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대의가 불러온 불신
왕은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을 내려다봤다.
“정숙은 던져 버려두고?”
“가슴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팔과 어깨를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천박하게 구는 것이지.”
“폐하. 정숙. 정숙. 그리 애타게 정숙을 찾다가 큰일 납니다.”
왕의 비아냥을 비웃음으로 응대했다.
소드마스터 남편에게도 자기 할 말 다하는 성격이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병자와 건강한 자를 분리해 놓는 일이지.”
“맞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활짝 웃었다.
반면에 왕은 아차! 싶었다.
그는 썩은 얼굴로 생각했다.
당했다.
그 당당한 표정에 한 방 먹여 주고 싶다는 생각에 성급하게 나섰다.
그녀의 말에는 틀린 말이 없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얄미워 보이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녀와 대화하는 상대만 느낄 뿐이다.
“이렇게 드러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병의 유무를 확인할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군. 그대의 말이 맞지.”
“그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그대처럼 이리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요즘 그 정체모를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그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자들이 분리되지 않았다.
같이 있다가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픈 자로 인해 병이 퍼지고 있었다.
당장 격리를 해야 하는데 모두가 숨기기 급급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건강에 자신이 있다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권장하여 병든 자를 격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요즘 가발을 쓰는 이들도 늘어났지요?”
“그런 건 왜 물어보지?”
왕이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듣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너무 궁금했다.
“그 병의 증상 중 하나가 머리가 빠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귀족들이 가발을 쓴 귀족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들에게서 멀어진 이들은 속삭였다.
“저기 저분이요. 머리카락이 자기 자랑이라고 하셨던 분이 언제부터인가 가발을 쓰셨네요.”
“맞아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어울리지도 않는 가발로 머리를 감추려고 하잖아요.”
“가발 벗겨지려고 하면 화내고요.”
가발을 쓴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건 단지 패션을 위해서 쓴 것에 불과합니다.”
“맞습니다. 요즘 가발을 쓰는 것이 유행이 아닙니까!”
“저희는 유행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왕은 차갑게 그들을 내려다봤다.
“억울하다?”
“네! 억울합니다.”
그 모습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박수를 쳤다.
“그리 억울하면 팔을 보여주시면 되겠네요. 팔이 깨끗하면 그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니까요.”
“그러면 되겠군.”
왕이 그 말에 호응했다.
가발을 쓴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눴다.
“저는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가위를 가져오시게 일부를 잘라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거짓이 없거늘. 감출 이유도 없습니다.”
당당한 자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을 바로 따르려고 했다.
사내들은 당장 팔부분의 천을 올려서 사람들에게 보였다.
여인들은 딱 맞는 드레스를 입었기에 가위로 잘라 내겠다고 하였다.
“그, 그게…….”
“여인의 정숙은 미덕이자 의무이거늘 어찌 그것을 드러내라고 하십니까? 그리할 수 없습니다.”
감추기를 원하는 자들은 태도에서 드러냈다.
어떤 이들은 말을 더듬었다.
‘정숙’을 명분으로 거부하려고 했다.
그리고 일을 이 지경까지 키운 페루제 공작부인을 비난했다.
“저 천박한 여인이 자신의 천박함을 감추기 위해 하는 짓거리에 어찌 동조하십니까?!”
“맞습니다! 정숙함이 어찌 천박함보다 우위를 점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는 저 여인을 혼내야 합니다.”
그들은 손가락질하며 그녀를 향해 원망을 쏟아냈다.
평소와 같이 지나갈 것이라 믿었던 하루가 여인 하나로 인해 망가졌으니까.
왕이 고민하는 듯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미 결정은 내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그들 중 누구도 함부로 여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발을 벗기를 거부하고 팔을 드러내기 거부한 자들을 휴게실에서 확인하고 증세가 확인될 시에 즉시 각 가문에서는 그들을 격리하라.”
“네!”
병사들이 몸을 감추려던 귀족들을 끌고 갔다.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감히 끌고 가는 것이냐!”
“폐하! 저희 가문이 폐하께 바친 충정을 잊으신 것입니까!
끌려가는 귀족들은 발악하며 거부했다.
전염병에 걸린 가주와 안주인이라니!
더는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할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아무리 저항을 해도 병사들의 힘을 이길 리가 없었다.
그 모습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 전염병이 걸린 것이 확인되면 어찌되는 것이지요?”
“설마! 저희에게도 옮은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지요!”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당장이라도 신관에게 가고 싶었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받고 싶었다.
귀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다시 큰 박수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이런 일에 저희 폐하께서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뭐?”
왕이 황당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왕궁 밖에 신관들이 여러분들의 검사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상급 신관들이요. 폐하, 그렇지요?”
