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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4화 (124/221)

124화 네가 왕비

국왕이 메트레상티트르가 죄를 저질렀다고 확신하게 된 때였다.

“폐하! 이 일은 저희 호구니라 후작가문을 위협하고 모욕하는 짓입니다.”

“맞습니다. 진상을 밝혀서 그 죄에 맞는 벌을 내려야만 합니다.”

“제 딸의 모욕을 갚아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모습을 본 왕비는 눈이 크게 떠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는 눈빛이었다.

왕비는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두 눈으로 이런 일을 보게 될 줄이야.’

왕비가 미혼일 적의 이름은 ‘네가 호구니라’다.

호구니라 후작가문의 딸로 자라왔다.

사랑받던 딸로 자랐으나 왕비가 된 이후로는 외로움 그 자체였다.

왕비로 지낸 세월 동안 누구도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의 모욕을 외면하며 질투하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남편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동생은 누나의 치욕을 왕비라면 버텨야 한다며 훈계했다.

그러나 한 여인이 자신의 편이 되자마자 상황은 달라졌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내 편이 되어 주니 모두가 나의 편이 되어 주는구나. 가족도 남편도 나의 편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왕비의 아버지가 왕에게 항의하게 만들었다.

동생도 나서게 했다.

어머니도 같이 소리를 높이게 했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가문의 세력을 움츠리게 할 큰 사건이었으니 당연했다.

그 큰 사건을 인위적으로 만든 인물은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왕비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장수의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동시에 왕비는 씁쓸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문을 위해서 나섰구나. 나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말이야.’

왕비는 가족보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가족들이 외면하던 자신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휴게실에 난입하여 자신을 구했다.

국왕과 척을 질 각오로 자신을 구해줬다는 생각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신뢰하게 해줬다.

“저희 가문을 생각하신다면 간청하건데 제발 조사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건 아니 될 말이네.”

호구니라 후작가문 일가가 불신의 눈빛으로 왕을 노려봤다.

이는 왕실이 호구니라 가문을 내친다는 의미였으니까.

왕비를 내친다는 것은 왕비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다.

“혹시 정녕 저희 가문을 밀어내고 저 정부를 왕비로 두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소. 누구보다 그대들의 충심을 잘 알고 있거늘.”

만약 메트레상티트르의 발언이 왕의 의중이 담긴 것이라면 호구니라 후작가문은 언제든지 반왕파로 갈 생각이 있었다.

그때야 말로 새로운 싸움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페하의 말을 거짓으로 퍼트린 저 죄인을 치죄하셔야 합니다.”

“저 악독한 여인을 조사하고 벌을 내리도록 해주십시오!”

페루제 공작부인이 집어삼킨 건국제의 주도권은 대비에게 이어져서 국왕을 위협했다,

“국왕의 의중을 거짓으로 떠벌린 죄는 죽어 마땅하오.”

“맞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노력한 공이 있으니 목숨을 거두는 것은 과하오.”

더는 아니 되었다.

국왕은 더 이상 메트레상티트르를 두둔할 수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메트레상티트르를 굴욕적으로 끌고 간 것도, 수치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밟은 것도, 어느 것 하나도 단죄할 수 없었다.

그것들을 이유로 벌을 주기에는 메트레상티트르의 죄가 무거웠다.

총애한다는 이유로, 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는 부족했다.

대비가 나선 것을 넘어가더라도 말이다.

메트레상티트르의 말이 알려진다면 민심은 심하게 흔들릴 것이다.

그것을 알고도 넘어간다면 민심은 흔들리다 못해서 지진이 날 수 있었다.

국왕이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마치 그곳이 아픈 것처럼 말이다.

“메트레상티트르는 지금부터 더는 메트레상티트르가 아니다!”

“폐하! 누명입니다!”

그녀가 일어났다.

왕비의 거짓말에 그녀는 왕궁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평소 행실이 이 상황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메트레상티트르는 온 힘을 다해서 일어났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힘을 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국왕에게 다가갔다.

“저는 결단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왕비가 이미 진실이라 인정했다.”

“왕비마마께서 저를 질투하여 거짓을 말하신 것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너는 내 허락도 없이 건국제에 참석했다. 나의 권위를, 왕비의 권위를 떨어뜨렸어.”

국왕은 자신에게 다가오던 메트레상티트르를 냉정하게 쳐냈다.

왕실이 주도해야 할 건국제가 페루제 루비로즈에게 농락당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백성들의 고달픔을 조롱하는 말을 하였다. 이는 왕실을 향한 백성들의 믿음을 불신으로 만들 일이다.”

“…….”

“당장 너는 궁을 떠나야 하며 그 어떤 재물도 가져나갈 수 없다.”

메트레상티트르가 칭호를 반납하고 떠나게 되면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재물을 하사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너무 커서 도저히 재물을 내릴 수 없었다.

되도록 몸을 보전해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왕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일국의 왕비를 폐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안 될 일입니다.”

“분명히 그것을 원한 배후가 있을 것입니다! 조사하여 불순한 무리도 함께 벌을 내려주십시오!”

호구니라 후작가문은 국왕의 결정을 강하게 거부했다.

그들은 메트레상티트르가 호구니라 후작가문을 노리는 무리와 손을 잡았다고 여겼다.

왕비를 폐한다는 말을 할 정도의 세력이 뒤에 있다고 말이다.

