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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07화 (107/221)

107화 조롱당한 후계자 (4)

페루제 공작부인이 시선을 디자인 북에서 시선을 떼고 란델리노를 봤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은 란델리노의 대답을 얼마나 기대하는지 보여줬다.

란델리노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기대를 즐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 대답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그가 말을 하면서 니나스 알도를 힐끔 쳐다봤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 찰나의 순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디자인을 고르면 부를 것이니 그대는 잠시 이곳을 나가 있게.”

“예? 디자인을 고르면 원단이나 장식 등 세부적인 것을 정해야 합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무심하게 그녀를 고객 응대실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니나스 알도가 그녀의 명령을 거부했다.

도대체 벨로나 영식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고 어떤 말을 할지 걱정이 되었으니까.

그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니나스 알도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해도 받아줄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디자인을 고른 후에 하면 될 일이 아닌가? 왜 직원부터 주인까지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려고 이리 노력하지?”

“죄송합니다. 결정되시면 불러주십시오.”

살기등등한 페루제 공작부인의 비아냥에 니나스 알도는 물러나야 했다.

그녀가 완전히 고객 응접실에서 사라지자 란델리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 생각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희와 연이 없는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니다. 아직 제대로 된 기반이 없을 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오히려 그것을 고려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모자는 훈훈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다정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곳에 같이 들어온 북부 부인들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이제 네가 어떤 의도로 라보 백작에게 선물을 주라고 했는지 말해 주거라. 궁금해서 다른 일에 집중하기 어렵구나.”

“알겠어요. 말할게요.”

란델리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 앉아 있는 어머니와 부인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장난꾸러기가 연상되는 웃음이 있었다.

그에게는 무슨 의도가 있는지는 몰라도 흥미진진할 일임을 알게 해줬다.

“라보 공작가문에서는 간식을 주지 않나 봐요. 여기 직원들을 괴롭히며 쿠키를 받으려고 하더라고요.”

“무슨 거지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과자를 받느냐 말이냐? 라보 공작가문도 명성에 비해서 실속이 없는 가문인가 보구나.”

“설마요. 라보 공작가문만의 뜻 깊은 가르침을 따른 것이겠죠.”

이곳의 직원들이 쉬쉬하며 넘어갔던 일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망신스럽게 말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라보 공작가문을 거지 취급했다.

거기다가 란델리노는 거지처럼 상대에게 들러붙어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 라보 공작가문의 가풍인 것처럼 몰았다.

라보 가문의 격을 떨어뜨리는 말들이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풋.”

“어머, 라보 공작가문에 그런 교육 철학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어요.”

“그러게요. 벨로나 백작님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아가네요.”

사교계에서 재미를 더해 줄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본성을 자극하는 내용이었으니까.

게다가 원래도 낮은 곳에 있는 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를 떨어뜨리는 것이 더 재미가 있다.

강자를 거꾸러트린다는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니면 라보 백작의 자질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수도 있고요.”

“그게 더 신빙성이 있겠구나. 공작가문인데 설마 그런 천박한 내용을 가르치겠니? 그것도 후계자에게?”

“그렇기는 해요.”

란델리노는 은근슬쩍 스튜어트 라보를 머저리로 만들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말을 동의했다.

스튜어트 라보는 공작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후계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녀는 결국 라보 공작가문과 그 후계자를 동시에 욕한 것이다.

스튜어트는 자질이 아주 많이 부족한 후계자였고 라보 공작가문은 후계자를 그따위로 키워 낸 무능한 가문이 되었다.

“저는 잘못을 하길래 막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잘했구나. 그런 추한 짓으로 귀족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은 막아야 마땅하지. 그런데 그것이 사과를 받지 않은 이유와 선물을 줘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은 알지?”

아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다시 확인한 페루제 공작부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면서 차를 마시려고 손을 대려고 했다.

“물론이에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잘못을 알려줘야 하잖아요.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랫사람이라고?”

찻잔에 대려는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곧 다시 찻잔을 가져와서 입에 댔다.

흥미로워하는 것이 미세하게 움직인 입가에서 느껴졌다.

“라보 백작이 저에게 먼저 다가왔고 자기소개도 했어요. 제가 윗사람이니까 그런 것이겠죠? 동등한 관계였다면 직원이 대신 소개를 해줬겠죠.”

북부 부인들의 표정이 굳었다.

밀침을 당했음에도 여유로웠던 란델리노다.

그 여유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라보 공작가문도 벨로나 공작가문도 같은 공작가문이다.

그런데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가 벨로나 공작가문의 후계자에게 먼저 다가간 것으로 부족해서 자기소개도 직접 했다고 한다.

이것은 벨로나 공작가문이 라보 공작가문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질 일이었다.

벨로나 백작과 라보 백작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판단과 언행으로 벨로나 공작가문은 라보 공작가문보다 더 격이 높게 되었다.

아니, 라보 공작가문은 평생을 안고 갈 조롱거리를 제공했다.

북부 부인들이 이곳을 나가자마자 수도 사교계에 이 일을 널리 알릴 것이니까.

라보 공작가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무슨 짓인데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상대를 짓밟은 것을 좋아할 줄 알았다.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눈빛은 그녀의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냈다.

