영지로 돌아가기 전까지요.”

오늘의 일로 왕비는 국왕과 정부에게 당했던 서러움을 풀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왕비는 그 서러움을 더 풀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 페루제 루비로즈에게 기대게 되겠지.’

그렇게 점점 왕비가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만들 것이다.

종국에는 자신의 생각이 마치 왕비의 생각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말이다.

“왕비를 친해질수록 사람을 심어 놓기 편하겠군.”

대비는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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