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조롱당한 후계자 (3)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저는 란델리노 백작님께서 ‘거지’라고 말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저에게 거지라고 했다고요!”
“스튜어트! 조용히 좀 해!”
“어머니…….”
거짓을 말하여 일을 키우느니 진실을 말하고 당당한 것이 나았다.
직원의 말에 스튜어트가 손가락질하며 분노했다.
이에 라보 공작부인이 소리를 쳤다.
화가 나고 머리도 복잡한데 정신이 없게 만들어서 순간적으로 욱한 것이다.
그런 것을 모르는 스튜어트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시무룩해졌다.
라보 공작부인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스튜어트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벨로나 공작부인, 우리 저기 고객 응대실에서 이야기를 하죠.”
“왜요? 나는 이렇게 공개된 고객 대기실도 좋아요. 당당하니까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좋았다.
지금 이들의 대화를 들을 만한 부인들이 곁에 있었으니까.
자신에게 시비를 건 부인들과 방관한 부인들이 나가고 이곳에 온 부인들이었다.
그 부인 중에는 자신이 부른 북부의 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귀를 쫑긋거렸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말들을 사교계에 널리 알릴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과 상관이 없는 부인들도 말이다.
공작부인들 간의 싸움이 궁금해서 그들의 대화가 들리는 곳까지 대놓고 다가온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도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는 모습이 웃겼다.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요?”
“그러게요. 도대체 라보 영식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요?”
“글쎄, 벨로나 영식을 밀고 없는 말도 지어낸 모양이에요.”
“아까 막 손가락질까지 하더라니까요.”
“라보 영식이요?”
“그래요. 내가 봤다니까요.”
저 모습을 보아하니 이곳을 나가자마자 가벼운 입을 놀릴 것이다.
지금도 입이 간지러워서 나불거리고 있었으니까.
선임 직원이 진실을 말했든, 거짓을 말했든 상관이 없다.
그의 말 덕분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우위를 선점했다.
그녀가 웃으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이제 그만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뭐?”
“어머니, 저는 라보 백작을 만난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비록 저를 밀치는 무례를 저질렀지만요.”
갑작스러운 아들의 개입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작게 눈을 찌푸렸다가 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굳이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는 싸움을 포기하는지 모를 일이다.
“좋았던 만남을 이렇게 나쁘게 끝내고 싶지 않아요. 괜찮다면 화해의 뜻으로 이곳의 의상을 선물로 줘도 될까요? 라보 공작 가문과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거든요.”
“이곳의 의상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란델리노가 내뱉은 믿을 수 없는 말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이미 들은 말임에도 되물어 볼 정도로 말이다.
“네, 맞아요.”
“저 아이의 무례는 용서할 요량이니? 사과도 없이?”
“사과 받을 필요가 없어요.”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기르고 가르친 아들이라고는 믿어지질 않을 결정이었다.
가문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사과를 받는 것이 마땅했음이다.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던 아들이다.
자신이 이런 결정을 싫어할 것임을 확실히 알 만한 아이였다.
“저는 사과를 받지 않아도 괜찮거든요.”
“무례를 넘겨도 괜찮다? 자꾸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하는구나. 가문의 후계자가 당한 치욕은 가문의 치욕과 같다. 그것을 알면서 그러는 것이냐?”
그녀는 아들을 관찰했다.
그 눈빛은 집요했다.
머리부터 발까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란델리노는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자신을 보라는 표정이었다.
라보 공작가문의 아이가 자신을 밀쳤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아들이 보이는 미소는 다정함 그 자체였다.
어쩌면 자신의 계획이 차근차근 이뤄지는 것을 바라보는 여유로움일지도 모른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계산을 마쳤을 때였다.
“어머니, 잠시만 귀를 내밀어 주시겠어요?”
어머니의 냉엄한 얼굴에도 란델리노는 웃었다.
거기에는 장난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리를 굽히고 귀를 내밀었다.
그가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오직 어머니만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저는 스튜어트 라보 백작에게서 원하는 것을 거의 다 얻었거든요. 어머니가 선물만 주신다고 하면 완벽해져요.”
그녀가 아들을 사랑스럽게 봤다.
이 작은 아이가 얼마나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대되었다.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를 머리에 담고 있는지 짜릿함까지 느껴졌다.
몸을 돌린 그는 스튜어트 라보 백작을 향해서 걸었다.
그의 앞에까지 섰다.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너와의 만남이 좋았어. 고마워.”
“뭐? 뭐야?”
“뭐긴. 화해하자는 거지. 나는 다 이해해.”
란델리노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고 마음을 풀자는 의미가 뻔히 보였다.
스튜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이곳의 대부분은 이 싸움의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이일의 원인이 된 싸움의 진위를 아는 사람은 란델리노와 스튜어트 두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런 사람들의 관점에서 란델리노는 잘못을 저지른 상대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반대로 스튜어트는 자신의 잘못을 포용하려는 상대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해줬다.
고집만 세고 어리석은 이의 전형이었다.
“아이가 이렇게 원하니 이 일은 이대로 넘어가죠.”
“좋습니다.”
활짝 웃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비로운 얼굴로 말했다.
