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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11화 (111/221)

111화 당신이 먼저 꺼낸 말

남편인 벨로나 공작과 자신의 아버지는 달랐다.

벨로나 공작은 아들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다.

심증만 있고 실체가 없는 의문의 여인에 대한 걱정이 되어서일까?

사랑이라는 일시적인 감정에 빠져서 가문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쯧, 혀가 절로 차였다.

“후계자와 관련된 문제는 정말 중요해요. 가문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요.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무능한 후계자나 자식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았다

자식의 무능함을 못 보는 바보들도 많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루비로즈 백작이 그런 인물이기도 했다.

장남이 아닌 다른 자식이 뛰어나서 고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뛰어난 자식을 외면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란델리노는 합법적인 유일한 자식인데다가 뛰어나기까지 하다.

가문의 미래가 든든한 것인데 불만이라니 한심하다.

아이를 방치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당신은 무능한 아이가 아니라 뛰어난 아이가 당신의 후계자임을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하지 않나요?”

“아직 후계자가 아니라 벨로나 공작의 아들인 거다. 그리고 그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위험하다는 것이고.”

“유일무이한 공작의 아들이 후계자가 아니라면 누가 후계자가 된다는 것인가요? 제 의심을 확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없나 봐요.”

그녀가 품은 의심은 남편이 반역가문의 딸을 정부로 들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여자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전에 공작은 그런 여인과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했었다.

벨로나 공작의 표정이 흉흉해졌다.

“당신이 이러니까 내가 그 아이를 후계자라고 언급되는 것조차 싫은 것이야.”

“적법한 명분이 없으면 그 아이가 후계자인 것은 정해진 수순이니까 그건 넘어가죠.”

아무리 공작이 란델리노를 후계자로 삼기 싫어해도 쫓아낼 만한 명분이 없다면 어렵다.

어느 가문, 왕실이나 장남이 가문을 잇는 것은 원칙이었으니까.

물론 가주가 장남이 아닌 아들을 후계자로 원하고 이를 밀어붙인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과정이 귀찮을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적법한 명분만 있다면 언제든 내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럴 리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렇겠지. 그대의 아들이니까.”

“우리의 아들이에요.”

그러나 벨로나 공작의 아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남편과 칼부림도 감내할 여인이 아닌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가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여인을 상대로 소중한 것이 있음을 드러낸다면 반드시 잃게 되리라.

그러니 숨기고 또 숨기며 때를 기다려야 했다.

서로 날카롭게 바라보다가 벨로나 공작이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라보 공작부인과 영식의 일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지 모를 일이군.”

“당신이 자꾸 저에 관해 오해를 하니까 정정하느라 그리된 것이죠.”

끝까지 남 탓을 하는 것이 더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서 그리되었다고 여겼으니까.

벨로나 공작이 이를 악물고 혀를 달싹거렸다.

그리고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먼저 입을 움직였다.

“란델리노의 뛰어남이 너무 이른 나이에 알려지게 되어서 걱정이기는 해요. 인간의 시기와 질투, 견제는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님은 제대로 알려졌겠지.”

벨로나 공작은 란델리노가 아이가 아이답지 않음을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의 귀에는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자신의 아들이지만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런 아이가 자신의 아들다운 능력과 자질을 지녔다는 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보아도 이리 빛나는 아이가 다른 사람 눈에 빛나게 보이지 않을까?

그 아이의 성장을 두려워하며 미리 그 싹을 잘라 내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있음은 자명했다.

“그렇죠. 벌써부터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다니 어미가 된 입장에서 뿌듯하지만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대는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것이요?”

“당신 말처럼 우리 아이가 보통 아이는 아니죠.”

페루제 공작부인은 공작의 말을 듣기는 했다.

단지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들었다.

상대의 의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은 했으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벨로나 공작의 기분이 나빠졌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마치 아들의 성장이 기대가 된다는 듯이 말이다.

“생각을 해보니까 제 잘못이에요.”

“뭐?”

아내의 말에 벨로나 공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무 놀라서 나온 표정이 압권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그대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그런 말이요?”

도대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런 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

아무리 떠올려도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은 없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그럼요. 그러면 제가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미친 사람인 줄 아셨어요?”

떨리는 눈동자와 미세하게 끄덕인 고갯짓은 벨로나 공작의 진심을 보여줬다.

아내를 미친 사람으로 여긴 것, 말이다.

그 마음이 느껴지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벨로나 공작은 자연스럽게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불쾌함을 느낀 순간, 그는 나빴던 기분이 순식간에 나아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벌써부터 아이의 능력에 사람들이 견제하도록 만들다니 경솔했어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을 들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지, 저 여자가 정상적인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위기 속에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것이니까 란델리노는 잘 이겨 낼 것이에요. 제가 아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고요.”

“그대가 상식적인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해 주는군.”

그녀는 남편의 담담한 말투에 욱할 뻔했다.

자신이 뭔 말만 하면 저리 나오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마음을 잘 다스려서 겉모습은 평온 그 자체였다.

