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10화 (110/221)

110화 기껏해야 두 가지 문제다

공작이 자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페루제 공작부인도 뒤따라서 들어왔다.

벨로나 공작이 소파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그녀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앉았다.

그녀를 따라서 차와 잔, 간식이 있는 이동식 트레이 카트를 끌고 온 시녀가 들어왔다.

시녀는 자연스럽게 그녀 앞에 차를 내놓았다.

그녀가 차의 향을 맡고는 남편을 바라봤다.

“당신은요?”

“되었네.”

공작은 헛웃음이 나왔다.

공작의 집무실에 허락도 없이 시녀가 트레이를 끌고 온 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구는 아내라는 여자의 태도를 지적해야 하는지.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

저것은 천성이다.

타고난 본성이다.

눈앞의 여인은 누군가와 화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확신이 있다고 해도 왕의 명령이다.

일단 따르기는 해야 했다.

그녀가 차를 한 입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요. 오자마자 나와 할 이야기가 뭐죠?”

“그대가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라보 공작부인과 라보 영식에게 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눈을 잠시 찌푸렸다.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라보 공작부인, 라보 영식,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

곧 그녀의 눈이 커졌다.

뭔가 기억이 떠오른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아?! 그때의 일이요!”

“그때의 일이요? 지금 그것이 말이라고 한 것인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대와 란델리노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진 줄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남편의 말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보 공작부인과 영식에게 벌어진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자질 만큼 평가받게 된 것뿐이니까.

자신은 가문의 힘과 영향력에 지장을 주지 않는 일에 신경을 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게다가 오히려 벨로나 공작가문이 라보 공작가문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을 심어 줬으니 좋아해야 마땅했다.

그래도 굳이 문제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기껏해야 두 가지인데 뭐가 그리 문제인지 모르겠네요.”

“그것을 ‘기껏해야’라는 말로 표현하다니 당신이란 여자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져.”

기껏해야 두 가지다.

친왕파 내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가 될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왕권의 강화를 반대하는 인물이다.

오히려 친왕파의 분열하여 왕권이 약화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편의 입장도 생각할 줄 아는 여인이 진정한 내조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나와 생각이 아주 다르죠. 친왕파의 분열이 싫으면 답은 간단해요.”

“이 문제가 간단하다고?”

친왕파의 분열로 힘을 잃기 싫으면 반왕파나 중립파로 옮기면 된다.

그러면 벨로나 공작을 따라서 친왕파를 떠날 사람들은 떠나게 될 것이니 친왕파의 내부 분열이라는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아니면 그를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친왕파, 반왕파, 중도파와 다른 제 4의 파벌을 만들어도 된다.

그러나 자신의 남편은 능력이 있으며 위선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당신과 척을 지게 될 라보 공작과 일가를 치워 버리는 될 일이에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당신은 친왕파를 떠나기 싫겠죠. 고고한 충신으로, 백성들의 영웅으로 남고 싶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친왕파의 유일무이한 구심점이 되는 방법밖에 없지 않나요?”

남편은 위선적이다.

문제의 원흉을 제거하면 해결될 일을 굳이 어렵게 가려고 하니까.

“왜 이렇게 싫어해요?”

“그렇게 되면 라보 공작가문과 벨로나 공작가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게 될 것이야. 최악의 경우에는…….”

“북부의 벨로나 공작가문과 동부의 라보 공작가문이 싸움이 일어나겠죠. 그런데 그게 뭐요?”

북부를 대표하는 벨로나 공작가문과 동부를 대표하는 라보 공작가문.

두 가문은 인접하지 않았다.

지리적인 면만 보면 영지전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근거는 되기 어려웠다.

창과 칼을 드는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지 간의 교역과 관련하여 얼마든지 서로가 공격할 수 있다.

그렇게 날을 세우게 되면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게 된다.

“교역에 문제가 생길 걱정을 하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메디치 백작이기도 하잖아요.”

본디 아내는 남편이 잘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동부 라보 공작가문과의 무역전쟁?

괜찮다.

이 벨로나 공작가문에는 부유한 라스타 왕국의, 부유한 메디치 백작령의 페루제가 있었다.

“정말 그대랑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치가 떨리게 되는군.”

“아쉽네요. 저는 사랑하는 남편과 이렇게 마주하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거든요.”

자칫 자신이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타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일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

거기에는 일말의 고민도 없다.

공작 본인에게 자신과 힘을 합쳐서 라보 공작가문을 제대로 무너뜨려 보자고 하고 있었다.

라보 공작가문이 무역 전쟁을 한다는 것은 라보 공작가문의 일정 수익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교역 전쟁은 제 살을 얼마나 많이 던지며 견디는지가 관건이다.

한쪽이 제재를 가하면 상대 쪽도 제재를 가하게 된다.

그에 관련된 수익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벨로나 공작가문은 메디치 백작령과의 교역으로 그 손실을 최소화하고 라보 공작가문과의 무역에서 주도권을 가지라는 것이다.

