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조롱당한 후계자 (2)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에 씩씩대고 있는 머저리가 보였다.
자신의 아들을 민 범인임을 알 만한 모습이었다.
란델리노는 때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여기는 어린 손님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나 보군.”
“죄송합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프런트 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란델리노는 다가오는 어머니를 보고 슬쩍 웃었다가 바로 숨겼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딱딱 맞게 행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일이니? 이 아이는 누구고?”
“어머니, 스튜어트 라보 백작이에요.”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가 어찌 벨로나 공작가문의 후계자를 밀었을까?”
그녀의 시선이 스튜어트에게 향했다.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듯한 눈빛이었다.
실제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견디기에는 너무 강한 기세였다.
벨로나 공작부인이 무서운 사람이라고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섭다고 아무리 말해도 실제로 보지 않으면 감이 잘 오지 않는 법이다.
스튜어트는 눈앞의 여인이 무서워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밀기까지 한단 말이냐?”
표정에서부터 스튜어트를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나, 나를 거지라고 했습니다.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인 나를 모욕했어요.”
“거지라고? 란델리노 네가 정녕 스튜어트 백작을 거지라고 했느냐?”
페루제 공작부인의 서슬퍼런 눈빛이 란델리노를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타 가문의 후계자를 거지라고 한 것은 엄청난 무례였다.
살벌한 어머니가 앞에 있음에도 그는 의연했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여유를 보여줬다.
“글쎄요. 스튜어트 백작의 잘못을 말한 것이 잘못이겠죠.”
“잘못을 말한 것이 잘못이다?”
스튜어트는 불안했다.
그동안 자신이 여기서 했던 일들이 알려질 것 같았다.
그의 걱정이 허무할 정도로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가 했던 일들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스튜어트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가 아니었다.
상대의 가문을 알았음에도 밀쳤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또한 무례를 저지른 상대가 란델리노가 아니라 스튜어트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문의 무게조차 모르는 꼬맹이가 하는 말은 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제가 벨로나 공작가문의 후계자임을 알면서 밀 만큼이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랐다.
어느 가문의 후계자임을 알면서도 그따위 짓을 했다고 한다.
화를 내야 마땅한 일이었다.
“네가 누군지 몰랐다고 하여도 상대를 갑자기 넘어뜨리는 짓은 몰상식한 짓이다. 하물며 네가 누군지 알았는데도 무례하게 굴다니! 이것이 벨로나 공작가문을 무시한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아까도, 아까도…….”
스튜어트는 자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라고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스튜어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는 황당함과 언짢음이 섞여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돌려서 그 상대를 쳐다봤다.
적금발의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라보 공작부인이었다.
“스튜어트, 괜찮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는 얼른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한 후,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주었다.
스튜어트는 어머니가 등장하기 전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떠올랐다.
괜히 서러웠다.
“어머니, 그게… 흑… 으아앙!!!”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 서럽게 우니?”
라보 공작부인은 아들을 안으며 토닥거렸다.
그리고 아들의 울음이 좀 멈추자 몸을 돌렸다.
“도대체 그대는 누구인데 내 아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누구인지는 그대 아들에게 들으시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그대 아들에게 들으시고요.”
라보 공작부인과 벨로나 공작부인 간의 대립.
이것은 단순히 두 부인 간의 대립으로 볼 수 없었다.
자칫 가문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벨로나 공작은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부인이 누군가에게 당할 여인도 아니었고 당하기라도 한다면 그에게 좋은 일이었다.
“얘야. 네 어미에게 내가 누군지 소개하렴.”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라보 공작부인은 화가 났다.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페루제 공작부인은 담담했다.
“무슨 짓이냐니요? 저 아이가 제가 누군지 아니까 소개하라고 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그대의 아이가 그대가 누군지 소개를 해야겠군요.”
자신을 먼저 소개하거나 상대를 소개시켜 주는 일은 아랫사람이 하는 것이다.
라보 공작가문의 후계자는 미래의 가주다.
지금 예비 공작을 아랫사람 취급한 것이다.
이것은 라보 공작가문을 무시한 것과 같았다
“호호호, 여기 이분은 벨로나 공작부인이십니다.”
“…….”
“…….”
“벨로나 공작부인, 아시겠지만 라보 공작부인이십니다.”
니나스 알도는 친절하게 웃으면서 중재를 맡으려고 나섰다.
침착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직전이었다.
프런트 직원에게 들었던 일도 경악할 일이었다.
그런데 공작가문의 영식 간의 일도 경악하고도 남을 일었다.
왜 하필 자신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희 직원들이 무지하여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을 철저히 시키겠습니다.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사과의 뜻으로…….”
“직원 관리 소홀? 지금 나를 조롱하고 무시한 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하다니 참으로 위세가 대단하군.”
니나스 알도는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양쪽 부인들에게 사과를 전하며 이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았다.
특히 검은색 머리결의 아름다운 공작부인은 눈빛만으로 자신을 죽일 것처럼 쏘아봤다.