그녀에게 대놓고 이리 말하는 사람은 벨로나 공작이 유일했다.

정확히는 그런 말을 하고도 살아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을게요. 여기서 말싸움을 더 해봤자 시간낭비니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군.”

부부간의 대화에 온 기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부부가 가진 동일한 생각일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벨로나 공작에게 피로도가 더 높았다.

“다시 당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목적을 말하세요.”

“공작가문 간의 화합을 위해서 왕실이 중재에 나섰어. 내일 라보 공작과 공작부인 그리고 영식이 식사를 위해 왕궁에 방문할 것이야.”

“그러니까 구색을 맞춰서 화해한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라보 공작을 달래줘야 하니까. 하긴 그가 친왕파에서 나가 버리면 폐하께서 난감해지시겠죠. 친왕파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요.”

란델리노와 스튜어트 라보 간의 일로 친왕파가 분열된다면?

그것은 친왕파의 세력 축소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왕권이 약화되는 것이다.

동시에 왕의 능력을 의심하게 될 계기가 된다.

자신의 아랫사람들을 중재하지 못하는 무능함이라며 뒷말이 나올 것이다.

이는 친왕파 내부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것이다.

무능한 리더를 따르는 불안감은 친왕파의 결속을 흔들 것이다.

외부해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할 것이고 말이다.

그런 왕의 입장을 조롱하듯이 그녀는 말한 것이다.

“배우도 아닌데 연극을 하게 되었네요.”

“폐하의 중재를 그따위로 말하지 마.”

사실이라고 해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도 대놓고 왕실을 조롱하며 가짜 쇼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 않는가.

그는 확신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왕궁에서 라보 공작일가와 식사를 하면 화합은커녕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공작은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도 가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모양새가 그러했다.

“역시나 당신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야. 내가 폐하에게 잘 말하지. 내일 란델리노만 데리고 갈 것이니 그리 알아.”

“어머? 왜요? 저도 같이 갈 생각인데요?”

가문을 위해서 자신은 그 어떤 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겨우 왕궁에 가서 식사하고 나오는 것이 무엇이 대수겠는가.

상대에게 웃어 주고 장단을 맞춰 주면 될 일이다.

괜히 왕의 명령을 어겨서 그이가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스스로를 칭찬할 만한 안주인이니까.

“아니, 괜찮아.”

“아니에요. 폐하의 명령을 해서 당신도 억. 지. 로. 꺼낸 말일 것인데 당연히 따라야지요.”

그가 자신에게 대화를 할 때부터 국왕이 뭔가를 지시했음을 눈치챘다.

자신과 말 한마디 섞기 싫어하는 남자다.

그런 이가 자신에게 말을 꺼낸 것은 국왕의 명령이기 때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열 받는 일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찾지 않으니까.

“아니, 그러지 말라니까.”

“란델리노의 뛰어남에 라보 공작가문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화해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야! 당신은 내일 저택에 그냥 있어!”

“싫어요.”

그건 그렇고 자신이 가겠다고 하는데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저렇게 기겁하면서 싫어하니까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

자신이 왕궁에서 사고라도 저지를 것처럼 구는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그대는 그냥 여기 있으라고!”

“당신이 말을 꺼냈잖아요!”

“지금 엄청 후회 중이야!”

남편은 손사래 치며 자신이 가겠다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이럴 것이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말아야 마땅했다.

악을 쓰더라도 내일 왕궁에 반드시 가고 싶어졌다.

“갈 거예요. 어차피 한 번쯤은 라보 공작부인을 만나려고 했어요.”

“거짓말하지 마. 아까도 니나스 알도의 고급의상실에서의 일은 잊었다가 기억해 냈잖아.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이라며. 당신이 직접 말했어.”

“아내의 실수는 넘어가 줘야 하는 법이에요.”

아까 기억을 못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정말 중요하지 않아서 잊은 것이 어찌 잘못이란 말인가.

그런 가치밖에 가지지 못한 라보 공작부인과 그 아들의 탓이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내의 작은 실수는 좀 넘어가 주지 어찌 이리도 책을 잡는지를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란델리노의 뛰어남이 알려진 시점에서 괜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죠.”

“아까까지만 해도 라보 공작가문을 밀어내라고 제안한 사람이 태세전환은 빠르군.”

“당신이 나랑 손을 잡지 않으려고 하니까요.”

자신과 손을 잡고 라보 공작가문을 밀어내기로 했다면 즐거운 대화가 되었을 것이다.

라보 공작가문을 서서히 몰락하게 하는 재미도 쏠쏠했을 것이고 말이다.

부부간에 사이도 더 좋아지지 않겠는가.

공동의 관심사는 서로의 관계를 가깝게 해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왜 꽃을 깔아 주는데 거부하고 돌길을 가는지 모르겠다.

남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내일 무조건 왕궁에 갈 거니까 그리 알아요. 이 저택에서 피바람 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막지 말고요.”

“하아, 알아서 해.”

벨로나 공작은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억지로 자신을 막으면 메디치 백작가문의 병사들과 대치할 것을 각오하라는 의미를 읽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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