라보 공작부인은 여기서는 물러서야 함을 알았다.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무례를 저지른 것이 실제로는 란델리노라고 해도 말이다.
직원의 말도 있고 상황은 아들인 스튜어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스튜어트, 친구가 화해하자고 하잖니? 얼른 악수하렴.”
“그렇지만!”
“어서!”
스튜어트는 싫었다.
화해하기 싫었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사특한 녀석과 친하게 지내기 싫었다.
그러나 어려도 알았다.
눈치는 있었다.
지금 자신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한심한 눈길로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잡았다.
“여기 손.”
“앞으로 잘 지내자.”
“그래.”
란델리노가 다가와서 포옹까지 하며 호의를 비췄다.
딱 봐도 억지로 화해하는 스튜어트와 비교가 되었다.
“라보 공작부인, 불미스러운 일로 서로 만나게 되었으나 저는 라보 공작 가문과 잘 지냈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보 공작부인!”
라보 공작부인이 인사를 하고는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나섰다.
니나스 알도의 인사는 무시한 것을 보면 기분이 상해도 단단히 상했다.
그 분함을 겨우 참으며 나서는 것이 걸음걸이에서 느껴졌다.
“그러면 이제 내 차례인가? 응접실로 들어가면 되는가?”
“아, 물론입니다.”
니나스 알도는 눈앞의 공작부인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확실하게 느꼈다.
이렇게 얼굴을 붉히고 사교계에서 화두가 될 일을 남들 앞에서 선보였음에도 단단했다.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자네들도 들어가지. 바쁜 사람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바쁘신 시간을 빼서 저희를 불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요. 부인께 부름을 받을 수 있다니 이런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달려가야죠.”
북부의 부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라서 고객응접실로 들어갔다.
“한동안은 로테 후작부인은 부르지 않을 생각이에요.”
“예? 장미회에 가입했으면 할 정도로 총애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가입할 줄 알았습니다.”
부인들은 놀라며 그녀에게 물었다.
장미회 회원인 부인들이 반대해도 언젠가는 로테 후작부인이 장미회에 들어올 것이리라고 생각한 부인들이 꽤 되었다.
“로테 후작부인이 이곳을 추천해 줘서 왔는데 직원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나, 손님이라는 부인들은 나에게 시비를 걸더군요. 설마 부인들이 이곳의 단골인 것은 아니지요?”
“어휴, 그럼요. 저도 지인이 추천하여 한 번 와 본 것이 전부입니다. 손님과 직원을 보면 그 수준을 안다고 하던데 여기 수준 이하더라고요.”
“저는 북부에만 있다가 보니 안목이 부족했습니다. 부인 덕분에 이렇게 하나를 깨달았어요.”
“오늘이 저의 첫 방문이자 마지막 방문이겠네요.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네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북부 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그들은 수도에만 오면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 가서 화려한 드레스를 여러 벌 구입했다.
수도에 올 때마다 오는 단골이다.
이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주인인 니나스 알도 앞에서 뻔뻔하게 단골임을 부정하며 이곳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뭐,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이곳의 주인 앞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니까.”
“흠흠…….”
자신들이 너무했음을 인지한 부인들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부하는데 빠져서 이렇게 민망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곳의 주인 앞에서 대놓고 이곳 욕을 하다니 자신들이 생각해도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라보 백작의 의상부터 맞춰야겠군. 선물용으로 말이지. 디자인 북 가져오게.”
“네, 알겠습니다.”
니나스 알도는 알았다.
공작부인이 자신의 사과를 무시하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사과를 제발 받아달라고 질척거리면 더 화를 낼 성정인 듯싶었다.
차라리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고 판단이 되는 2—3일 뒤에 정식으로 찾아뵙고 사과를 하는 것이 더 나았다.
“저 이 디자인에 관해 설명하자면…….”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에 관해 설명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디자인 북에 향해 있었다.
그녀가 디자인 북을 집어서는 펼쳤다.
“나는 그대의 설명보다 나의 눈을 더 믿는 편이네. 내가 결정할 때까지 가만히 있게.”
“네, 알겠습니다.”
알펜 왕국 수도의 최고 디자이너를 평가절하하는 언행이었다.
도대체 직원들이 어떤 짓을 어떻게 했고 이곳에 온 부인들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아주 상세하게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면 이럴까 싶었다.
아까는 공작부인들을 중재하는 것에 급급했다.
그래서 자신이 라보 공작부인을 응대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대략적인 설명만 들은 것이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그녀가 우아하게 디자인 북의 그림을 넘겼다.
“란델리노, 너에게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사람은 말해 주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단다.”
시선은 그대로였다.
란델리노가 아닌 디자인 북을 향하고 있었다.
“왜 사과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니? 그리고 선물은 왜 줬으면 한 것이고?”
우아한 자태였다.
그녀는 무심하게 물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궁금해서 폴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북부 부인들의 눈이 란델리노에게 집중되었다.
솔직히 아까 전의 상황을 지켜본 그들이 보기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의를 가진 상대를 받아줄 만한 포용력을 지녔다고 칭찬할 수 있다.
동시에 자기 권위도 지킬 줄 모르는 이라고 뒷말이 나오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