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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1화 (121/221)

121화 귀족의 정석

연회장에는 착 가라앉는 분위기가 엄습했다.

뭐라고 반응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지금 내가 제대로 그대의 말을 들은 것인가? 다시 말해 보거라.”

“당장 제 밑의 여인을 죽이라고 청했습니다.”

감히 왕의 정부를!

그것도 왕궁에서 사는 것이 허락된 메트레상티트르를 죽이라니!

이것은 그녀를 지지하는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짓이었다.

또한 모욕죄로 인한 사형은 오직 평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 여인이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네. 폐하. 지금 제가 이리 엉망으로 만든 여인이 누군지 압니다.”

이를 악물고 겨우 내뱉은 왕의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그녀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왜 이것을 조심스럽게 답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정녕 누군지 안다고?”

“메트레상티트르가 아닙니까?”

“지금 그대의 행동이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임을 알겠군.”

메트레상티트르는 왕이 가장 아끼는 정부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다.

그런 여인을 건드렸으니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처럼 컸다.

왕의 살기가 모두를 움츠리게 했다.

여기서 당당한 사람은 오직 두 명이었다.

“어찌 감히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겠습니까?”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하나는 당연히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뻔뻔한 페루제 공작부인의 태도에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으으.”

뾰족한 구두의 뒷부분에 밟혀 신음하는 메트레상티트르가 보였다.

왕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구해야 했다.

“당장 그녀를 밟고 있는 발부터 치워라!”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왕의 일갈에도 그녀는 전혀 행동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발에 더 힘을 줬다.

상대가 더 고통스러워질 수 있도록 정성껏 말이다.

“으윽!”

울먹이며 메트레상티트르가 왕을 올려다봤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일부러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잠시 힘을 뺀 듯했다.

“폐하, 제발 구해 주세요. 아악!”

그 잠시는 진짜로 찰나였다.

그녀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도 그녀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장! 이 죄인을 끌고 가라!”

“폐하! 이 여인이 벌인 일이 죄가 분명합니다. 하오나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일이지 않겠습니까.”

의외의 인물이 왕의 명령을 막기 위해서 나섰다.

왕의 살기에서도 담담했던 다른 인물.

그는 바로 벨로나 공작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찌 그대가 나를 막아선단 말인가!”

“폐하, 저는 그녀를 끌고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 아내의 죄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왕국법에는 아내의 죄는 남편의 죄와 같다고 하였다.

그녀가 죄인이 되면 벨로나 공작도 죄인이 되었다.

벨로나 공작 가문의 명예는 실추되고 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재산을 잃게 되리라.

“단지 상황의 경중과 죄의 경중을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아내라는 여인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교황과 한편인 그녀가 절대로 이혼해 줄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죄를 저질렀음에도 말이다.

벨로나 가문만 손해를 보는 것이다.

“폐하, 제 아내는 행동이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명분이 없는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감히 내 앞에서 저 죄인의 편을 드는가!”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과연 그녀가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모르고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것을 모르고 저지를 여인이 아니다.

모두가 경악할 일로 판세를 바꾸는 것에 능했다.

헬리오 대공과의 일도, 처음 벨로나 공작령에 도착에서 했던 일도 그렇고 말이다.

남편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눈치가 참으로 빠르네.”

정말 아깝다는 말투였다.

마치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은데 실패한 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졌다.

그 말을 들은 벨로나 공작이 힐끔 아내를 째려봤다.

역시나 싶었다.

뭔가 수가 있어서 이런 일을 작정하고 벌인 것이다.

남편의 시선에 그녀가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뭐 어쩌라고 하는 눈빛은 덤이었다.

그는 머리에 힘줄이 생겼다.

“제발 한 번이라도 그녀의 입장을 들어봐 주십시오.”

벨로나 공작은 그는 허리를 숙이며 간언했다.

국왕이 왕국에서 가장 고귀하며 높은 존재임은 맞다.

그렇다고 해도 공작이 이렇게까지 숙이는데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작이란 왕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었고 그만한 재산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국왕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흥분으로 잃었던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그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감사합니다.”

국왕의 허락에 벨로나 공작이 허리를 펴며 안도했다.

적어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는 그리 믿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했는지 말하여라.”

“폐하, 아까도 말했듯이 저 간악한 여인을 죽이셔야 합니다.”

왜 이따위 행동을 하고 있는지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질문은 대답하지 않고 자기 의사만 밝히고 있었다.

국왕이 다시 열이 받으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나 뭔가가 있음을 느낀 것이다.

“내가 왜 이리 무례를 저질렀는지 물었다.”

“저야말로 폐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그녀의 죄를 알면서 어찌 외면하셨습니까?”

“내가 왜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지? 그녀는 메트레상티트르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도대체 메트레상티트르가 저지른 죄는 무엇이며 폐하가 외면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찌 빠져나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미친 것 같기도 하고요.”