“그래. 그러니 그대들은 안심하게.”
팔과 어깨가 드러난 파격적인 드레스를 선보인 것도, 그 정체 모를 전염병을 언급한 것도 전부 이것 때문이었을까?
건국제의 주도권이 한순간에 왕에게서 페루제 공작부인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왕이 적극적으로 그녀의 의견을 들어줬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대의가 우선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뿐이랴?
그녀와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로써 왕궁에 전염병의 위험을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신관들이 왕궁밖에 있다는 말.
마치 왕과 그녀가 합의한 사항처럼 오해하기 쉽게 했다.
실제로 왕은 상급 신관들이 왕궁 밖에서 대기 중인 것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왕의 출입 승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다.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의 계획 아래에서 이뤄진 일이다.
거기에 왕의 결정은 없었다.
여기서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을 하기에는 모두의 시선이 왕에게 쏠려 있었다.
자신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왕은 상황에 휘둘려 버린 것이다.
이 상황을 아는 것은 국왕과 벨로나 공작 그리고 일부의 귀족들이었다.
무지한 다른 이들은 이것을 칭찬하기 바빴다.
“이리 폐하께서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시다니 감복할 따름입니다.”
“왕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이런 간단한 방법을 생각하셨는지 그 혜안에 감동하는 중입니다.”
“맞사옵니다. 팔과 어깨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니요!”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혜택만 받아먹는 것은 쉬웠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부는 서로 작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일부는 친왕파 소속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최대한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대는 이 상황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는가?”
“나는 전혀 없었네.”
“친왕파의 누구도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말을 듣지 못한 듯하더군.”
이번 일은 누가 봐도 국왕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합작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에 관해 친왕파 누구도 언질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
“라보 공작각하마저도?”
“그러네. 지금 티를 내지 않지만 동요를 완전히 감추지 못하셨어.”
친왕파의 두 기둥이라고 하는 라보 공작조차 이번 일에 관해서 전혀 듣지 못했다.
말 한마디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국왕과 페루제 공작부인이 함께 꾸민 일이 아니니까.
라보 공작은 수치심에 떨리는 손을 억지로 참았다.
불과 며칠 전에 중재하는 척하면서 이런 일을 꾸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폐하께서 우리와 상의도 없이 홀로 일을 벌이셨단 말인가?”
“페루제 메디치 백작과 단둘이서 벌인 일이겠지.”
“셋일 수도 있어. 벨로나 공작과 메디치 백작은 부부니까.”
친왕파 일부는 그들은 국왕이 자신들을 배제하고 친왕파를 개편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의 구도를 바꾸려는 짓이라고 말이다.
그동안 친왕파를 위해 헌신한 자신들을 버리려고 한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 한 귀족이 입을 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미 대법관 선정에 손을 댄 적이 있어요. 그로 인해 우리 측이 아닌 중도파 소속의 인물이 대법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속임수일 수 있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중도파를 미리 친왕파로 매수했을 수 있어요.”
합당한 의문에 개소리로 답했다.
사람이 한번 불신이 심어지니까 이성도 마비된 모양이다.
중도파가 바보도 아니고 친왕파로 매수될 사람을 대법관으로 추천했겠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그렇지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다수가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합리적인 의문을 품었던 귀족도
“그렇군요.”
“그런 가능성조차 놓지 않고 생각해야 궁정에서 버텨 낼 수 있는 것이지.”
“조언 감사드립니다.”
멍청한 다수와 뜻을 함께하게 되었다.
이렇게 친왕파 내부에서는 왕에 관한 불신이 심어지게 되었다.
특히 라보 공작은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모욕을 주다니 이번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를 갈며 혼잣말했다.
그들이 그러는 사이에 상급 신관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순백의 옷을 입고 등장한 그들은 경건한 신관 그 자체처럼 보였다.
“저희가 검사 준비를 끝마치면 작위 순으로 호명하겠습니다.”
“호명되시면 안내에 따라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신관들은 자기 말을 끝내고 그들이 신성력으로 검사할 장소로 갔다.
아마 빈 휴게실을 이용했다.
“공작가문 내외 분들부터 와 주십시오. 남녀 따로 진행하겠습니다.”
대신관의 말에 따라서 페루제 공작부인과 벨로나 공작도 각자 다른 곳으로 향했다.
검사실이 된 휴게실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를 보고 신관이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성모님께 인사드립니다.”
“신의 자제께 인사합니다. 일어나세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상급 신관이 일어났다,
“성모님 덕분에 병이 전염되는 경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전부 내 사람들이 한 것이지요.”
“아닙니다. 이제 어떻게 병이 퍼지는지 알았으니 더한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군요.”
과연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전염병의 전염 경로를 어떻게 알아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