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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2화 (122/221)

122화 침묵하던 대비

국왕은 더는 참지 못했다.

자신의 불완전한 혈통은 그가 평생을 짊어져야 할 약점이자 치부였다.

“감히 왕을 모욕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기느냐!”

“그러니까 폐하가 당신을 낳으신 분을 닮았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사형을 시킬 것 같은 눈빛이었다.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목소리였다.

두려움이 일만도 하건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기 할 말을 했다.

그것이 국왕을 자극했다.

“당장 이년을 감옥에 끌고 가라. 내 친히 사형 날짜를 잡을 것이다!”

“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대화였다.

정신을 놓았던 병사들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왕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한숨까지 쉬었다.

역시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데는 1등이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벨로나 공작은 눈을 감았다.

겨우 상황이 진정되는가 싶었는데 그녀가 한순간에 다 망쳐 놨다.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그녀가 발언할 기회를 줬는데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대비마마께서 연회장에 드시옵니다.”

모두가 시종의 소리에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다.

우아한 보라빛 드레스와 화려한 장식구를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정말로 대비였다.

이 연회장에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귀족들이 너무 놀라서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제가 지금 제대로 본 것이 맞습니까?”

“믿어지지는 않지만 맞는 거 같아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건국제 연회에 오신 적이 없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까요.”

그들은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계속된 충격적인 일들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여기서 더 놀랄 일은 없다고 여겼는데 말이에요.”

“더 놀랄 일이 있었네요.”

국왕도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들어오자 당황스러웠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느끼던 분노가 잠시나마 사라질 만큼이었다.

그는 대비 앞으로 다가갔다.

대비는 다가오는 왕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폐하, 오랜만이군요.”

“어마마마. 어찌 이리 오셨습니까?”

“왜요?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이 불편합니까?”

“그럴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국왕은 평민 출신 정부의 아들이다.

사생아의 신분으로는 왕위를 이을 수 없기에 법적으로는 대비의 아들이 되어야 했다.

‘어마마마’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가 적법한 왕위계승자임을 호칭에서부터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그날 이후로 건국제 연회에 참석하신 적이 없어서 놀랐을 따름입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그날에 잡혀 살 순 없지요.”

과연 귀족들과 국왕, 대비가 말하는 ‘그날’은 언제인가?

그들이 말하는 그날은 현왕의 형이자 선왕의 장자였던 이가 죽은 날이었다.

본디 죽은 국왕의 형님 되는 인물은 대비의 자식이 아니었다.

그도 정부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명백히 국왕과 차이가 있었다.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힘든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어서 쉬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죽은 형제의 어미는 명문가문의 여식이었고 좋은 성품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국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겸손했고 윗사람을 존중하며 따를 줄 알았다.

왕궁 안에서 지금의 대비와 가장 친했던 인물도 그녀였다.

오죽하면 그녀의 아들이 태자가 되는데 가장 힘을 실어 준 인물이 대비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그녀가 죽을 때 임종을 지킨 인물이 대비인 것도 이해가 되었다.

대비가 국왕에게 섭섭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역시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 싫으시군요.”

“아닙니다. 어마마마.”

“하긴 제가 폐하의 친모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어찌 어마마마를 싫어하겠습니까.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대비가 힘을 실어 줄 만한 인품과 능력을 지녔다.

온화함을 유지하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었고 뛰어난 능력과 더불어 신하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줄 안목도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반왕파 소속의 귀족들조차 그가 왕이 되는 미래를 기대하게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선왕과 대비의 압도적인 지지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태자는 갑작스럽게 낙마사고로 죽었다.

그 사고가 지금의 국왕이 저지른 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고발생 경위를 조사하던 관리들이 급하게 조사를 마무리한 것과 국왕이 빠르게 현왕을 태자로 책봉한 것이 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그 아이가 여기에 있었다면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기보다는 이곳에서 나의 마음을 풀어줬을 것입니다.”

대비가 눈을 아래로 깔며 글썽거렸다.

“그 아이가 사고로 죽지만 않았어도 이리 홀대를 받지 않았을 것인데…….”

“어마마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뭐하느냐! 어서 어마마마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라!”

국왕은 기겁을 하며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대비가 부담스러웠다.

그 저의를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폐하가 태자로 책봉되었을 때, 가장 힘을 실어 줬던 이가 바로 나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물론입니다.”

국왕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대비는 상당한 군세를 지닌 명문가문 출신이다.

당시에 그녀가 대놓고 그의 입적을 반대했다면 지금의 자리를 얻는데 상당히 고생했으리라.

국왕은 당시에 대비가 자신이 태자가 되는 것을 막으리라 여겼다.

“언제나 가슴 속에 감사함을 새기고 있습니다.”

“그래야지요. 그대를 낳은 여인이 워낙 악랄했습니까. 출신도 그렇고요.”

국왕의 어미가 살아생전에 워낙 못되게 행동했으니까.

왕비였던 대비를 모욕하며 망신스럽게 만드는 일을 취미라고 말하고 다니던 인물이었으니까.

