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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08화 (108/221)

108화 벨로나 공작가문과 라보 공작가문

마차에 탄 부인들은 서로를 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상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인지 무서워요.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러는 것을 보면요.”

“아이가 아이 같이 굴지 않으니 소름이 돋네요.”

“저는 그런 아이의 성향을 알아챈 페루제 공작부인이 더 무서워요. 그러니까 만나자마자 아들 삼겠다고 선언했겠지요.”

어머니라는 여인도, 아들이라는 아이도 어쩜 이렇게 무서운지 한기가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학대를 당하고 기죽어 있던 아이가 그런 냉혹함과 계획성을 가지고 있을지 누가 꿈에나 꿨겠는가.

숨기고 있던 그 성향을 꿰뚫어 본 페루제 공작부인은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니나스 알도는 망하겠죠.”

“그렇겠지요. 라보 공작가문과 어울리는 디자이너라고 했잖아요.”

“멍청하고 무능한 후계자에게 어울리는 디자이너라고 소문이 날 것인데 어느 부인이 거기서 드레스를 사겠어요.”

그들은 하루 만에 생긴 여러 불운으로 망하게 생긴 니나스 알도를 애도했다.

* * *

벨로나 공작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온 페루제 공작부인과 란델리노는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 오늘 정말 좋았어요.”

“나도 네 덕분에 기분이 좋구나. 다음에도 이런 시간을 갖도록 하자.”

“저는 언제든지 좋아요.”

따스한 분위기로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아들과 멀어질수록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다가 우아한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 우아하여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아름다운 조각상 같이 혹은 얼음과 같이 차갑게 느껴졌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의 의상은 언뜻 보면 평범하게 보였으나 가까이서 보면 섬세한 무늬로 우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보고는 일어났다.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많이 기다렸는가?”

“아닙니다. 방금전에 도착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군.”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소파에 앉았다.

“앉아.”

“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체 모를 여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인이 앉자마자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을 뗐다.

공작부인을 위해 적당히 데워진 찻잔을 품위 있게 들었다.

“니나스 알도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수도에서 자리잡기 수월해졌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 여인은 니나스 알도와 같은 디자이너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인정할 만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기존에 고객층이 탄탄한 실력자가 있으면 자리를 잡기가 아무래도 어려웠다.

이제 막 수도에서 의상실을 여는 신입과 수도 최고 디자이너의 실력이 비슷해도 사람들은 실력이 보증된 최고의 디자이너를 찾을 것이니까.

“그녀만 없으면 네가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하여서 움직인 것이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라.”

“물론입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디자이너는 니나스 알도 외의 디자이너는 잔챙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 자신감을 믿고 니나스 알도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사교계의 정보를 수집하기에 오트 쿠튀르 하우스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사람이 많을수록 그곳에 흘러들어오는 말들도 많을 것이고 그것을 취합하면 모두가 모르던 진실이 나올 때도 있었으니까.

“내가 한 노력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최고의 보조들과 고객응대 직원들까지 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녀가 한 노력은 무엇일까?

충분히 의심이 들 만한 일이었다.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는 귀족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고객이 예약할 때, 가문명을 확인하지 않는 실수를 할까?

모두가 가문명을 말하니까 분명히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을 말하는 고객도 가문명을 말했을 것이라고?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가 하는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그리 일을 허술하게 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낯선 이름을 보면 귀족인지 확인하는 것이 절차였으리라.

“나는 내 기대를 배신하는 사람에게는 가혹해진다는 것을 잊지 마렴.”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수도 최고 디자이너가 되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마.”

그렇게 생각하면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곳 직원을 매수해서 예약명단에 굳이 가문명을 기재하지 않고 넘어가도록 한 것이 자연스러웠다.

프론트 직원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예약명단을 작성할 만한 인물로 말이다.

그녀가 의상실에 당도하기 전에 그 직원은 대가로 받은 자금으로 휴양지에서 인생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지 못한다.

불행하게 사고사를 당할지 아니면 병사를 당했을 수도 있으나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보 공작가문과 그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사교계를 달구었다.

그러나 알지 않는가?

원래 소문의 당사자들에게 ‘소문’에 관한 소식이 가장 늦게 당도하는 법이다.

어느 모임에 라보 공작은 참석하게 되었다.

모임 주최자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네 초대인데 당연히 와야지.”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동입니다.”

라보 공작가문은 벨로나 공작가문과 함께 친왕파에 속한 가문이었다.

벨로나 공작만큼은 아니더라도 라보 공작도 왕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왕이 벨로나 공작가문을 라보 공작가문보다 더 높게 치는 것 같다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 마음을 보상받기라도 원한다는 듯이 사교활동에 열중했다.

벨로나 공작이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것에 라보 공작은 힘을 썼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세력도 커진다는 믿음도 있었다.

“같은 공작가문이라고 해도 라보 공작가문이 더 격이 있지요. 벨로나 공작가문보다는요.”

