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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3화 (123/221)

123화 웅크리던 여인

국왕이 태자가 된 이래로 궁정의 일에서 스스로 멀어졌던 대비.

그런 대비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아들의 잘못을 외면하는 그런 어미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대비와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미 연결고리가 있었다.

두 사람이 합의하에 국왕을 모욕하는 상황을 유도한 것이다.

어쩌면 메트레상티트르가 국왕의 허락도 없이 이곳에 있는 것도 그들의 계략이었는지 모른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 선언에 감동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왕실의 어른이 굳건하게 계시니 왕국의 미래가 든든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곳에서 대비의 선언을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대비의 명분은 타당했고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원래부터 대비도 궁정의 일을 하는 것이 맞았으니까.

“대비마마, 마마께서 마음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것은 분명히 기쁜 일입니다. 하오나…….”

“하오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벨로나 공작.”

대비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벨로나 공작이 나섰다.

이 흐름은 좋지 않았다.

대비와 자신의 아내가 손을 잡았다.

친왕파와 왕실에 득이 될 일보다 독이 될 일을 하리라 확신했다.

특히 그녀는 왕권이 약해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었으니까.

대비가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들이 궁정에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제가 알기로는 제 아내와 대비마마 사이에는 아무런 접전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게 된 모습은…….”

“내가 단교되었던 라스타 왕국의 인물과 내통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벨로나 공작의 말은 대비로 인해 끊어졌다.

대비가 언짢아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사항이었어도 말이다.

초면인 상대로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대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두 사람은 이미 서로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몇 년 간 친분을 쌓은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에 드리는 말입니다.”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아랫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 그런 것을 의심하다니 실망이군.”

대비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대비마마, 남편의 말을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다 제가 부덕하여 생긴 일입니다.”

“그대 같이 지혜롭고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쯧.”

대비가 혀를 찼다.

어쩌면 연회장에서 하는 말 중에 가장 웃긴 말이 아닐까 싶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착하다니 말이다.

지나가던 개가 경악하고 몸이 굳을 소리다.

“정말로 대비마마와 제가 의심스럽다면 조사를 하시지요.”

“그러게. 떳떳하니 조사를 받지 않을 이유도 없지.”

라보 공작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비마마, 아니옵니다. 왕국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과한 말을 뱉은 것뿐일 것입니다.”

“라보 공작!”

“그만하게. 그대가 이럴수록 왕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네.”

라보 공작은 대비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만약 조사를 하여 실제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라보 공작의 업무 소홀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실수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대비는 공식적인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궁 안에 있었다.

공식적인 외출은 정기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었다.

구민활동이나 환자 병간호 등이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날 만한 계기는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서신도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대비를 만나기 위해 궁에 온 사람들은 같았다.

의심할 만한 변화가 없었다.

대비는 한결같았다.

그에 비해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국에서 권력을 가지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라보 공작이 생각하기에 조사를 벌여 봤자 무혐의가 나올 것이었다.

그리되면 대비를 억압하는 아들로 왕이 공격을 당할 것이 자명했다.

친모가 아님에도 사생아에 불과했던 국왕이 왕이 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대비였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라보 공작이 작게 귓속말했다.

“지금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있네. 그만하게.”

“그렇지만…….”

“대비마마를 공격해 봤자 욕은 폐하가 다 먹네.”

벨로나 공작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제가 너무 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왕국을 위한 충정이 과한 것이 어찌 죄겠는가. 다음에는 조심해 주면 되네.”

대비가 우아하게 말했다.

아까까지 기분 나빠하던 얼굴이 서서히 사라졌다.

왕이 그 모습에 이를 갈았다.

“어마마마, 페루제 공작부인은 저를 모욕했습니다.”

“응? 그거 다 끝난 이야기 아닌가?”

“그녀가 저지른 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귀족모욕죄도 사형으로 다스릴 죄.

왕족모욕죄도 사형으로 다스릴 죄.

귀족에게도, 왕족에게도 모욕을 하면 사형이다.

평민의 기존일지라도 그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하물며 국왕을 면전에서 모욕했다.

그 죄는 사형으로 다스려도 결코 과하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귀족이라서 사형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했다.

연회장의 주도권이 대비에게 갔지만 다시 찾으면 된다.

그리 생각했다.

대비의 얼굴이 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폐하, 간언과 모욕의 차이를 모르는가?”

“감히 왕족의 혈통을 가지고 말을 했습니다. 어찌 그것이 간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어미도 죽이시지요. 나도 그대의 친모를 거론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따지면 나도 그대를 모욕한 것이겠지요.”

“어마마마!”

벨로나 공작도, 라보 공작도 알았다.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알았다.

이래서 대비가 이곳에 왔음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벌을 내리려거든! 어디 패륜을 저지르고 벌을 내리라는 말입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몇 년 동안 침거하던 대비의 공식적인 활동이다.

그런 날에 진짜로 왕이 패륜을 저지른다?