한순간에 돌변한 표정은 아까와 지금의 페루제 공작부인이 동일인물인지 헷갈리게 했다.

그만큼 괴리감이 컸다.

“라보 공작가문은 만만한 가문이 아니야. 그런 가문과 척을 질 명분을 네가 주면 어쩌자는 것이냐? 적이 될 명분은 우리가 아니라 상대가 줘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불과해요.”

어머니가 무서울 법도 하건만 란델리노는 한결같았다.

여유로움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게 치부될지라도 나중은 모를 일이지.”

“라보 백작이 미래의 공작이니까요?”

“그래. 앙심을 품고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니까.”

북부 부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어렸을 때 일이지만 평생의 조롱거리가 될 일이다.

오랜 세월 받게 된 비꼼과 놀림에 열 받고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어머니, 그러니까 더 좋죠.”

“더 좋다고?”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서늘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라보 백작이 미래의 라보 공작이라면 저는 미래의 벨로나 공작이에요. 그가 공작이 될 때쯤에는 저도 공작이 되겠죠. 우리는 같은 또래니까요.”

“그래서?”

그는 라보 백작이 훗날 자신의 경쟁자가 될 것임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굳이 미래의 경쟁자를 적으로 만들 빌미를 만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것을 알면서도 행동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둔한 자는 옳고 그름을 볼 줄 모르니 인재가 모이기 힘들죠. 아둔해도 인품이 좋다면 인재들이 다가오겠지요. 그러나 라보 백작은 그런 인품을 갖추지 못함이 어린 나이에도 보여요.”

이곳은 사교계의 온갖 소문이 도는 곳이다.

지금은 직원들의 입단속을 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이 일이 퍼질 것이 뻔했다.

자연스럽게 평판이 나빠질 것은 자명했다.

자기 평판을 스스로 더럽히는 이유가 겨우 쿠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스튜어트 라보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투가 아까보다는 나아진 듯싶었다.

그러나 표정은 그대로여서 착각인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아둔함은 알기 쉬워요. 태어날 때보다 온갖 교육과 대우를 받았음에도 어머니를 만나고서야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저를 이기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자질 자체가 부족함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는 그런 녀석에게 제가 질 것 같습니까? 어머니가 직접 선택하고 기른 제가요? 어머니의 아들인 제가 그것밖에 안 되는 녀석입니까?”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물음에 질문으로 답했다.

당신의 안목을 그리 믿지 못하냐는 물음으로 말이다.

“어머니는 오히려 기뻐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예정된 승리를 가질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요.”

“예정된 승리라…….”

자신이 생각해도 란델리노는 뛰어났다.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노력을 성과로 만들 줄 알았다.

아까 멍청함을 한껏 드러냈던 꼬맹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생각해 보면 그딴 녀석이 공작 가문의 가주가 된다면 가세가 기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녀석과 란델리노가 싸운다면?

란델리노가 져 주지 않는 이상에는 승리은 확정된 일인 듯싶었다.

“하하하하하하.”

고객 응접실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한참을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 멍청한 녀석을 네가 이기지 못할 리가 없지.”

“역시 그렇죠? 저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게 해준 라보 공작가문과 그 후계자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 후계자를 그따위로 길러낸 라보 공작과 공작부인에게도 감사해야지. 그럼! 그러면 디자이너를 불러야겠구나.”

이 대화를 바로 곁에서 듣고 있던 부인들은 경악했다.

너무 놀라서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무엇을 들었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떤 아이가 저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를 완전히 진흙탕에 밀어 넣은 것과 같았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능한 후계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어서 오게나.”

“네? 네.”

“내가 지금 아들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거든.”

니나스 알도는 완전히 달라진 페루제 공작부인의 표정에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그 시간에 어떤 대화가 오갔길래 기분이 풀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 디자인 북에서 라보 백작이 입을 만한 옷들은 전부 만들어서 보내게.”

“네.”

게다가 거금을 들여서 많은 의상을 주문하지 않는가.

그것도 아까 란델리노를 밀었던 스튜어트에게 줄 선물로 말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라보 공작부인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한 벌 해서 보내게. 감사의 뜻을 담아서 보낸다고 꼭 말해 주고.”

“알겠습니다.”

“그대는 라보 공작가문에 어울리는 디자이너야!”

아까 격렬하게 대립하던 라보 공작부인에게도 선물을 보내는 연유는 의문스러웠다.

“그러면 이만 가 보겠네.”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죄송했습니다.”

“미안해하지 말게.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네. 아까도 말하기는 했지만, 자네만큼 라보 공작가문과 어울리는 디자이너는 없어.”

찜찜하고 뭔가 음습했지만 니나스 알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빠진 기분을 완전히 푼 공작부인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의상실을 나섰다.

그녀가 부인들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보냈다.

“나 때문에 그대들의 일을 보지 못했겠군요. 그대들의 귀한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서 미안한데 어쩌나?”

“어후, 아닙니다. 부인.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부인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거운 시간이에요.”

“불러줄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북부 부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미안해하는 말투와 얼굴에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인사하고는 마차에 탔다.

그들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몸이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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