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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04화 (104/221)

104화 조롱당한 후계자 (1)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에게 시비를 건 부인들과 대치하는 동안에 란델리노는 니나스 알도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돌아다녔다.

넓은 내부에는 여러 방들이 있었다.

무리를 지어온 부인들을 위한 방들도 있었다.

단지 일반적인 방과 차이가 있다면 개방된 공간이었기에 따로 문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놀려는 맹수처럼 보였다.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왜 눈에 보이지 않을까? 피나가 분명히 오늘 예약이 잡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는데 말이야.”

아그리피나에게 자신이 찾는 인물이 언제쯤 이곳에 오는지 알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예약된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고 마침 어머니가 가자고 한 날과 일치했다.

게다가 상대는 디자이너와 이야기 나누느라 시간을 끌고 있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었다.

“만약 시간이나 날짜 어느 것 하나도 맞지 않았다면 어머니에게 다른 날에 가자고 말해야 했겠지.”

그는 곧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다.

뭔가 오만한 자세로 있는 아이와 난처해하는 직원이 보였다.

점점 그쪽으로 다가가니 그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이게 뭐야! 나는 이거 말고 다른 것을 달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영식.”

“죄송하다고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니까!”

란델리노 또래의 아이가 직원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신입 직원이 실수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이 쿠키가 싫다고! 내가 오면 이거 말고 다른 쿠키 준비해 놓으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다시 사과해.”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직원이 다가와서 같이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모두가 그 아이의 행동을 바라봤다.

바라만 봤다.

란델리노는 어머니가 있는 쪽을 잠시 바라봤다.

“아무리 정해진 거리 안에서만 소리가 들리는 방음 마법을 걸었다고 해도 너무 조심성이 없군.”

고객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정해진 구역의 일정거리 밖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했다.

아이는 영악하게 고객을 위한 마법을 이용했다.

방음마법을 사용하면 자신의 행동이 어머니에게 들리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선임으로 보이는 직원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주 경험하는 일인 듯싶었다.

난처하고 죄송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표정만 그렇지 행동은 아니었다.

의연했다.

란델리노는 주변의 직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냈다.

‘또 진상이 왔네’라는 짜증이었다.

“의연한 것이 아니라 거의 마법처럼 자동으로 나오는 태도네.”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게 되면 그에 관한 대응은 그냥 바로 나온다고 한다.

란델리노도 하도 학대를 당하여 생긴 버릇이 있다.

누군가가 팔을 들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바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드는 습관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아서 힘들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후계자가 공포에 떨며 팔로 몸을 보호하는 모양새라니… 씁쓸함에 비소가 나왔다.

스스로에 관한 빈정거림이었다.

“얼마나 자주 이렇게 난리를 쳤으면 저러는 것일까?”

선임 직원은 은근슬쩍 손을 뒤로 손을 움직였다.

다른 직원들이 괜한 화풀이를 당할까 싶어서 피신을 시켰다.

저 직원들도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 근처를 벗어났다.

진상에게 걸린 신입직원과 이를 수습하는 선임직원만 남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비싼 쿠키입니다. 이따가 돌아가실 때에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뭐, 너희가 그리 말한다면 이번 한 번만 봐주지.”

선심을 쓰듯이 말하는 아이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아하, 왜 저리 소리를 쳤는지 알겠군.”

아이의 저급한 의도가 웃겼다.

정말 꿈속의 그와 지금의 그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하찮았다.

그러면 이제 등장을 해 볼까?

“매번 그렇게 쿠키를 받는구나?”

“너는 뭐야?!”

갑작스러운 란델리노의 등장에 직원들도 그 아이도 당혹스러웠다.

조용하며 우아함이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아이가 하기에는 묘하게 무서울 정도로 완성도가 있었다.

“그 마음 이해해. 너는 더 먹고 싶을 것인데 집에서는 더 주지는 않지.”

“야! 너 뭐냐니까!”

“우리는 아직 어려서 따로 용돈을 받는 것도 아니니까.”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정해진 간식과 정량만 먹게 했다.

군것질하고 싶은 아이에게는 그것은 곤욕이었다.

시녀나 시종이 사도록 명령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곧 부모님의 귀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단순히 화가 나서 여기서 화를 냈겠지. 그치? 그런 너를 진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직원들이 쿠키를 줬을 것이고 말이야.”

“너 왜 자꾸 내말을 무시해!”

“너희 어머니도 여기서 받은 쿠키를 먹는 것에 대해서 따로 뭐라고 하지 않았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아이가 화를 내며 란델리노에게 다가갔다.

이를 지켜보던 선임 직원이 정신을 차렸다.

아이 같지 않은 아이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홀린 것이다.

“여기 방음마법도 되니까… 너희 어머니는 단순히 여기서 쿠키를 줬구나 했겠지. 네가 이렇게 굴어서 받은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영식, 그만하시지요. 이분이 누구인지 알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그 직원은 신입직원을 얼른 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진상 꼬마의 관심이 이 처음 본 어린 소년에게 향했으나 언제 다시 신입직원을 괴롭힐지 모를 일이었다.

신입을 자신의 뒤에 세우고 보호했다.

“나중에 어떻게 뒷감당을 하시려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이제는 저 뉴페이스 소년을 구해야 할 차례다.

