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메시지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 백작이 비웃음을 은근히 드러내며 말했다.
“폐하, 이제 건국제에 참석해야 할 인물들은 다 모인 것 같습니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시지요.”
“그러지. 연회를 시작하지!”
국왕은 그녀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거절한다는 것은 건국제 연회를 취소하겠다는 의미였다.
연회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대답이었으니까.
건국제는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중요 행사이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손을 들고 박수쳤다.
그 소리가 워낙 커서 연회장을 울렸다.
“악사들은 뭐하는가? 돌아왔으면 재깍재깍 연주해야지.”
“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악사들은 놀라며 얼른 각자의 악기를 연주했다.
그녀가 뿜어내는 기세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자신들도 모르게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보니까 말이다.
건국제는 왕실이 주관하는 행사.
이런 것도 국왕이나 왕비 혹은 다른 왕족들이 하는 것이 맞았다.
그녀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이 건국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분위기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음에도 부족했다.
“보내야 할 사람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니까 연회가 깨끗해졌군요. 즐길 맛이 납니다.”
그녀는 자기 할 말을 하고 몸을 돌렸다.
국왕과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이따가 일어날 일을 처리하려면 바빠질 것이다.
그러니 잠시의 휴식을 누리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그녀를 주시하며 이야기했다.
“소문보다 더한 여인 같은데요.”
“그러게요. 저희 폐하도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것을 누르는 사람은 처음 봐요.”
국왕은 무능하지 않다.
역대 국왕 중 가장 왕권을 강화하고 있는 왕이었다.
“벨로나 공작도 맞먹는다고 하더니…….”
“벨로나 공작이랑 맞먹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들은 소문이란 응당 과장이 섞인 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깨달았다.
소문이 진실보다 못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연회장에 등장하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가 라스타 왕국에서 국왕과 동등한 자리에 앉을 권리를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좋은, 능력이 있는 몇몇은 눈치를 챘다.
“이거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었겠지요.”
“그렇겠지. 시종일관 모두의 중심에 있었으니까.”
단 한 번의 등장.
그것은 그녀를 처음 본 귀족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녀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나는 국왕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다.
나는 너희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다.
너희가 먼저 자신의 아랫사람이 되기를 청하라.
“이번 일로 세력의 판도가 바뀔 수 있겠어.”
“지금 건국제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잖아. 그것도 국왕이 반대할 수 없는 명분을 들이밀면서 말이야.”
그녀는 자기 세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 보여줬을 뿐이다.
귀족들에게도 뻣뻣한 신관들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권력을 보게 해줬다.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유연함과 그것을 이룰 능력을 보게 해줬다.
국왕조차도 자신을 막지 못함을 확실하게 보게 해줬다.
이번 건국제는 왕실과 왕국이 아닌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의 건국제다.
“이제 춤을 춥시다. 어찌되었든 건국제 연회 아닙니까?”
“솔직히 추기도 싫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누군가는 자신의 친구가, 누군가는 자신의 동생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니까요.”
귀족들의 혼인은 정략 혼인이다.
목적과 이득을 위한 혼인으로 귀족들끼리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곳 연회장에서 누군가의 부인은 어느 가주의 동생이나 누나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은 어느 가주의 조카일 수 있었다.
자신들의 형제, 친인척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특히 서로 친했다면 더욱 말이다.
역대 가장 우중충한 건국제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거짓 웃음과 거짓 즐거움으로 가득한 연회장은 음울함이 퍼져 있었다.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슬픔은 분위기를 처지게 만들었다.
여기서 제일 건국제를 즐기고 있는 인물은…….
“어머, 음악이 좋네요. 꼭 춤을 춰야 연회를 즐기는 것은 아니죠.”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 백작인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와인 잔을 들며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지루할 틈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메디치 백작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너무 띄워 주시는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도에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미리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쉬려고 저택에 머무는 것을 이해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알아서 귀족들이 다가왔다.
그동안 그들은 그녀를 여인이라고 무시했었고,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또한 그들은 라스타 왕국 출신이라는 경계하며 만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무너졌다.
그녀는 여인이라고 무시할 인물도, 라스타 왕국 출신이라고 무조건 견제할 인물도 아니었다.
적이 되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였다.
그렇다면 친분을 쌓아 두는 것이 좋았다.
“건국제가 끝나면 저희 저택으로 초대를 하고 싶습니다.”
“티 파티 모임이 있는데 제발 와 주십시오.”
물론 모두가 이렇게 나온 것은 아니다.
“그녀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어요.”
“맞아요. 전염병이 어떻게 감염이 되는지도 신전에서 알아내고 그녀는 그것을 말했을 뿐이잖아요.”
