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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17화 (117/221)

117화 진실이라 믿는 전제

그것은 몇 해 전의 일이다.

정체를 모를 전염병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민심을 살피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왕국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그녀는 왕궁으로 의사들을 불렀다.

그들이 알현실에 들어오자 라스타 국왕 옆에 앉아서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병의 전염 경로는 어찌되는가? 전염 경로라도 알아야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을 것이 아닌가.”

의사들은 말했다.

“전염병은 공기를 통해서 사람에게 옮기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전염병이?”

“네. 그러하옵니다.”

과연 그들의 말은 진실인가?

그녀는 궁금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병들이 얼마나 많은데 전염 경로는 공기라고? 무조건?

그들은 전염병의 경로에 관해 조사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사조차 하지 않고 자신에게 답을 주고 있었다.

감히 라스타 왕국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이때에 저리 오만하게 말이다.

정말로 그들의 말이 진실이기에 그러는 것인가?

의술에 관해 모른다고 의사들이 나를 기만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무능한 것인가?

궁금하면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 말에는 거짓이 하나도 없는 것인가?”

“물론입니다!”

“그러면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의사들은 자신들이 말을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하는 것이 웃겼다.

정말로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목숨을 걸어도 괜찮을 것이다.

“예?”

“내가 공기 말고 다른 경로로 병이 전염될 수 있음을 증명하면 너희는 죽는 거야. 어때? 그 정도의 확신은 있어야 나도 그것을 진실로 믿을 수 있지 않겠어?”

“물론, 물론입니다.”

그들은 손을 떨었다.

그들도 알았다.

그녀라면 정말 자신들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 믿었던 진실이 거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의사들은 괜찮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왕궁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그녀가 명령을 내렸다.

“날짜가 정해진 사형수들을 비밀리에 데려와라.”

“죽은 사람들이어야 하니 사형 날짜가 지난 후에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렴.”

그녀의 수하가 알현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스타 국왕이 힐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가 시간 낭비를 한다고 여겼다.

“의사들이 저리 확고하게 말하는데 진실이 아니겠소?”

“그들의 말이 무조건 옳을 것이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녀의 시선이 국왕에게 향했다.

서늘한 것을 넘어서 차가웠다.

폐까지 차가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두 손을 휘적거리며 급하게 말했다.

“아, 아닐세. 어찌 내가 그대의 생각에 반할 수 있겠는가! 오해일세!”

“폐하…….”

“진짜일세! 진짜야!”

잠시 정신이 가출했던 모양이다.

국왕 자신과 아내, 아이들의 목숨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국왕은 자책했다.

전염병 문제로 예민한 그녀를 자극하고 말았다.

그녀가 패닉에 빠진 국왕의 양어깨를 잡았다.

“폐하, 진정하시지요. 남들이 보면 제가 폐하를 죽이는 줄 알겠습니다.”

“그, 그럴 리가 있겠는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음을 느꼈다.

국왕은 왕국에서 가장 높은 존재다.

그런 존재가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하극상으로 인한 두려움 혹은 하극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누구보다 라스타 왕국에 충성을 다한 루비로즈 가문에 그런 오해를 추문이었다.

특히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짜증이 난다.

‘그런 취급’이란 언제든 왕을 죽이고 왕국을 좌지우지할 악인 취급이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루비로즈 가문의 부흥과 왕국을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단지 왕국보다 가문을 드높이는 것이 먼저였다.

“만약에 누가 그런 말을 하면 내 친히 그 상대에게 벌을 내릴 것이야.”

“이리 저를 믿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국왕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양쪽 어깨를 잡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어깨와 떨어졌다.

시체 같던 손이 주던 오싹함이 사라졌다.

안심이 되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전염병은 공기를 통해서 들어온다. 일반적인 백성들이 가진 생각이며 의사가 말하는 사실이죠. 그런데 이것을 보시지요.”

“이것은 무엇인가?”

“한 번 읽어 보시지요.”

라스타 국왕은 눈치를 보며 보고서를 읽어 봤다.

그 전염병으로 인한 (추정)사망자에 관한 보고서였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이 안의 무엇이 그녀를 거슬리게 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폐하도 보셔서 알겠지만…….”

“그렇지.”

아는 것은 전혀 없었으나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이 사망자에 아이가 유독 적습니다. 공기를 통해서 전염이 된다면 응당 사망자 중에서도 아이의 비중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합니다.”

그 말에 왕이 다시 보고서를 펼쳤다.

확실히 그러했다.

아이의 비중이 너무 컸다.

그리고 그 중에 그 전염병으로 죽은 신생아는 전혀 없었다.

전염병을 이기기에는 아기들은 너무 약했다.

“전염병에 걸린 부모와 함께 몇 달을 있던 아이들은 건강했다는 내용도 있죠.”

“흠흠…….”

라스타 국왕은 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빠르게 읽느라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 민망함에 헛기침이 나왔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국왕의 헛기침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사례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렇군. 기존에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맞습니다.”

