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중재가 필요한 상황
“아이들끼리 부딪혀서 생긴 일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일이에요.”
“그래서 아랫사람이나 하는 짓을 해서 비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다?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
그들은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다.
각 공작가문을 대표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벨로나 가문의 아이는 뛰어난 자질을 지닌 아이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자신의 아들이라는 놈은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망신거리가 되어 버린 것과 대비되게 말이다.
“당신은 뭐를 했길래?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가 거지처럼 굴었다는 소리를 듣게 한 거야!”
“죄송해요. 그러나 직원들이 쉬쉬하며 감추는 것을 어떻게 제가 알겠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라보 공작부인도 사교계에 들리는 소문을 접하고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설마 아들이 사교계의 주요 부인들이 모이는 의상실에서 매번 화를 내며 간식을 받아왔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직원 중 누구라도 언질을 줬다면 절대로 그리하지 못하도록 가르쳤을 것이다.
이미 아들의 만행을 알고 한차례 아들을 엄하게 혼냈다.
라보 공작의 분노하는 사이에 잠시 그때의 분노가 떠올랐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으아아앙, 어머니, 죄송해요.”
“너는 라보 공작가문의 품격을 벨로나 공작가문 아래로 만들었어! 방계도 아니고 가문의 후계자가 이러는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게다가 겨우 간식을 더 먹겠다고 그동안 한 짓들은 민망하고 창피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구나. 도대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스튜어트를 콧물, 눈물이 나올 만큼 훈육했다.
사실을 알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보 공작부인에게 억울한 면이 있었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라보 공작의 분노가 아들에게도 닿았다.
“스튜어트, 너는 뭐하는 놈인데 상대가 너를 놀리는 것도 모르고 당해? 어? 너 바보야?! 내 아들이 이따위 녀석이라니!”
“아, 아버지. 죄송해요.”
스튜어트는 울면서 사과했다.
“너에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간식만 주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야. 그런데 그것을 참지 못하여 ‘거지’ 같은 라보 영식이라도 뒷말을 듣게 되었다. 너 때문에 라보 공작가문의 꼴이 말이 아니야.”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여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을 잘 시킬게요.”
스튜어트가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며 말했다.
라보 공작부인도 곁에서 남편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라보 공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 당신 말처럼 나중에 잠잠해질 말일 수 있지. 아직 어린 아이들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 그런데 내가 가장 화가 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
“당신이 말한 어린 아이는 벨로나 영식도 포함이야.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스튜어트가 만만해 보였으면 자신이 절대로 질 일이 없다고 장담을 하는 거야!”
거기에는 라보 공작부인에게 당신이 얼마나 아이를 쓰레기로 길렀으면 그런 말을 하게 하느냐는 말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항의하고 싶어도 선물까지 다 받아놓은 상황이라 항의도 못해.”
“죄, 죄송해요.”
라보 공작부인이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낸 선물들을 받지만 않았어도 상황은 나았을 것이다.
조롱한 상대가 준 선물을 받았다는 것은 모욕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 혹은 모욕을 용서하는 것처럼 해석되는 일이었다.
여기서 정식으로 항의를 한다면 선물은 선물대로 다 받고 무슨 짓이냐고 손가락질을 당하기 충분했다.
“쯧. 그동안 편히 공부하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도록 놔뒀지만 이제 어림도 없다. 앞으로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네. 아버지.”
스튜어트는 한껏 움츠러든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들을 한심하게 내려다본 라보 공작은 혀를 찼다.
“그만들 나가 봐.”
“네. 가자. 스튜어트”
“아버지, 나가 보겠습니다.”
나가는 뒷모습에서 얼마나 스튜어트가 슬퍼하는지가 느껴졌다.
힘이 없이 축 늘어진 어깨는 그의 마음을 보여줬다.
* * *
벨로나 백작(영식)과 라보 백작(영식) 간의 일에 난감해진 것은 라보 공작가문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가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라보 공작이 상당히 분노했겠군. 이러다가 다른 세력으로 옮기기라도 하면 타격이 큰데 말이야. 시종장,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폐하, 솔직히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허하겠네.”
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계속 누르며 말했다.
시종장이 숨을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상당한 금액의 선물을 받은 시점에서 벨로나 공작가문은 사과를 굳이 하지 않을 상황이기는 합니다. 선물을 받음으로 그 전의 일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답을 내렸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놈의 선물만 받지 않았어도 벨로나 공작가문에 사과를 하라고 서신을 보내고 중재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니 라보 공작 일가와 벨로나 공작 일가를 왕궁에 초대하여 그들이 화합할 자리를 만든 것은 어떠신지요?”
“앙금을 풀고 사이가 좋아졌음을 보여주자?”
“네. 맞습니다.”
왕이 이렇게 두통을 느끼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라보 공작은 친왕파 소속의 귀족이다.
벨로나 공작에게 자격지심을 가지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같은 파벌 안에 속한 공작가문끼리 분열은 친왕파 세력 그 자체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었다.
“같은 파벌에다가 공작가문에서 자기 가문과 후계자를 놀리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지.”
“네. 이것을 명분으로 친왕파에서 반왕파로 넘어간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 없을 일입니다.”