“설마 그대의 드레스를 줄 것이니 기분 풀라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 벨로나 공작가문이 거지도 아니고 그딴 거 받고 좋아할 것 같나?”
“맞아요. 지금 그대가 그런 걸로 이 일을 무마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라보 공작가문을 무시하는 것임을 아나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반응에 자극을 받은 라보 공작부인도 공격적으로 나왔다.
라보 공작부인은 니나스 알도의 드레스를 받고 깔끔하게 끝낼 용의도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까칠하게 나서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게다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을 듣고 보니까 화가 났다.
자신이 거지도 아니도 그거 받고 이 일을 묻으라고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과 라보 공작가문을 무시해도 유분수였다.
“거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최고급 드레스를 사과의 뜻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어찌 저의 진심을 이리도 몰라주십니까. 제발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부인들.”
니나스 알도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러나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여서 그 모습을 감췄다.
모두가 자신의 의상을 입기를 바랐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니나스 알도가 만든 의상을 입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고도 많았다.
지금 자신의 드레스를 무료로 받을 기회를 줬다.
누구라도 화를 풀고 기쁘게 의상을 받을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거지 취급했다고 도리어 화를 내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디자이너의 자존심을 세게 긁었다.
“이 사람 웃기는 사람이네?”
“에?”
비웃음이 담긴 말투였다.
니나스 알도는 당혹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세웠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지 모른다.
“그대의 드레스가 공작가문의 명예와 동급이라고 생각하는가? 감히 그대가 만든 의상이 오랜 역사와 명성을 쌓아온 벨로나 가문과 같다고 말이야?”
“자네 지금 자네 의상이 라보 공작가문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워낙 구구절절 맞는 것처럼 들리는 말만 하는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라보 공작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그녀의 말에 말려들었다.
라보 공작부인은 니나스 알도의 편을 들고 이 일을 빨리 끝내는 것이 나았음을 몰랐다.
“그것이 아닙니다. 불쾌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졸지에 공작가문을 하나도 아니라 두 가문이나 모욕한 것처럼 되었다.
여기서 말을 더해 봤자 변명이고 트집거리만 될 뿐이었다.
“그대의 무례는 이따가 이야기하기로 하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라보 공작부인.”
“그래요.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있지요. 페루제 공작부인.”
페루제 공작부인과 라보 공작부인이 팽팽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라보 공작부인은 화가 잔뜩 나 있는 얼굴이었다.
반면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벨로나 공작부인, 도대체 내 아들을 무슨 이유로 위협하고 있었습니까?”
“아드님이 내 아들을 이유도 없이 밀쳤습니다.”
“밀쳤다고요? 스튜어트, 그 말이 정말이니?”
당혹스러워하며 라보 공작부인이 스튜어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스튜어트는 갑자기 자신에게 어머니가 말을 걸자, 순간 몸이 굳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굳어만 있다면 억울한 일을 당할지 몰랐다.
“그, 그게 저를 거지라고 불렀어요.”
“거지?! 어떻게 공작가문의 후계자를 거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죠? 도대체 아이 교육을 어떻게 한 것인가요!”
라보 공작부인이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화냈다.
그 분노 어린 모습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내 아들은 다르게 말하더군요.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한 것에 화를 냈다고요.”
“잘못이라니요? 내 아들이 여기서 잘못을 하면 얼마나 잘못했다고 거지라는 말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 아이의 말이 맞기는 하나요? 제 아들이 거지라고 말했다는 것이 거짓일 수 있잖아요.”
“내 아들이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고요! 어쩜 그리 못되게 말할 수 있죠?”
“사실여부를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거기.”
그녀가 아까 란델리노, 스튜어트와 같이 있던 선임 직원을 불렀다.
그가 목 뒤에 흐르는 땀을 얼른 닦고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에. 부인.”
“아까 곁에 있었던 것을 보았네. 내 아들이 그에게 거지라고 했는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물음에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솔직하게 거지라는 말을 대답하는 것이 맞기는 했다.
그런데 자신이 봤던 벨로나 백작의 영악했다.
그 간사함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거지라는 말을 했을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그게 말입니다…….”
그가 머뭇거리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어서 말하게. 설마 누군가에게 보복이라도 당할까 싶어서 그런가? 그러면 걱정하지 말게. 내가 보호해 주지.”
“핫! 그게 무슨 헛소리죠. 머뭇거린다면 적어도 우리 가문 때문은 아니죠. 자네는 걱정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게. 누군가가 그대를 위협한다면 라보 공작가문에서 보호해 주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발끈한 라보 공작부인이 말을 더했다.
선임직원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상대의 가문이 무서워서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기 충분한 상황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유리한 말을 해도 라보 공작부인에게 유리한 말을 해도 서로 순순히 납득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을 들들 볶을 것이다.
진실을 말하라고 말이다.
진실을 말해도 거짓을 말해도 어느 한쪽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