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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13화 (113/221)

113화 사과하는 척 상대를 엿을 먹이는 경우

국왕이 언짢은 기분을 참았다.

이리 준비할 만큼 왕실과 대립하겠다는 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페루제 공작부인이 엿먹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해도 미워 보일 것이다.

“그래. 반갑구나. 자식 교육을 아주 똑 부러지게 했군.”

“과한 칭찬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벨로나 공작부부가 겸손을 떠는데 란델리노는 달랐다.

왕이 잠깐 차갑게 란델리노를 바라봤다.

참으로 맹랑했다.

여기서 어찌 왕이 자신은 너에게 기대를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것도 친왕파인 벨로나 공작가문의 유일한 아들에게 말이다.

왕이 해야 할 말은 정해진 것과 같았다.

“그래. 왕국을 지탱할 인재로 자라다오.”

“노력하여 반드시 그리되겠습니다.”

란델리노는 왕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국왕과 대립하려는 인물이다.

친왕파인 아버지와 척을 지고 있는 것만 봐도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란델리노도 성인이 된다면 페루제 공작부인처럼 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리라.

자신을 밀어내고 다른 아이가 벨로나 공작가문을 잇기를 원할 수 있었다.

“…….”

“…….”

벨로나 공작일가는 앉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할 말이 없는데 서로 마주보려니 곤욕도 이런 곤욕이 없었다.

그 불편한 시간은 다행히도 짧았다.

시종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폐하, 라보 공작부부와 그 아들이 들었사옵니다.”

“들라하라.”

왕은 빠르게 시종의 말에 대답했다.

어서 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폐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이렇게 초대를 해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라보 공작,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라보 공작부인과 영식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나?”

왕은 친근하게 라보 공작부부와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라보 공작부인뿐 아니라 라보 공작부인과 스튜어트와도 친분을 과시했다.

왕비가 주최하는 모임에 초대받을 수 있는 인물들은 정해져 있는 편이다.

왕실에 어울릴 만한 가문 출신이어야 하니까.

자연스럽게 라보 공작부인도 자주 왕궁에 출입하게 되었다.

덤으로 스튜어트도 말이다.

부부동반 모임의 경우에 왕도 그들을 만났다.

무엇보다도 라보 공작일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그들을 우대해 주는 것이 맞았다.

“왕국에 큰일이 없는데 어찌 못 지내겠습니까? 모두가 폐하의 은덕입니다.”

“이렇게 사람 기분을 좋게해 주다니! 나중에 상이라도 내려야 하겠군. 라보 공작은 부인을 잘 뒀어.”

“그리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을 모를 벨로나 공작일가가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하게 미소를 유지했다.

란델리노도 마찬가지였다.

“자, 여기 벨로나 공작이 가족과 먼저 기다리고 있었네. 인사들 하게나. 서로 구면이지?”

“안녕하세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었네요.”

“그러게요.”

라보 공작부인은 잠시 놀랐다.

마치 그때의 조롱이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저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다는 것도 능력이었다.

심지어 라보 공작부인의 냉랭한 반응을 보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내 잘못이 뭐냐는 도전적인 눈빛인 것 같았다.

그녀가 우아하게 아들을 스튜어트 앞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이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란델리노 어서 말하렴.”

“미안해. 내가 태어나자마자 친모를 여의고 방치되면서 살았거든.”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당혹스러워했다.

벨로나 가문의 아들이 학대당하고 방치되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않은가.

당사자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내뱉었으니 가문 망신이 따로 없다.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만 담담했다.

단지 그녀의 눈썹이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녀가 형식적으로라도 사과를 해야 하다고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아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놀라지 않은 것은…….

—어머니, 제 방식대로 사과를 해도 되는 거죠?

—그러렴.

아들이 자기방식으로 사과를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마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짓일 줄이야.

자신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을 아주 많이 싫어함을 아는 아이가 말이다.

벨로나 공작은 놀람을 넘어서 분노했다.

가문 망신을 시키는 짓을 가주의 아들이 하고 있었으니까.

“란델리노, 그게 여기서 할 소리냐.”

“여보, 아이가 사과하고 있잖아요. 그만해요.”

벨로나 공작이 낮은 저음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녀가 그의 곁에서 작게 속삭이자 그도 작게 말했다.

“가문의 명예가 중요하다면서 지금 아이를 막지 않는다고?”

“폐하와 라보 공작일가가 보고 있어요. 대놓고 사교계에 소문이 퍼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죠?”

그가 숨을 들이키고는 말을 멈췄다.

왕궁에서 언성을 높이다가는 하루도 되지 않아서 수도 전체에 이일이 알려질 것이다.

남편을 진정시킨 페루제 공작부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가 어떻게 말을 마무리하려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끝을 맺지 않으면 페루제 공작부인이 저택으로 가서 엄히 혼낼 것이다.

벨로나 공작에게도 혼이 나겠지.

“어머니가 오신 후에 제대로 된 교육받기 시작했어. 그래서 아직은 내가 무지해. 제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겠어?”

“어…….”

스튜어트는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라보 공작부부에게 들었다.

