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12화 (112/221)

112화 사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를 사이

그리고 그는 그날 잠들지 못했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반면에 그녀는 꿀잠을 잤다.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고 내일도 그것은 편함이 없었을 것이니까.

다음 날이 되었다.

공작일가가 왕궁으로 가기 위해서 저택을 나왔다.

그들을 호위하려는 공작의 기사들이 흠칫했다.

그들이 마차에 타고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작게 말했다.

“주군께서 왜 저러시지?”

“그러게. 저런 모습은 본 적이 없어.”

공작의 눈가가 어두웠다.

몬스터 떼로 인해서 며칠을 잠자지 못해도 거뜬했던 주군이었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을까?

소드마스터를 저렇게 만들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투에서나 볼까 말까 했던 주군의 모습을 이 수도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 원인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렇지. 모두 마음 속에서 떠오른 분이 있잖아.”

기사들의 시선이 자신들도 모르게 마차 안의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짧게 시선이 닿았다.

그들은 시선을 빠르게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공작부인이라면 주군을 그렇게 만들고도 남지.”

“암, 남고도 말고.”

“만약 소드마스터인 주군께서 쓰러진다면 그것은 공작부인께서 열 받게 해서 쓰러진 것일 거야.”

“맞아.”

그들은 마차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잠시 보고는 다시 앞을 봤다.

아름다운 부인을 얻었으면 뭐하랴?

남편을 죽이는데 앞장을 설 것이다.

재산이 많은 부인을 얻었으면 뭐하랴?

벨로나 공작가문을 위해서 그 재산을 쓸 여인이 아니다.

오직 여인 자신과 여인의 가문을 위해 쓰일 것이다.

외가가 엄청난 부인을 얻었으면 뭐하랴?

그 외가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외가의 뜻은 곧 그녀의 뜻일 뿐이다.

의붓아들을 위할 줄 아는 부인을 얻었으면 뭐하랴?

그 의붓아들을 손아귀에 쥐고 그 아들이 공작이 되었을 때, 그녀는 벨로나 공작가문을 손이 쥐게 될 것이다.

그 부인이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다.

“벨로나 공작령에서 우리 마중 나왔다고 있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떨립니다.”

“그렇지.”

벨로나 공작령에서 자신의 남편과 기사들을 죽이려고 했던 여인이다.

자신을 따르는 소드마스터까지 끌고 영지에 온 것을 보았다.

만약 그때 벨로나 공작이 물러서지 않았다면 진짜 피를 봤을 것이다.

그들은 그때의 살벌함이 떠오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한이 드는 착각이 들었다.

* * *

그 찰나를 눈치채지 못할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우아한 미소로 이를 지적했다.

“저 기사들 왜 자꾸 힐끔힐끔 저희를 보죠?”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시비 걸지 말지.”

“눈빛이 불손했다고요.”

정말 짧은 시간이었는데 기사들의 마음을 알아챘다.

정말 징글징글하게 느껴질 정도로 예민했다.

벨로나 공작도 란델리노도 알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굳이 집고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불손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데 어떻게 별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어디를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왕궁으로 가고 있다고요. 작은 흠조차도 없이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해야 해요.”

“우리는 왕궁과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라보 공작가문과 화해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야.”

겨우 기사들이 마차를 힐끔거렸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벨로나 공작은 알아서 문제를 만드는 아내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봤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는 남편이 짜증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완벽하길 원했다.

귀족으로 완벽하기를 원했고 가문의 안주인으로 완벽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존재들도 완벽하기를 원했다.

완벽한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벨로나 공작가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싶었다.

왕보다 완벽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흠이 있어야 할 이유는 아니지 않나요?”

“흠이라고?”

메디치 백작으로 왕궁에 왔다면 자신의 기사들을 데려왔을 것인데 아쉬울 따름이다.

벨로나 공작이 아내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흠이 아닐 수 있지. 진짜로 불손한 눈빛으로 이 마차를 봤다면 그건 우리를 본 것이 아니야. 당신을 본 것이지.”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을 내가 잘 이해한 것이 맞나요? 나에게 저딴 눈빛을 받아야할 문제가 있다고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자신의 완벽함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과 노력을 부정하는 짓이었으니까.

“그것을 이제야 알았나?”

“당신…….”

드래곤과 드래곤이 싸우는 것을 눈앞에서 본 기분이 이런 것인가 보다.

란델리노는 어머니와 공작의 기 싸움을 차분히 봤다.

어머니나 벨로나 공작이나 사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격 없이 싸우며 막말을 내뱉는 것을 보면 친한가 싶기도 하고 그 내용이 선을 넘는 거 보면 상극인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유독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과한 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군. 부부라서 그런 건가? 부부는 원래 이런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은 부부라기보다는 적국의 장수들이 대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는 왕궁에서 라보 공작일가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몰랐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몰라도 어머니는 하고도 남았다.

어머니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굳이 라보 공작가문과 친해질 이유는 없지만 척을 질 이유도 없었으니까.

아직은 말이다.