가문의 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메트레상티트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이 말하는 조사가 고문임을 모르지 않았다.

귀족가문의 영애로 살았고 뛰어난 언행과 외모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생 따위는 해본 적 없는 삶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문을 견뎌 낼 리가 없었다.

“그만하시오!”

“맞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왕의 외침에 우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크게 말한 것도 아닌데 좌중의 시선을 모았다.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여유롭게 웃었다.

건국제를 역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세운 인물치고는 여유가 넘쳤다.

양심의 거리낌도 없는 듯했다.

“아둔한 정부 하나로 인해 건국제의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지요.”

“맞는 말이야.”

국왕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수상했다.

수상하다고 한들 메트레상티트르를 살리려면 그녀의 말에 동조해야 했다.

“무엇보다 폐하를 위해 헌신한 공로는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동시에 호구니라 후작가문의 의견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간악한 것과 손잡은 무리가 있을 수 있어요.”

국왕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노려봤다.

국왕과 호구니라 후작 중 누구의 편을 들지 간을 보는 모양새였다.

그것을 호구니라 후작일가도 알아챘다.

그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잊으신 것이 있습니다.”

“잊은 것이라니?”

“이 일의 피해자는 호구니라 후작가문도 아니고 폐하도 아니십니다. 바로 왕비마마입니다.”

메트레상티트르로 인해 피해를 본 인물은 왕비였다.

그녀를 벌할 권한도 왕비가 행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모두가 메트레상티트르의 죄와 그에 관한 단죄에 빠져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벌을 내리려면 응당 왕비마마께서 내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현명한 답이네. 페루제 공작부인!”

“감사합니다. 대비마마.”

그 말에 대비가 박수치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왕비를 바라보며 따스하게 물었다.

“왕비마마께서는 제 의견을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역시 현명해. 그래. 왕비가 원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대는 어찌하기를 원하나?”

대비가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왕비를 향해서 작게 윙크를 날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이 말이다.

왕비는 갑작스럽게 생긴 우군으로 인해 자신감이 생겼다.

“감히 왕실을 기만한 죄인입니다. 메트레상티트르의 호칭 반환은 당연한 일이며 그녀의 가문에도 그 죄를 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리 총명한 인물이 왕비라니 왕실의 복이네.”

대비가 왕비를 치켜세워 줬다.

그녀는 왕비가 자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그 진심을 보여줬다.

“아닙니다. 왕비로 해야 할 결정인 것을요.”

“겸손하기까지 하군. 정말 부족한 것이 없는 왕비일세.”

네가 왕비의 귀가 옅게 붉어졌다.

왕비가 되고 나서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하며 좋아하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메트레상티트르가 무릎을 꿇으며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기 분수를 넘는 짓을 하기는 했어도 말이다.

지금 결정권을 지닌 사람이 국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제발 저희 가문만은 건들지 말아주십시오!”

“왕비마마께서 말씀하고 계시거늘 어디 감히 나서느냐.”

“꺄악!”

페루제 공작부인이 메트레상티트르의 머리를 잡아서 넘어뜨렸다.

그녀는 그 과한 행동에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하나 때문에 가문이 해를 입게 생겼다.

메트레상티트르에 연관된 무리를 조사하는 것과 메트레상티트르의 가문까지 벌을 내리겠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메트레상티트르’에 관한 조사는 조사의 결과에 따라 가문의 처우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국왕도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하고 그녀의 가문은 죄가 없으니 안위를 도모할 수 있었다.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고 자비를 요구하다니 정말 뻔뻔하구나.”

“페루제 공작부인, 그 여인은 원래 오만하고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었네. 그대가 이해하게나.”

“왕비마마, 마마께서 저 악랄한 여인에게 당했을 수모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왕비는 조사는 언급하지 않고 바로 가문에도 죄를 묻겠다는 말한 것이다.

가문의 죄도 아닌 자신의 행동으로 가문을 벌하겠다니 아니 될 말이다.

조사 없이 가문을 벌주겠다는 것은 그녀의 가문을 몰락시키겠다는 저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를 위해 이렇게 눈물을 흘려주다니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주책입니다.”

“아니네.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는지 모를 것이야.”

왕비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가에 자신의 손수건을 댔다.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줬다.

그리고는 대비, 왕비, 페루제 공작부인이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

“제가 제 주제도 모르고 나댔습니다. 저희 가문과 상관이 없이 저 홀로 그런 것이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다.

한 번쯤은 동정하고 자비를 베풀 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작 자비를 베풀 권리를 지닌 이들은 관심이 없었다.

왕비가 다정하게 웃었다.

메트레상티트르는 움찔거렸다.

왕비의 눈에 담긴 살의를 눈치챘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페루제 공작부인과 잘 상의하여 그대와 가문의 벌을 결정하겠네.”

“저까지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비의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연기가 참으로 수준급이었다.

“그대도 저 여인으로 인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는가. 그대도 피해자이니 같이 벌을 결정해야지.”

“이리도 저를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국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연회장 안의 주도권은 대비, 왕비, 페루제 공작부인이 나눠 가졌다.

연회장 귀족들의 의견도 왕비가 메트레상티트르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궁인을 벌주는 것은 왕비의 역할 중 하나다.

메트레상티트르는 왕궁에 거주하는 정부.

그녀를 궁인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왕비가 벌을 주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단지 법도보다 왕의 총애가 우위에 있어서 그런 적이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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