전염병은 무조건 공기를 통해서 옮겨진다는 전제.

그 전체 자체가 틀린 것일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지금 전염병의 확산이 공기가 아니라면 지금 왕실은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꼴이었으니까.

국왕은 생각했다.

‘그러면 아까 의사들이 왔을 때, 이 보고서를 보여줬으면 될 일이 아닌가?’

“제 물음에 그들은 자신의 가능성에 의문조차 품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작자들입니다. 말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자네 말이 맞아.”

라스타 국왕은 손이 떨리려는 것을 참았다.

그녀가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 * *

얼마 후 그녀는 어떤 곳을 방문했다.

“어떤가?”

“확인이 되었나?”

거기에는 마법사 의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혹시 모를 전염을 대비하여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감옥으로 추정되는 방들에 시선을 줬다.

또각또각.

규칙적인 걸음걸이가 느껴지는 소리가 복도에서 울렸다.

그 마법사들의 대표로 보이는 자가 그녀 옆을 맞춰서 걸었다.

“먼저 첫 번째 방입니다. 건강한 사형수와 그 병에 걸린 사형수를 같은 방에 뒀습니다.”

“그런데?”

“밀폐된 공간에 같이 있었음에도 전혀 병이 전염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특별한 경우일 수 있지 않은가?”

“저희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방에도 같은 시도를 했습니다.”

“결과가 같았다?”

“네. 전염되지 않았습니다.”

“공기 중에 전염되는 병은 아닌 것이로군.”

“확실합니다.”

공기가 아니었다.

공기 중으로 병이 퍼진다는 전제로 집까지 태우는 사례들이 있었다.

괜한 짓이었다.

어떤 영지에서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산채로 집과 함께 태워졌다고 한다.

혁명을 통해 귀족이 된 영주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백성을 위해 혁명을 했다면서 백성을 태우는데 거리낌이 없다니 웃겼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질 영주들이 한둘이 아닐 것인데 참 난감하군.”

“그것은 그들의 업보이니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시지요.”

“그대 말이 맞아. 그들은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할 뿐이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를 구할 방도를 최대한 찾아보고 안 될 경우에 해야 할 최후의 방법이다.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평민에서 귀족이 된 그들보다 자신이 그것을 안다는 현실이 희극처럼 느껴졌다.

“그래. 공기 중에 전염되는 병이 아님은 알았고. 그러면 감염 경로는?”

“저희는 전염병 환자들과 관련된 보고서를 확인하던 중 흥미로운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어떤 환자였지?”

“환자는 남성으로, 윤락가를 매일 같이 오는데 원하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데?”

“그 조건은 바로 처녀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더럽게 몸을 굴린 것은 자신이면서 상대는 처음이기를 원하다니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그는 자신이 관계를 맺은 여인들에 관해서 일지를 적어 놨는데요.”

“일지까지 적어 놔? 대단한 정성이군.”

듣고 있자니 한숨까지 나왔다.

신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변태들을 탄생시키셨는지 모를 일이다.

신께서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낱 인간이 그 뜻을 알 수 없으니 안타깝다.

“운이 좋게도 그 일지의 인물들도 그 전염병으로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는 성적 관계가 전염 경로라고 말하는 건가?”

“네.”

“다른 원인일 수 있어.”

전염병이 다른 경로로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음식, 물 등 다양한 것으로 전염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일지만 보고 무작정 원인을 판단하기는 부족했다.

“그러기 어려운 것이 그는 뒷골목 포주로 자신이 관계 맺은 아이들은 반 년 정도 자신하고만 자도록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확인을 해 본 것인가?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는 여기서 증명이 되어야 해.”

“물론입니다.”

마법사들은 그 일지와 그 일지의 인물들을 조사하여 ‘성적 관계로 병이 옮을 수 있다’는 전제를 세웠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처럼 확실하게 증명을 해야 하니까.

“마침 공기가 아닌 다른 경로로 병이 전염된다는 것 증명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 같은 방에 있던 사형수들끼리 눈이 맞아서 관계를 맺었나 보지.”

그녀가 웃으면서 농담했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그녀가 그런 그들을 뒤돌아봤다.

“역시 메디치 루비로즈 백작각하시군요. 백작각하의 혜안은 언제나 저를 놀랍게 합니다.”

마법사 대표로 그녀에게 말을 걸던 이가 박수를 쳤다.

비아냥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정말로 감탄했다.

“남자 사형수와 여자 사형수를 한 방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외로웠는지 알아서들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 명은 그 병에 걸려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아니었죠.”

“건강하던 한 명도 병에 걸렸나 보군.”

“네. 여기 보고서에 그 조사 과정과 결과를 상세하게 적어 놨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 결과를 토대로 다시 전염병 관련 대책을 세워야겠군. 고생들 했네.”

“아닙니다. 백작각하의 은덕에 이렇게 생체실험을 할 사형수들도 제공받고 저희야말로 감사하죠.”

“저 죄인들의 고통으로 백성들이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녀는 미소를 짓고는 실험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 죄수들의 죄명은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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