그들은 그에게 쉽게 용서해 주지 말라고, 쉽게 사과를 받아주지 말라고 하였다.

라보 공작가문의 치욕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정해 놓은 대가를 주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사과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이다.

그가 부모님을 보려는데 갑자기 란델리노가 스튜어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너에게 망신을 준 내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이해해. 나라도 그럴 거야.”

“그, 그게…….”

손까지 떠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힘든지 보여주는 듯했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버지는 수도에 계시느라 공작령을 신경쓰지 못하셨거든. 폐하 곁에는 아버지가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 아버지는 그런 중요한 분이시니까.”

국왕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지금 아닌 척하면서 란델리노가 자신을 욕한 것을 알았으니까.

‘반드시’라는 말이 평범한 말을 다르게 만들었다.

국왕에게는 벨로나 공작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벨로나 공작이 국왕에게 필요한 최측근임을 언급한 것이다.

“아버지를 원망한다는 것은 아니야. 나는 일개 개인에 불과하잖아. 왕실과 왕국이 우선이지.”

“어…….”

동시에 수도에 벨로나 공작을 묶어 놓은 국왕의 무능함을 비꼼이었다.

국왕이 얼마나 무능하면 아버지가 친아들에게 신경도 쓰지 못하고 수도에 박혀 있냐는 뜻이었으니까.

스튜어트는 놀라서 말을 하지 못했다.

란델리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만약 어머니가 가문의 안주인으로, 아버지의 부인으로, 나의 어머니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그리 고통 속에서 살았을 거야. 어쩌면 이미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지.”

스튜어트는 한 발 뒷걸음질했다.

그는 자신이 뒷걸음질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분명히 슬퍼하며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무서울까?

그는 당장이라도 이 손을 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란델리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스튜어트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집안에 안주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가문의 기강이 살고 달라졌지. 어머니처럼 우아하고 정숙하며 인품도 완벽하신 분이 나를 친자식처럼 여겨 주셨어. 그에 맞는 교육도 시켜 주셨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 주변에 있는 시녀들, 시종들이 그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봤다.

“그렇지만 나는 많이 부족해. 이런 나를 가엾게 여기고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지 않을래?”

“어, 어머니, 아버지…….”

그가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봤다.

라보 공작부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스튜어트, 친구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데 받아줘야지.”

“그래. 란델리노. 네가 이해해 주렴. 우리 아이가 낯을 좀 가린단다.”

사과를 거절할 수 없다.

사과의 뜻으로 무언가를 받을 수 없다.

벨로나 공작이 재혼하기 전까지 방치를 당하던 아이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까.

그런 불쌍한 아이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반성하고 있다.

그런 아이를 상대로 사과의 대가를 받거나 사과를 거부한다면?

모두가 너무하다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스튜어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모님도 벨로나 공작부부도, 국왕도 자신에게 바라는 대답은 하나였으니까.

“그래. 알겠어. 용서해 줄게.”

“고마워. 우리 친하게 지내자.”

란델리노가 눈물을 닦고는 스튜어트를 안았다.

정말 고맙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스튜어트는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떨어지자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이들에게 다가왔다.

“사과를 받아줘서 고맙군요. 스튜어트 백작.”

“아닙니다.”

스튜어트는 그녀를 차마 올려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살기가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어쩜 아드님이 이렇게 의젓하시고 배려심이 깊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본받아야 할 것 같아요.”

“넓은 마음으로 아이의 부족함을 감싸 안아 주셔서 감사하오.”

페루제 공작부인이 감사의 말을 전하자 벨로나 공작도 말을 이었다.

라보 공작부부은 머리에 힘줄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벨로나 공작이나 벨로나 공작부인이나 얌체가 따로 없었다.

억지로라도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어 놓고 선심 쓰듯이 칭찬하면 다인가!

“아니네. 아이들끼리의 일인데 어찌 어른 싸움으로 커지게 두겠는가.”

“맞아요. 아이들이 사이가 좋으면 저희야 좋죠.”

라보 공작이 주먹에 힘을 줬다.

상대가 이리 야비하게 나오는데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를 이용해서 이따위 짓거리를 하다니 화가 났다.

그 마음은 라보 공작부인도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부채를 힘줘서 쥐고 있었으니까.

부부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다.

“하하하, 좋게 이야기가 끝났군. 그래. 이제 즐겁게 식사를 즐기세나. 어서 자리에 앉게.”

“네, 알겠습니다.”

국왕은 느꼈다.

이 식사는 망했다.

왜 벨로나 공작이 자신의 아내를 데려오는 것을 꺼려했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설마 아이가 스스로 저런 사특한 수작질을 생각해냈는가!

다 저 악마 같은 여인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국왕은 오해했으나 그것을 정정해 줄 인물은 없었다.

벨로나 공작이 자리에 앉으면서 아내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이것도 란델리노가 스스로 생각한 것인가?”

“자기방식대로 사과하겠다고 했어요.”

“미치겠군. 당신은 아이에게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나? 아니, 아이가 어떻게 사과할지 확인도 하지 않아?”

벨로나 공작의 물음에 그녀가 날카롭게 힐끔 그를 바라봤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 장소가 장소인지라 본성대로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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