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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0화 (120/221)

120화 메트레상티트르

시녀는 페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아까의 살벌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왕비마마의 사람이 아니면 비키렴. 나를 화나게 하지 말고.”

그녀가 시녀의 뺨을 부채로 툭툭 가볍게 쳤다.

시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치심이 일어났다.

누구도 자신을 이런 식으로 하찮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특히 시녀가 모시는 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제가 모시는 분이 어느 분인지 아시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누구인데? 국왕폐하? 아니면 왕비마마?”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시녀는 상대가 자신이 모시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면서 이러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 따위와 이야기하느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구나. 비켜.”

시시해졌는지 시녀를 밀쳐버렸다.

그러자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다른 시녀가 그녀 앞을 막았다.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이 자신을 막는 시녀를 바라봤다.

“너는 누구니?”

“저는 왕비마마의 시녀입니다.”

“그래. 그러면 왕비마마를 뵙기를 청할 수 있을까?”

아까와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말투는 하대였다.

그렇지만 왕비의 시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미소가 달랐다.

하찮게 여기지 않았으며 존중해 주고 있었다.

“그, 그것이…….”

왕비의 시녀가 난감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곳으로 억. 지. 로 들어갈 명분으로는 말이다.

“왕비마마께서 고초를 겪고 계신가 보구나. 들어가겠다.”

“?!”

그녀가 자기 앞을 가로막은 시녀를 지나쳐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2명의 여인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대화는 잘 들렸다.

“그대는 정녕 위아래도 없는가?!”

“위아래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건국제는 왕실의 중요 행사야. 왕비가 직접 주관하고 주도하는 행사란 말일세.”

“폐하가 계신 곳에 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부들은 건국제 연회에 불참하는 것이 관례야. 역대 어느 정부도 그대처럼 이러지 않았어.”

한 명은 왕비였고 다른 한 명은 국왕의 정부였다.

왕비는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며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노에 떨리는 주먹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솔직히 정부는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아무리 역대 국왕의 정부들이 왕비 알기를 우습게 안다고 해도 이것은 선을 넘었다.

왕조차도 건국제에서는 왕비의 권위를 존중해 준다.

지금 그녀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왕비에게 남은 일말의 권위를 완전히 실추시키겠다는 의도가 확실하다.

국왕의 정부는 우월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왕비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 진심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안녕하세요?”

“아악!”

갑작스러운 난입이었다.

국왕의 정부는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목이 뒤로 꺾였다.

이 휴게실에 있는 사람은 셋.

왕비, 국왕의 정부 그리고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당연히 정부의 머리채를 잡은 인물은 페루제 공작부인이리라.

“너, 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네. 알죠. 메트레상티트르가 아닙니까?”

지금 왕비와 있는 정부는 일반적인 정부와 달랐다.

메트레상티트르.

국왕의 공식 정부로 왕가의 사람이 아님에도 궁 안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였다.

국왕의 많은 여인 중에서 오직 1명만 메트레상티트르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정식 부인은 아니었기에 왕의 총애가 사라지면 메트레상티트르 칭호도 반환하고 궁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되면 다른 여인이 그 칭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칭호를 달고 있는 순간만큼은 국왕의 여인으로 온갖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왕비를 모욕하는 일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런다고?! 너 누구야! 당장 말해!”

“어머, 뭘 그리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요.”

메트레상티트르는 운이 없었다.

불운하게도 그녀는 연회장에서 국왕과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와 있었던 일을 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연회장에서 건국제를 주도하던 모습을 봤다면 지금 같이 발악하지 못했다.

“놔! 놓으라니까!”

“왕비마마, 괜찮으십니까?”

“어? 아! 괜찮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왕비의 안위를 물었다.

오직 왕비와 둘만 있는 것처럼 굴었다.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당장 폐하께 말씀을 드릴 것이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대는 괜찮겠나?”

메트레상티트르가 악을 쓰든 말든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왕비는 상급 신관들의 검사가 끝난 후의 연회장 분위기를 보지 못했다.

메트레상티트르가 연회장에 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막기 위해 자리를 비웠으니까.

왕비의 권위를 보여줄 수 있는 행사를 한낱 정부 따위가 더럽히게 둘 수 없었다.

물론 국왕과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 백작 간의 기 싸움만 봐도 일반인은 아니었다.

자신을 도와준 상대가 아무리 보통 인물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큰일이다.

국왕의 정부 그것도 메트레상티트르는 건드는 것은 그 정부의 뒷배가 되어 주는 국왕을 건드는 짓이었다.

“폐하께 네가 후회하도록 큰 벌을 내려달라고 할 것이야!”

악을 쓰는 여인이 계속 국왕을 언급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왕비는 그녀가 자신을 구해주고 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위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니 너무 불합리했다.

왕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달싹거렸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아무리 메트레상티트르라고 할지라도 잘못을 하면 벌을 받아야지요.”