자기 살을 떼어 내는 싸움에 하얀 깃발을 드는 것은 더 큰 손실을 감수하게 될 라보 공작가문일 것이니까.

그러나 이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라스타 왕국의 세력을 넓혀 주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라보 공작가문을 견제하는 동맹이라는 명분으로 알펜왕국의 북부에 자기 사람들을 심어 놓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지.”

“진심인데 이리 몰라주시니 야속하군요. 뭐, 좋아요. 당신 기분이 나아질 수 있도록 대화를 빨리 끝내죠.”

나름 진심을 담아서 돕겠다고 한 것인데 야속했다.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라보 공작과 친왕파 내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보다 친왕파의 진정한 2인자가 되어서 세력을 제대로 휘어잡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도저히 남편의 생각을 모르겠다.

위선인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가끔 궁금했다.

그녀가 차를 마시고 간식을 먹고는 입을 열었다.

기껏해야 생긴 두 가지 문제 중 두 번째를 언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서 그런데요. 그 일로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가 아둔하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 큰일인가요? 아니면 라보 공작부인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시킨 것이 알려진 것이 큰일인가요? 아니면 란델리노의 위상이 너무 높아진 것인가요?”

두 번째는 자신의 아들과 란델리노와 라보 백작이 사교계에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이 나쁜 것이지. 그대도 알잖아.”

“마치 내가 거짓을 진실로 믿도록 만들었다는 말투네요.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한 것은 죄는 아니죠.”

무능한 후계자를 무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어찌 문제인가?

사람을 품을 수 없는 옹졸한 후계자를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기게 된 것이 어찌 문제인가?

몰랐던 진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 어찌 문제인가?

“물론 평민은 그럴 수 있습니다. 거지처럼 굴 수 있습니다. 무능해도 이해합니다. 그들은 무지하며 어리석은 족속들이니까요.”

일반적인 평민의 경우라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무지하며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타인의 거짓에 선동을 당하는 족속들이니까.

무지한 것들은 진실을 제대로 볼 줄 모른다.

남들이 떠들어대면 그것이 진실인 줄 안다.

“그런 그들을 데리고 영지를, 왕국을 통치하는 것이 귀족입니다. 우리는 지배자로 그에 맞는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귀족들이 그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지배자란 응당 그리해야 한다.

그 책무는 나이가 어리다고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기에 아직 능력은 부족해도 적어도 행동은 귀족답게 해야 했다.

남편의 말들은 하나같이 귀족답지 않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귀족이라고 부르기 창피한 아이의 편을 들어주는 이유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무거운 책무는 어른이 되면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야. 아직 무지한 아이에게 그런 이미지를 띄운 것을 그렇게 말하나? 아이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인데 미안하지도 않아?”

“귀족으로 태어난 숙명인 것을 왜 미안해하나요? 그리고 적어도 란델리노를 학대 속에 방치했던 당신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귀족이란 나이와 관계없이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페루제 공작부인.

귀족이더라도 각 나이에 맞는 행동이 있고 과한 기준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벨로나 공작.

두 사람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 중 하나는 확실히 맞았다.

아들의 고통을 오랜 세월 외면한 아버지가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자꾸 내가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말하죠. 라보 공작부인과 라보 백작의 일은 나로 인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의 계획이 아니다?”

“란델리노의 의도였던 거죠.”

“아직 아이에 불과한데 의도적으로 그리했다고?”

벨로나 공작은 믿어지지 않았다.

학대와 방치 속에 자랐던 아이가 그런 음흉한 계책을 생각하고 계획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는 누구보다 떳떳해 보였다.

물론 그녀라면 거짓도 당당하게 진실이라고 말할 것 같았다.

“당신도 아니고 아이가 그랬다고? 나보다 그것을 믿으라는 거야? 나를 속이려면 속일 만한 이야기를 해.”

“제가 거짓말을 말해서 무슨 이득을 얻는다고요?”

그는 애써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공작은 두려웠다.

그런 모략에 능한 아이가 커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쇠해질 자신과 강력한 계모를 등에 업고 성장하여 강해질 란델리노.

그 승패를 자신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도 믿지 않는군요. 당신이 방치하고 억압했던 아이가 얼마나 뛰어난 자질을 지녔는지 인정하기 싫은가요? 자신의 자질을 기뻐하지 않는 아버지라니 신선하네요.”

“그대 말이 사실이라면 그 아이는 귀족보다 뒷골목에 어울리겠어. 음흉하기 짝이 없지. 우. 아. 한. 귀. 족. 답. 지 않게.”

“저희 아버지는 죽은 오라버니들의 재능이 출중하다며 자랑스러워했거든요. 무능한 자식들을 그리 생각하는 어리석음이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한심해요.”

그녀는 뜬금없이 자신의 친부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남편을 빤히 쳐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