“작정하고 알펜 왕국의 정식 귀족이 되어서 온 여자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들은 아주 작게, 아주 작게 귓속말을 했다.

국왕도 이 상황까지 오니까 어디 한 번 어떻게 지껄이나 들어나 보자라는 태도로 바뀌었다.

메트레상티트르를 아꼈다.

그 아낌이 권력과 상대에 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할 뿐이다.

“폐하, 그녀는 감히 왕비의 권위를 보여줄 수 있는 건국제에 참석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이런 선례는 없었습니다.”

“건국제에 메트레상티트르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역대 국왕들도 건국제에서 만큼은 왕비를 존중했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정부를 대동하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것을 꼬집은 것이다.

네가 선왕들의 전례를 무시하는 행동이 옳은 것이냐는 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리 행할 일도 아니지요. 역대 선왕들께서 행하셨던 일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

솔직히 이에 대해서는 국왕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메트레상티트르가 건국제 연회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정부가 건국제 연회에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메트레상티트르라고 해도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이에 대해 분노하며 메트레상티트르의 칭호를 빼앗아도 될 만큼이다.

“설마 폐하께서는 선왕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게다가 여기서 메트레상티트르의 참석을 허락하는 것은 역대 선왕들의 결정을 대놓고 반대하는 행동이었다.

국왕으로 선왕들의 결정을 저버리는 것은 그들의 결정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선왕들의 아들이자 손자이자 후손이다.

특히 현왕의 아버지인 선왕은 사생아인 그를 정식 왕족으로 입적하여 왕이 되도록 한 인물이다.

그런 선왕의 결정을 부정하는 짓은 결국 자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짓이었다.

“건국제 연회에는 부인과 참석하는 것이 관례이지요. 왕비의 권위를 인정하듯이 가문의 부인들이 가지는 권위도 인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대의 말이 옳다.”

“여기 귀족 중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있다면 귀족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도 못하는 쓰레기지요. 선왕들께서 지켰던 것조차 지키지 않는 것들이니까요.”

“흠흠…….”

일부 귀족들이 헛기침했다.

아내를 집에 두고는 정부를 아내인 것처럼 데려온 귀족들이었다.

대놓고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하고 민망했다.

“그것을 꾸짖지 않고 방관한 것들도 같은 족속이지요.”

“어흠…….”

나머지는 고개를 잠시 돌리며 괜히 허공을 바라봤다.

부인을 데려온 귀족들은 정부의 참석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 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건국제 연회의 분위기를 흐리게 만들 순 없었으니까.

지금 페루제 공작부인은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를 욕한 것이다.

그것에 분노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말에 틀린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귀족이라면 그것을 그녀의 말처럼 하는 것이 맞았다.

아니, 응당 귀족이라면 그리해야 했다.

그것이 귀족의 정석이다.

“그녀의 죄는 그것 말고도 있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다른 죄는 무엇인가?”

“그녀는 감히 왕비마마를 모욕했습니다. 이는 왕실을 모욕하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정부라고 해도 그것은 누구도 감싸줄 수 없는 대죄입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귀족모욕죄가 있듯이 왕족모욕죄도 있다.

당연히 귀족모욕죄보다 왕족모욕죄가 더 컸다.

왕비는 왕의 부인으로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모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왕비의 권위가 높다고 한들 왕보다 높을까.”

“물론입니다. 폐하보다 높은 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은 교과서적인 말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왕비가 그런 존재였다면 역대 선왕들의 정부들이 왕비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까.

국왕은 그것을 지적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역대 왕비들이 굴욕을 감내했던 것이지요.”

“굴욕이 아니라 왕비로 보여야 할 넓은 마음이야. 왕비라면 가져야 할 덕목이고.”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요.”

국왕이 개가 짖는 소리를 했다.

정부들에게 모욕당하고 참는 것이 어찌 왕비의 덕목이란 말인가!

의외인 것은 그 개소리를 그녀는 순순히 넘어간 것이다.

드디어 그녀가 국왕에게 밀리는가 싶었다.

다음 말을 꺼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폐하는 남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다르다고?”

국왕이 눈을 찌푸렸다.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대단히 자신의 심기를 나쁘게 만들 요량인 듯싶었다.

“네. 태생에 흠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행동으로 그 흠을 메울 생각을 하셔야지요. 어찌 이리 무도한 정부의 작태를 방관하십니까?”

“뭐라!”

왕의 정부가 낳은 사생아.

형님이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왕이 될 수 없었을 사생아.

악독하기로 소문난 왕의 정부가 어미였던 아들.

그리고 국왕의 어머니는 왕의 정부는 오직 귀족이어야 한다는 관례를 깬 평민 출신의 정부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의 태생적 한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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