“그들이 척을 지지 않고 친왕파에 남을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기는 하지.”
“폐하께서 라보 공작가문을 신경써 주고 계심을 안다면 대놓고 다른 파벌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벨로나 공작이 친왕파의 무력을 담당했다면 라보 공작은 세력 확대를 위한 인맥관리를 담당했다.
사적으로는 벨로나 공작과 더 가까우나 공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엄청 아꼈다.
“빨리 불러야겠군. 건국제가 불과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 벨로나 공작을 부르게.”
“알겠습니다.”
정말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라는 여자는 자신과 맞지가 않는다.
그 여자 때문에 대법관은 중립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친왕파의 대법관이 제일 수가 적게 되었다.
게다가 벨로나 공작이 북부에서 그녀를 견제하느라 수도에 신경을 덜 쓰게 만들었다.
“여기서 파필리오 공작 놈이 즐거워 할 거리를 제공할 수는 없지.”
무력을 담당하는 벨로나 공작이 수도에 오지를 못하니 반왕파 놈들이 더 신이 나서 난리를 치고 있다.
반왕파의 수장인 파필리오 공작도 소드마스터였으니까.
반왕파 소드마스터가 수도에 있고 친왕파 소드마스터가 왕의 곁에 없으니 반왕파에서 신이 날만도 하다.
여기서 벨로나 공작가문과 라보 공작가문의 싸움으로 친왕파가 분열된다면 반왕파는 밤에 춤이라도 출 것이다.
* * *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벨로나 공작이 왔다.
왕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그래.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서 불렀네.”
“어떤 말씀이십니까?”
“그대도 자네 부인과 아들이 라보 공작부인과 영식에게 어떻게 굴었는지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서 벨로나 공작은 참으로 침착해 보였다.
시큰둥해 보였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내일 라보 공작에게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초대를 했네. 물론 라보 공작부인과 라보 영식도 함께. 그대도 그대의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오게나.”
“폐하, 소신이 아들을 데려오는 것은 할 수 있으나 아내를 데려오는 것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이 일의 난이도가 높은 이유는 이 초대는 ‘초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식 명령이 아니라서 강제성이 없었고 사정에 따라서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벨로나 공작은 인정했다.
자신의 아내라는 사람은 자신이 싫으면 결단코 하지 않을 여인이었다.
여기서 알겠다고 하고 못 데려와서 왕의 명령을 불복하게 되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속 편했다.
소드마스터로 힘을 써서 데려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대는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힘으로 끌고 오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네만.”
“만약 억지로 데려온다고 해도 폐하가 원하는 말을 뱉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내는 자신이 소드마스터임을 안다.
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준비도 했다는 의미였다.
그 여자 성격에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대비했을 것은 자명하다.
왕이 한숨을 쉬었다.
벨로나 공작이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진짜로 데려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무슨 수’를 숨기고 있다고 여겨야 마땅했다.
“수도에 입성했을 때, 만났던 짧은 시간동안에도 나를 열 받게 하던 여인이었지.”
“평소에는 더한데 그것도 자제한 것입니다.”
“그게 절제한 것이면 도대체 제대로 난리를 치면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하기도 무섭군. 도저히 안 되겠는가?”
벨로나 공작의 말을 들은 왕은 황당했다.
당연했다.
국왕이 사생아 출신임을 대놓고 초면에 말하는 여인이 아닌가.
왕이고 뭐고 눈치를 보지 않아서 뭐 저런 여자가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나름대로 참은 것이라고 한다.
그게 참은 것이면 말로 사람을 죽일 여자였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인지라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놀리겠다는 의도도 모욕을 주겠다는 의도도 없었다.
담담하게 사심이 없이 말하는 것인데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한번 말은 꺼내 보겠습니다.”
“난감한 자네 입장을 알지만 반드시 데려와야 하네. 건국제에서 서로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이면 친왕파의 혼란은 상상 이상일 것이야.”
“알겠습니다.”
반드시 라보 공작가문과 화합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아내를 설득하여 왕궁에 데려가야 한다.
그 성질머리를 억누르고 거기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시도는 해봐야 했다.
* * *
벨로나 공작이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오셨어요?”
고용인들이 일사분란하게 공작을 맞이했다.
그런 공작에게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가왔다.
보통 남편의 겉옷을 받아드는 것은 안주인이 한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집사에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말도 하지 않고 고갯짓으로 명령을 하는 인성이다.
“겉옷을 주십시오.”
“여기 있네.”
그녀를 데려가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녀 때문에 라보 공작가문과 전쟁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일 상황이 아닐까?
이런 여자가 과연 국왕의 명령을 따를까?
솔직히 공식적인 명령이 아니라 ‘초대’였다.
명분에 따라서 거부할 수 있었고 그것에 관해 뭐라고 하기 어려웠다.
본래라면 왕의 초대를 거절할 간 큰 인사는 없었으나 이 여자는 다르지 않은가.
수틀리면 뭔 짓을 할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옷을 건네는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으니 집무실로 와.”
“할 말이요? 그래요. 할 말이 있다면 가야죠.”
그녀가 자신의 말에 장난스럽게 웃었다.
분명히 자신이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는 눈짓이다.
그녀는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