‘어머니에게 지속적으로 나의 능력을 인식시킬 이야기꺼리가 필요해.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귀에 들어갈 만한 것이 말이야.’

게다가 라보 공작가문의 영식인 스튜어트 백작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인물이다.

다른 공작가문의 자제들과 달랐다.

무능하면서도 자신의 비교대상이 되어 줄 녀석이었으니까.

니나스 알도의 고급의상실에서의 일로 사교계의 모두가 자신과 스튜어트 백작을 비교할 것이다.

다른 공작가문의 자제들이 아니라 자신과 그 녀석을 말이다.

‘무난한 놈보다, 우수한 놈보다 무능한 놈과 비교가 되어야 내가 더 돋보일 수 있어.’

그리된다면 자신은 점점 가치가 오를 것이고 그 무능한 녀석은 자신의 무능함만 부각시키게 것이다.

사교계에서 그런 이야기가 퍼진다면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도 그 이야기가 들릴 것이 분명하다.

사람을 써서 소문을 낸다면 어머니는 눈치챌 것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머니, 아름다움을 죄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

“모두가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사랑하죠. 그들의 시선이 불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어머니가 이렇게 아름다우신 걸요.”

란델리노가 눈웃음을 치며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벨로나 공작은 그 가식적인 모습에 눈을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떴다.

“저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은 어머니의 아름다움 때문인데 어찌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까요?”

“죄가 있다면 나의 아름다움이 죄라는 거니?”

“네. 어머니가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모으니 그것이 어찌 기사들의 죄가 되겠어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름끼치는 아름다움이었다.

이 아름다운 부인은 살아 있는 인형을 떠올리게 했고 어떤 때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연상하게 했다.

눈처럼 하얀 피부, 시체처럼 차가운 신체 그리고 너무 이성적이고 우아한 자태는 그녀를 사람으로 느끼지 못하게 해줬다.

그래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도 사람들은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어머니가 혼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란델리노가 윙크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서늘했던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 그럴 수 있겠구나. 이 어미가 왕실에 흠을 보이기 싫어서 예민하게 굴었단다.”

“작은 것도 크게 와전이 되는 것이 세상이니까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역시 어미를 이해해 주는 것은 우리 아들뿐이구나.”

“아니에요. 저는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것을 따랐을 뿐인걸요.”

그녀는 란델리노를 뿌듯해하며 바라봤다.

부인들이 말하는 ‘자식을 기르는 재미’가 무엇인지 점점 느끼고 있었다.

이런 아이가 벨로나 공작가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면 누가 되어야 할까?

단호하게 말하건대 란델리노 벨로나 이외에는 누구도 벨로나 공작의 뒤를 잇지 못한다.

자신이 그리 만들 것이니까.

설령 땅을 피로 적시고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고 할지라도.

란델리노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분을 풀어주자 공작에게서 느껴졌던 살기도 나아졌다.

정말 다행이었다.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알았네.”

왕궁에서 사고 칠 확률이 확 떨었으니까.

벨로나 공작이 마차에 내리고 페루제 공작부인과 란델리노가 내렸다.

아까와 달리 기사들은 긴장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있었다.

전장에 나서기 전의 날카로움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완벽함이었다.

“저택을 나올 때와 달라서 다행이구나.”

“그러게요.”

기사들이 속으로 뜨끔했다.

벨로나 공작부부가 뿜어냈던 기세를 기사들도 느꼈다.

마차 안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나 한바탕 크게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서도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며 마차를 힐끔거리던 안일함을 보였다면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니까요.”

“정말 운이 좋아.”

란델리노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몇 명의 기사들이 움찔했다.

얼굴색도 약간 하얗게 질렸다.

* * *

그녀에게 이번이 2번째 왕궁 방문이었다.

2번의 방문은 엄연히 달랐다.

저번의 방문은 메디치 백작으로 왕궁에 온 것이었고, 이번은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온 것이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그의 보폭에 맞춰서 걸었다.

처음 방문한 화려한 왕궁에 시선이 돌아갈 만도 하다.

그런데도 란델리노는 전혀 그리하지 않았다.

여기에 수십 번 온 사람마냥 여유롭게, 우아하게 걸었다.

그들은 어느 문 앞에 섰고 시종이 입을 열었다.

“폐하, 벨로나 공작부부와 그 아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들라하라.”

국왕의 대답에 시종이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화려한 장식과 귀한 식탁, 비싸 보이는 식기류가 있었다.

그들을 맞이하는 왕이 환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페루제 공작부인하고도 친한 것처럼 오해할 웃음이었다.

“폐하,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벨로나 가문의 안주인 루비로즈 벨로나. 알펜 왕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게 되어서 영광이옵니다.”

“벨로나 가문의 후계자인 란델리노, 알펜 왕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게 되어서 영광이옵니다.”

오랫동안 친분과 신뢰가 있던 벨로나 공작은 격식을 생략하고 인사했다.

이에 반해 페루제 공작부인과 란델리노는 왕궁예법서에 기록된 인사말을 했다.

작은 비꼼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의중이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