“게다가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문화적인 교양을 쌓지 못하셨으니까요.”

“맞아요. 그리고 선대 공작부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기간이 길지 않잖아요.”

라보 공작과 친분이 있는 이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

그가 벨로나 공작을 깎아내리면 좋아한다는 것도 말이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나나 벨로나 공작이나 다 같은 공작이거늘.”

“저희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공작각하께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허어, 이 사람들이…….”

말리는 척하면서도 라보 공작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그것을 모를 귀족들이 아니었다.

라보 공작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양심이 없지 않나요?”

“그러게요. 벨로나 공작각하가 더 뛰어난 것을 모두가 알잖아요.”

“아부도 너무 과하면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데 라보 공작각하는 참으로 비위도 좋아요.”

객관적으로 본다면 자격지심을 가질 일이 아니다.

벨로나 공작은 몬스터들에게서 백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영웅이다.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어서 가문을 휘어잡은 카리스마를 지녔다.

비록 내정은 고모인 칸나 백작부인의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선대 벨로나 공작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방계들 간의 싸움이 날 것이라고 말이 돌았잖아요.”

“그런 소문이 들게 한 방계 가문들을 지금의 공작이 몰살해 버렸죠.”

“직접 전선에 나와서 전략을 짰다고 들었어요.”

“그분에 비해서 라보 공작각하는…….”

“평범하시죠.”

벨로나 공작에게는 이렇게 그의 능력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에 비해서 라보 공작은 평범했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능하지 않고 유능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벨로나 공작이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다.

그것이 불행이었다.

“폐하와 벨로나 공작각하는 벗이시지요.”

“두 분이 사이가 돈독한 것은 오래되었지요.”

그뿐이랴?

벨로나 공작은 정부의 자식인 현왕이 왕족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시절에도 현왕과 친분을 쌓았다.

“폐하가 왕실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기 전에는 형식적인 예의만 차렸잖아요.”

“맞아요. 그래놓고 폐하께서 왕자가 되고 바로 태자가 되시니까 싹 돌변했잖아요.”

“정말 태세전환 하나는 빠른 인물이라니까요.”

그들이 쑥덕거렸다.

그때 어떤 여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에 관해서 들었나요?”

“들었다니요? 무엇을요?”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그 여인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근처의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집중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믿어지지가 않네요.”

“저도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리 아들 자랑을 하시더니 영 아니네요.”

‘라보 공작가문’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사건에 흥미로워하며 즐거워했다.

“그러게요. 매번 올 때마다 간식을 얻어먹으려고 화를 내고 떼를 쓰다니요. 믿어지지가 않네요.”

“그동안 오트 쿠튀르 하우스 측에서 쉬쉬하느라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 벨로나 공작부인과 벨로나 백작 덕분에 알려지게 된 것이죠.”

“조롱당하는지도 모르고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더 웃겨요.”

“그렇죠?”

모두가 그렇게 즐겁게 험담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왕이 없는 곳에서는 왕을 욕하기도 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조롱은 무슨 말이고 선물은 무엇이야?”

“라보 공작각하!”

라보 공작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험담과 놀림을 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는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다.

덤으로 그 일로 라보 공작가문과 후계자에게 어떤 말이 돌고 있는지도 말이다.

* * *

라보 공작이 화가 난 상태로 귀가하는 것은 당연했다.

겉옷을 던지며 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스튜어트와 부인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라보 공작의 부름에 라보 공작부인과 스튜어트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여보, 불렀어요? 꺄아악!”

쨍그랑!

술잔이 깨지는 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라보 공작은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알아! 아느냐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아버지.”

라보 공작부인은 놀라며 스튜어트를 안았고 스튜어트는 울먹였다.

“언제까지 감출 줄 알았어! 벨로나 영식과 있었던 일이나 그동안 저놈이 거지처럼 굴었던 짓들을 말이야!”

“여보, 그게 말이에요. 제가 다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진정…….”

최대한 숨겨 보려고 했지만 결국 남편에게 들켜 버렸다.

그녀는 남편이 조금 화가 조금이라도 풀어지기를 원했다.

아쉽게도 그것이 라보 공작을 더 자극했다.

“진정? 진정?! 조롱당하는 것을 조롱당한 지도 모르고 온데다가 비웃음이 담긴 선물을 아무렇지 않게 받기까지 했어! 모두가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는지는 알아? 아냐고!”

“여보, 아이들끼리의 일이었어요. 금방 수그러들 것이에요.”

“아이들끼리의 일? 수그러들어?!”

라보 공작부인이 순간 눈을 질끔 감았다.

그녀는 화가 난 남편은 너무 무서웠다.

자신의 말은 듣지 않고 화를 내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라보 공작부인은 라보 공작가문의 내부 결속을 위해서 혼인하게 된 가신의 딸이었으니까.

그것도 충성심이 아주 강한 가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무리 부당한 명령이라도 남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만큼 우직했다.

딸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을 아버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말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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