자신이 형님을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도 한몫했다.

친아들처럼 여기던 아들을, 친자매처럼 여기던 이의 아들을 죽인 인물이 태자가 세우는데 찬성할 리 없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에 말이 많았다.

다른 의중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었다.

그녀가 순순히 국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별도의 행동에 나서지 않아서 그 당시의 의혹은 사그라졌다.

말을 마친 대비는 국왕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어딘가에 섰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앞이었다.

그녀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끌고 가려던 병사들을 차갑게 일갈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순순히 그들에게 팔이 잡혀 있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감히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손을 대는 것인가!”

“네?”

“당장 그녀에게 떨어져라.”

병사들과 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국왕과 대비를 번갈아봤다.

그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국왕의 명령을 따르게 되면 국왕의 어미인 대비를 무시하는 것이다.

국왕의 어머니란 자리는 국왕보다 낮은 자리라고 해도 그 권위는 더 높은 자리였다.

어머니란 위치는 그러했다.

국왕이라고 해도 부모를 함부로 할 권리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대비는 몇 년 만의 건국제 참석이 아닌가.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비의 말을 따르자니 그것은 국왕의 명령을 불복하는 것이 되었다.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은 대죄였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을 보며 대비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대비의 명령에 따르라는 뜻이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물러나자 대비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꼴인지… 괜찮은가?”

“저는 괜찮습니다.”

대비가 친히 병사들이 붙잡았던 팔 부분을 털어줬다.

다정한 말투는 상대에게 얼마나 호의적인지 느끼게 해줬다.

“내가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들었네.”

“그러십니까?”

“마음이 넓은 그대가 참으시게.”

순식간에 귀족들과 왕족들이 벙찌게 되는 순간이었다.

누가 보아도 국왕을 모욕한 죄를 저지른 인물은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그런데 대비는 그녀를 피해자로 보는 말을 한 것이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어쩜. 이리도 성품이 좋을까.”

“귀족으로 당연히 쌓아야 할 마음이지요.”

“그래. 그리 생각해 주니 내가 다 고맙네.”

대비는 시종일관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스하게 대했다.

말투부터 눈빛까지 호감으로 가득했다.

“폐하도 그대처럼 위치에 걸맞은 인품을 지녔어야 하는데 안타까운 일이에요.”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다시 귀족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들은 그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침이 흘러도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왕국의 주요 귀족이 모인 자리다.

이런 곳에서 대비는 국왕 면전에서 그를 욕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욕을 한 것이 국왕의 어머니인지라 이를 두고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어미가 자식을 훈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면 그뿐이니까.

황망하다는 듯한 페루제 공작부인의 질문에 대비가 푸념하듯이 대답했다.

“천박한 태생은 교육으로 감출 수 있다고 여겼거늘. 고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어마마마!”

“좀 더 어린 나이에 내가 가르쳤다면 달라졌을까?”

“말씀이 과하십니다! 선을 넘지 마십시오!”

더는 아니 되었다.

국왕은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했다.

혈통이라는 콤플렉스를 마구 자극하는 말이었으니까.

또한 이는 왕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말이었다.

대비가 말을 꺼냄으로 벌을 내릴 수도 없다.

어머니가 말실수했다고 벌하는 자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물며 그녀는 그가 왕이 되도록 도운 인물이었다.

국왕의 분노에 대비가 더 크게 소리쳤다.

“폐하! 그동안 그대의 행동을 눈감은 것은 그대가 알아서 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비마마…….”

페루제 공작부인이 애달프게 바라봤다.

대비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대비는 그녀에게 나만 믿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서로가 든든한 아군이라도 된 듯 말이다.

“그런데 정부를 건국제에 들여서 왕비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짓을 하더군요.”

“어마마마, 그건!”

“설마 한낱 정부가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여기에 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게까지 왕실의 권위가 떨어진 것입니까!”

일국의 국왕을 모욕했음에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발판을 마련했다.

모든 것은 자식을 훈계하기 위한 어머니의 발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여기에 ‘모욕’이라고 말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훈계를 가장한 모욕이라도 주장할 요소를 찾기 어려웠다.

왕실의 권위를 훼손하는 아들을 혼내는 대비의 행동은 정당했으니까.

“언제부터 이 왕실이 메트레상티트르 하나에 좌지우지되었단 말입니까!”

메트레상티트르의 등장 하나로 모든 것은 국왕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는 이 와중에도 밟혀 있는 메트레상티트르를 노려봤다.

이 연회가 끝나면 당장 내치리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대의 아내가, 왕자들의 어미가, 일국의 왕비가, 모욕을 당했습니다. 어찌 그것을 알고도 가만히 있고 페루제 공작부인을 혼낸단 말입니까!”

“대비마마, 저는 괜찮습니다. 그만하시지요.”

누가 그러던가?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얄밉다고 말이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말리는 척하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뺨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동안 그리 침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것이에요!”

대비가 이제는 궁정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선언할 명분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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