그냥 반란의 명분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패륜아을 몰아내겠다는 명분.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대비는 공식적으로 죄를 진 적이 없었고 백성들 사이에는 이미 좋았다.

그녀는 대비가 되고 난 뒤에 꾸준히 백성들을 위한 봉사를 했다.

손수 병자들을 간병하며 진실 된 모습을 보여줬다.

대비를 위협하는 행동은 민심을 흔들 수 있었다.

“이 어미를 내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더는 페루제 공작부인에 관해 말하지 마세요!”

“왕이 자신을 모욕한 자를 그대로 둔다면 어찌 권위가 살겠습니까!”

“그러고 싶으면 이 어미부터 벌을 내리세요!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날을 위해서 대비는 침거하며 경계심을 늦추게 만들고, 봉사를 하며 민심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 나올 수 없는 당당함이었다.

모든 계산을 끝냈기에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일 것이다.

“대비마마, 저를 위해서 이리 나서 주시다요. 저 때문에 모자관계가 나빠질까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 아들의 잘못을 가르치는 것이 어미의 역할이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국왕의 약을 바짝 올렸다.

정말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덜 미울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대비를 봤다.

“그러면 대비마마께 제가 밟고 있는 죄인의 다른 죄를 말해도 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제 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대단했다.

이 긴장감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왕의 정부를 힘껏 밟고 있었다.

힘이 빠질 만도 하건만 힘이 좋았다.

“이 죄인이 왕비마마를 모욕한 것도 대죄인데 그것으로 부족한 모양입니다.”

“저 죄인이 다른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글쎄, 왕비마마께서 죄인의 무례와 사치를 지적하며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대답이 가히 경악할 만한 말이었던지라…….”

“무슨 말을 했길래?”

“백성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뭐라?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왕비! 그 말이 정녕 사실인가?!”

대비와 페루제 공작부인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왕비에게 향했다.

왕비는 깨달았다.

휴게실에서 메트레상티트르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물음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한 대답의 의미를 말이다.

왕비인 자신이 하기에 달렸다는 말은 이 순간을 위한 말이었던 것이다.

왕비는 국왕과 메트레상티트르를 한 번씩 돌아가면서 봤다.

자신을 모욕한 메트레상티트르와 그 모욕을 침묵으로 일관한 남편이 보였다.

왕실의 권위를 위해서는 메트레상티트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야 했다.

“거, 거짓말입니다!”

“닥쳐라! 지금 왕비가 대답하려고 하지 않느냐!”

메트레상티트르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절규에 가까웠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

이 상황이 자신의 목숨을 조여 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대비는 그 절규를 단번에 틀어막았다.

왕비는 저 모습을 보니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선택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만난 순간부터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거짓을 말했다.

“네. 분명히 그리 말하였습니다.”

“왕비마마,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네.”

왕비는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꾸짖었더니 폐하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을 용서해 주신다며 저 같은 왕비 따위는 폐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런!”

“한낱 정부 따위가 어찌 그런 막말을 한단 말인가!”

평소에 정숙하기로 소문난 왕비였다.

그런 왕비가 거짓말을 하리라고 아무도 여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일국의 왕비를 쫓아낼 수 있다고 말하다니!

왕국의 위계가 흔들리고 있음이다.

동시에 그런 말을 할 만큼 국왕이 그녀를 총애했다는 말일 수 있다.

왕국의 위계를 국왕이 스스로 흔들어 놓은 꼴인 것이다.

“얼마나 메트레상티트르에게 힘을 실어 줬으면 그런 말을 하겠는가.”

“정부를 왕비로 들이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메트레상티트르가 귀족가문의 여인이기는 하기는 하지.”

“스스로 왕실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네요.”

그곳에 있던 귀족들이 국왕을 비아냥거리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대비와 페루제 공작부인이 함께 만든 이 분위기는 왕비가 거짓을 말한다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하게 했다.

오직 국왕만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 질문은 메트레상티트르의 얼굴을 굳게 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증명해 줄 사람들은 없느냐?”

“없, 없사옵니다.”

왕비와 그녀는 휴게실에서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을 막았으니까.

그들의 대화를 들은 인물들은 없었다.

자신이 왕비에게 하는 태도들이 왕의 귀에 자세히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목을 옥죄였다.

“네가 누명을 당했음을 증명할 길이 없구나.”

“그렇지만 저는 누명을 당한 것이 맞습니다!”

“너는 이미 나의 허락도 없이 여기에 왔다. 너를 신뢰하기보다는 불신해야 하는 상황이다.”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함부로 메트레상티트르를 두둔하기는 어려웠다.

“닥치거라! 그러면 일국의 왕비인 내가 나의 지아비이자 알펜 왕국의 왕인 폐하를 기만했다는 것이냐!”

왕비가 거짓말을 했다는 증인이 없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었던 인물은 휴게실에 난입한 페루제 공작부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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