이대로 뒀다가는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나선 죄로 호되게 당할 것 같았다.

“맞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바로 스튜어드 라보야. 라보 공작가문의 장남이라고!”

스튜어트는 자꾸 자신의 말을 씹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라보 공작가문의 장남인 것을 알게 되면 태도가 변할 것이 분명했다.

직원도 스튜어트도 란델리노가 이름이 없는 집안의 아이라고 여겼다.

직원은 수도의 모든 귀부인들이 온다는 이곳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였기에 그리 판단했다.

스튜어트는 왕족과 같은 공작가문의 아이들을 모두 만나 봤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벨로나 공작가문에 적통 아이가 있다고 듣기는 했다.

동시에 그가 곧 쫓겨날 것이라고 어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아쉽게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등장과 란델리노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정치적인 흐름이나 변화보다 노는 것이 더 좋았으니까.

란델리노가 귀족적인 예법을 구사하며 인사했다.

“아? 그렇구나. 알았어요. 반갑습니다. 스튜어트 라보 백작.”

“백작?”

“예우경칭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예우경칭은 백작가문 이상의 가문들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 가문의 후계자를 가문의 작위보다 1, 2단계 낮춰서 부르는 것이었다.

알펜 왕국에서 이 예우경칭은 사라져 가는 문화였다.

어차피 동일하게 ‘영식’이라는 호칭으로 불려도 가문의 힘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까.

굳이 예우경칭을 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예우경칭을 따르는 것을 선호했다.

권위와 위계질서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알지! 나를 뭐로 보고!”

“그렇지요.”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예우경칭을 아는 것이 더 이상했다.

스튜어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했다.

상대도 자신의 또래인데 자신만 모르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음이다.

이곳에서 남아 있던 직원은 란델리노가 스튜어트보다 훨씬 질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튜어트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그를 놀리고 있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마치 아기에게 ‘우르르 까꿍’하며 놀아주는 것처럼 굴었다.

물론 그가 란델리노가 질이 나쁘다고 생각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 내 소개를 했으니까 너도 이제 네가 누군지 말해.”

“그럼요. 제 소개를 해야죠.”

귀족 사회에서 소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다가와서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

윗사람은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며 우아하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같은 위치에 있는 상대끼리는 아랫사람이 중간에 나서서 서로를 소개시켜 준다.

예법에 따르면 직원이 란델리노에게 스튜어트 라보를 소개해 주는 것이 맞았다.

스튜어트와 란델리노는 공작가문의 자제로 동등한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스튜어트 라보는 란델리노에게 먼저 다가갔으며 본의 아니게 자기소개도 먼저 했다.

명백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모습을 전부 선보인 것이다.

직원은 란델리노가 보통 집안의 아이가 아님을 알아챘다.

일반적인 평범한 가문, 아니 좀 떨어지는 가문의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는 란델리노 벨로나 백작이라고 합니다.”

“벨로나 백작? 설마?”

“네. 생각하시는 것처럼 제 아버지가 벨로나 공작이십니다.”

다수도 사교계의 연관이 되어 있는 직업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사교계의 화제도 알게 된다.

페루제 루비로즈.

지금은 페루제 벨로나 공작부인인 여인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하도 부인들이 언급해서 외울 정도였다.

순식간에 생각을 마친 직원이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아까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제가 스튜어트 백작에게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봐 그런 것을 알아요.”

란델리노의 말투는 자비롭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직원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한 말을 담고 있는 듯했다.

여러모로 스튜어트와 비교가 되었다.

“흠흠, 벨로나 백작. 아까는 본의 아니게 실수를 했네.”

“아닙니다.”

스튜어트는 짜증이 났다.

이러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없었으니까.

자신보다 아래도 아닌 상대에게 멋대로 굴었다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크게 혼날 것이다.

또한 이 일은 단순히 직원들에게 화를 낸 것과 달랐다.

공작가문의 자제들끼리 부딪힌 일이다.

자칫하면 가문 간의 문제로 커질 수 있었다.

스튜어트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부모님에게 혼날 것이 걱정되어서 란델리노와 생긴 일을 잘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어머니를 속이고 쿠키를 얻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여겨서 참견을 했습니다. 저야말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물론 이해하지. 나는 그릇이 크니까.”

선임 직원은 스튜어트가 한심했다.

자신의 잘못을 언급하며 조롱하는 란델리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는 뒤의 신입을 힐끔 바라봤다.

신입 입단속을 해야겠다 싶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라보 공작가문의 입장에서 망신이었다.

명색이 가문의 후계자라는 아이가 자신이 조롱당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비웃음사기 딱 좋았다.

아무리 그 후계자가 어려도 말이다.

만약 그리 된다면 라보 공작부인은 심기가 불편해질 것이고 이곳에 발걸음을 끊을 것이다.

이곳의 최대 고객인 라보 공작부인의 심기를 거스르면 매출에 큰 타격을 받는다.

란델리노가 스튜어트에게 다가와서 뭐라고 귓속말했다.

그 소리가 작아서 선임 직원은 듣지 못했다.

“네가 거지처럼 쿠키를 받으려고 악쓰는 모습 잘 봤어.”

“뭐야!”

스튜어트는 화가 났다.

자신을 거지라며 모욕했으니까.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란델리노를 밀어 버렸다.

그리고 밀침을 당한 란델리노를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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