국왕과 척을 진 상태였다.

오늘 연회에서 가감 없이 그것을 보여줬다.

그런 상태에서 국왕이 그녀와 왕비의 편을 들 리가 없었다.

메트레상티트르를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표정이 너무 당당해서, 너무 빛나서 왕비는 자신도 모르게 물어보게 되었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왕비마마의 선택에 달린 일입니다.”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연회장으로 돌아가 볼까요?”

“뭐?”

그녀가 우아하게 말했다.

그녀가 아름다운 손짓으로 문을 열고 휴게실을 나왔다.

휴게실을 지나다가 그 모습을 본 이들이 경악했다.

“아아아악!”

“헉!”

그녀는 메트레상티트르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넘어진 정부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넘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부인 괜찮으십니까?”

짝!

정부의 시녀가 추하게 끌리고 있는 자신의 주인을 구하려고 했다.

시도조차 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뺨을 맞았다.

당연하게도 그 뺨을 붉게 만든 인물은 페루제 메디치 백작이었다.

“건방진 것! 지금 감히 누구 앞을 막는 것이냐?”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시녀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페루제 메디치 백작을 마주보게 되었다.

다리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마 일어나서 그녀 앞을 가로막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살기였다.

“왕비마마, 이제 연회장으로 가시지요.”

“그, 그러세.”

“오늘이 지나고 많은 것이 바뀔 것입니다. 심려 마십시오.”

궁정의 병사들, 기사들이 그 모습을 봤다.

모두가 끌려가는 메트레상티트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지? 구해야 하나?”

“지금 구했다가는 벌을 받는 것은 우리야.”

“어서 폐하께 알려야겠어.”

“얼른 가 봐.”

그것은 그녀 옆에 있는 왕비 때문이었다.

왕비의 권위가 떨어졌어도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승인 아래에 일어나는 일을 막을 권리는 없었다.

왕비를 막을 권리는 오직 왕이 가지고 있었다.

왕이 미리 정부를 위해 명령을 내린 것이 있다면 모를까.

슬프게도 왕은 이런 상황에 관해서 따로 명령을 내린 것이 없었다.

그들은 급하게 달려가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연회장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까.

저항하는 메트레상티트르의 머리채를 잡으며 끌고 가고 있었다.

연회장 문을 지키던 시종이 그 모습에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신지요?”

“문 열어.”

시종이 말을 떨며 물었으나 무시당했다.

시답지 않은 것으로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열라니까.”

“그대는 무엇을 하는가? 지금 부인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가?”

계속 문을 열지 않는 시종에게 왕비까지 나서서 명령을 내렸다.

“어서 문을 열게.”

“알겠습니다.”

시종에게는 막을 이유도 명분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여기서 시간을 끌다가는 어딘가 끌려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연회장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본 광경에 놀라서 와인 잔을 떨어뜨렸다.

어떤 이는 너무 충격적이라서 마시던 음료를 뱉어 버렸다.

“내가 본 것이 맞는 것인가?”

“눈을 비벼 봐도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바뀌지 않네. 꿈은 아니야.”

그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했다.

어느 누가 감히 국왕의 정부를 거지를 끌고 가듯이 대한단 말인가.

그것은 국왕의 권위를 짓밟는 행위였다.

게다가 현 국왕은 역대 국왕 중 가장 왕권을 강화한 왕이었다.

“그대! 이게 무슨 짓인가!”

요즘 국왕이 가장 총애하고 아낀다는 정부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진 상태였고 화장은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드레스는 바닥에 쓸려서 더러워졌다.

진짜 거지라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자신의 메트레상티트르가 건국제 연회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 악독한 여인과 만나서 험악한 꼴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왕비가 왜 저들과 같이 있는지였다.

“폐하, 폐하, 구해 주세요!”

왕의 불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녀를 끌고 연회장에 들어왔다.

왕을 올려다보기 편한 자리에 서고는 드디어 손을 놨다.

“악!”

그리고는 쓰러진 메트레상티트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구두로 그녀의 머리를 밟았다.

뒤가 뾰족하게 세워진 특이한 구두는 쓰러진 여인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국왕이 일어서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계단으로 내려가서 눈앞의 악녀를 밀치고 싶었다.

“당장 그 발을 내려놓아라! 그 여인이 누군지 알고 이렇게 패악을 떠는 것이냐!”

“폐하, 패악질이라니요.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그녀가 밉살맞게 웃었다.

비아냥거린다는 생각이 드는 말투였다.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살아 있는 인형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저는 감히 폐하께 요청합니다.”

“뭐? 요청?”

감정이 없는 표정은 소름이 돋게 했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상대하는 공포가 느껴진 것이다.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쓰다듬었다.

연회장은 숨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네. 메디치 루비로즈 백작으로 청합니다. 당장 제 밑의 여인을 죽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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