“신관들이 이곳에 온 것은 단지 교황폐하와 친하기 때문이죠. 교황폐하와 친분이 두텁다고 하니까요.”
라보 공작부인처럼 눈앞에서 본 것을 그대로 믿지 않는 인물들도 있었다.
라보 공작가문을 따르는 친왕파 귀족들이 그러했다.
벨로나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미리 들었기에 보여진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직은 우리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 능력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꼭두각시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
그녀의 역량과 자질을 의심하고 자신의 손익을 계산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은 중도파의 인물들이었다.
“저는 피곤하니 잠시 휴게실에 가서 쉬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북부의 부인들이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은 바빴다.
그녀의 총애를, 그녀가 주는 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우월감, 희열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싫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제발 저희가…….”
“내가 괜찮다고 한 것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언짢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에 부인들이 허리까지 숙이며 사죄를 했다.
그 모습은 기괴했다.
이곳에 있다는 것은 건국제에 초대될 만한 가문 소속이라는 의미다.
어디에 가서도 꿀릴 것이 없는 가문의 여인들은 지금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기고 있었다.
허리를 너무 굽혀서 머리가 땅에 닿을 기세였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내 뜻을 거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물론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예! 믿어 주십시오.”
공작 가문이 높아도 예의를 지키고 존중해 줘야 하는 가문의 부인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거침없이 그들을 아랫사람으로 취급했다.
“좋아. 그대들의 말을 믿어 보지.”
“감사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모욕당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용서해 줬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해 하고 있었다.
북부를 제외한 지역의 귀족들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북부 사교계에서 어떤 존재이길래 저리도 굽신거리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 * *
그녀는 당당하게 말하고는 휴게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연회장에서 사라지자 북부의 부인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게. 심기가 많이 불편해하지 않으셔서 안심했어.”
“이번에 정부 때리기는 저희 차례인데 모임에서 제외되는 줄 알았다니까.”
“그 기회를 놓치게 되었으면 저는 화가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에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귀족들은 눈이 커졌다.
‘정부 때리기’라니?
이 말을 듣던 귀족가문의 안주인들과 가주들의 반응은 상이했다.
‘정부 때리기? 듣기만 했는데 속이 시원해지는 말이네.’
‘실제로 한 번 해봤으면 좋겠네.’
‘정말 가능하다면 발이라고 핥을 것인데.’
정부들로 인해 열 받는 일을 경험하는 부인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북부에서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니, 가주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찌 가주가 아끼는 정부를 때린단 말인가.’
‘정말 상종 못할 여인이야. 괜히 친해졌다가 물들면 어쩐단 말인가.’
‘역시 단호하게 경고를 해야겠어. 저 여인과 만나지 말라고.’
정부를 예뻐하고, 정부와 놀기를 즐기는 사내일수록 ‘정부 때리기’는 마음에 들지 않은 말이었다.
* * *
그들이 여러 생각에 빠지거나 말거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바빴다.
아직 건국제의 하이라이트를 하지 못했으니까.
이를 위한 배우들을 찾아야 했다.
자신이 선택한 배우들을 찾아야 모두에게 강한 충격과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이미 귀족들에게 강한 충격과 인상을 남겼으나 그것으로 부족했다.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했다.
아니면 제대로 된 두, 세 방 정도?
굳이 표현하자면 국왕이 화가 나서 쓰러질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대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녀는 곧 일어날 즐거움에 작게 홀로 노래까지 불렀다.
그것은 그녀가 본 연극의 노래 가사를 바꾼 노래였다.
“나는 지금 그대가 필요해요~”
발걸음도 노래에 어울리게 경쾌했다.
“그대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대가 있어야 즐거워질 수 있어요. 제발 내 앞에, 내 눈에 나타나 모습을 보여줘요.~”
그녀는 어떤 휴게실을 보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두 시녀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두 시녀를 밟고 저 휴게실로 들어가야겠지.
저 안에 있는 사람들로 인해 곧 왕의 권위와 자존심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아!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의도였으니까.
“드디어 곧 그대를 만날 수 있겠군요~”
그녀는 노래를 끝마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휴게실 문 앞에 섰다.
시녀들이 그녀의 출입을 막으려고 하다가 잠시 움찔거렸다.
연회장에서 얼마나 인상이 깊었는지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했다.
곧 한 시녀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여기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막는 것이니?”
“벨로나 공작부인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면서 막았다고?”
그녀가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눈을 빛냈다.
“왕비마마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지. 네가 왕비마마의 사람이라도 되니?”
그 흉흉한 눈빛에 그녀를 막은 시녀는 몸이 굳는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