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이혼의 시대
시녀장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생각하지 못한 말을 들은 얼굴이었다.
“선물을 받은 시점에서 그녀에게 그림을 더 그리게 하는 것은 과하잖아. 그렇다고 이것을 주면 거절할 것이 뻔하고.”
당연했다.
딸의 인생을 구해 준 은인을 위해서 그림을 2개 그리는 것이 대수겠는가.
100개라도 그려 줄 수 있었다.
“그림을 의뢰한 것으로 하고 그 대금을 그대에게 주는 것이야. 화가에게 줘. 화가는 의뢰에 대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해. 그것이 수습과 다른 점이지.”
“부인…….”
“나의 의뢰를 받은 화가로 경력을 쌓게 되었으니 좀 수월하게 화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겠지.”
그녀가 아르테를 존중하는 듯한 말투에서 하대로 바뀐 이유였다.
자신은 의뢰인이고 그녀는 고용된 화가다.
그 관계가 명확하게 상하관계가 되었음을 말투로 표현한 것이었다.
돈주머니를 받고 방을 나온 시녀장은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몹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자신이 했던 생각에 너무 죄송스러웠다.
자신의 딸을 구해 준 것으로도 충분한데 딸의 미래까지 챙겨 주셨다.
은혜를 입은 후에도 했던 생각이 더 강해졌다.
이런 분을 ‘부인’이 아닌 ‘손님’으로 대우하라고 한 공작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부인의 배려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절대로 부인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시녀장이 공작의 명령을 어기고 그녀가 최대한 안주인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시녀장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라파엘로에게 그리라고 해야지. 요즘 오만방자하게 군다니까 언제든 너를 대체할 화가는 많음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어.”
라파엘로는 라스타 왕국에서 천재로 불리는 화가였다.
원래도 천재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페루제 루비로즈의 선택까지 받으니 그 오만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들었다.
그 오만함을 넘어갈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기에 알펜 왕국에 데려왔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자신의 후광을 믿고 날뛴다면 더는 넘어가 줄 수 없었다.
“그 자존심에 걸작을 그려내겠지. 자신을 대신할 존재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자신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행동을 조심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자신을 대체할 존재는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악을 쓰고 걸작을 그리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르테에게 그림을 그리게 함으로 시녀장의 충성을 얻었으며 천재 화가의 걸작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잔인한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피해자를 끝까지 챙기는 다정한 여인으로 탈바꿈시켰다.
곧 이 일에 대한 소식은 아주 빠르게 퍼질 것이니까.
* * *
신전이 ‘이혼의 자유’를 선언했다.
여러 기사에서는 결혼은 신성한 것이라느니, 신전의 변절이라느니, 여인들이 정절을 잃고 천박해질 것이라느니 하면서 반대하는 내용을 쏟아냈다.
“어떻게 신전이 이럴 수 있어.”
“그러게. 순결을 지켜야 할 신전이 타락했음이야.”
“순고한 결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을 지지하다니 충격이네.”
기사를 읽는 사람 중 대다수가 그 내용에 동의했다.
“이혼하려는 사람들이 없겠죠?”
“없겠지. 그동안 이혼은 죄악이라며 거부했잖아. 고위귀족이나 왕족들도 특별한 경우에 이혼시켜 주고 말이야.”
“맞아요. ‘이혼의 자유’를 선언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에요.”
신전은 여유로웠다.
‘이혼의 자유’를 인정했을지라도 사람들이 몰리지 않으리라.
결혼은 순고하고 이혼은 죄라는 인식을 깨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자, 이제 신전의 문을 열어 볼까?”
“그럴까요. 그런데 아까부터 밖에 무슨 일이 있을까요? 좀 시끄러운 것 같아서요.”
“뭐, 상단에서 이벤트라도 하겠지.”
“역시 그렇겠죠. 그러면 가 볼까요? 저기서 뭣들 하는 걸까요?”
“왜 하급 신관들이 몰려와서 밖을 보고 있지? 이봐!”
하급 신관들이 문을 여는 역할을 하는 중급 신관들을 보고 허리를 숙였다.
“어서 말하게. 무슨 일인가?”
“밖을 보시지요.”
“밖을?”
하급 신관의 말에 중급 신관들이 밖을 쳐다봤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저게 무슨 모습입니까?”
“그, 그러게…….”
수많은 사람이 신전 앞에 있었다.
신전에 들어가려고 대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길을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신관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거 열어야 하나요?”
“열어야지. 시간이 되었잖아.”
여기서 신전의 문을 여는 순간, 이곳은 순식간에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전이 곧 지옥이 될지라도 열어야 했다.
신도가 많다고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역시 열어야겠죠?”
“그래.”
그들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신전의 문을 열었다.
문이 다 열리고 사람들이 파도가 일듯이 들어왔다.
모두가 향한 곳은 하나였다.
신 ‘에클레시아’의 권속이자 ‘가정의 평화’를 담당하는 천사인 ‘헤라’라는 표시된 곳이었다.
‘헤라의 문’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이혼소송, 이혼합의, 이혼상담이라고 나눠진 자리에 신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기 이혼 신청이요!”
“저요! 얼른 이혼하도록 해주세요!”
“어서 이혼 절차를 진행해 주세요!”
이혼을 격렬하게 원하는 여인과 사내가 신전에 들어와서 크게 소리쳤다.
소리가 크면 먼저 처리해 주는 것도 아님에도 말이다.
신관의 옷자락을 잡으며 애원하는 것은 덤이다.
“절대로 이혼해 줄 수 없습니다!”
“이혼 거부를 위해 소송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 마음대로 이혼이야!”
이혼을 거부하는 배우자들도 난리가 났다.
이혼을 거부하며 신관 멱살을 잡았다.
신관에게 멱살을 잡는다는 것은 신을 멱살을 잡는 것과 같은 죄였다.
“진정하세요!”
“번호표에 적힌 순서대로 처리할 것입니다!”
“번호표부터 받으세요!”
그러나 지금 이혼에 눈 돌아간 배우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기세에 눌린 신관들은 뭐라고 할 정신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상대적으로 조금 여유로운 신관들이 있었다.
‘이혼상담’을 담당하는 신관들이었다.
사람들이 바로 이혼을 향해 가는 덕분이었다.
‘이혼상담’에 자리잡은 신관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 작게 속삭였다.
“이혼소송으로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 편하지만 다음 달에는 우리가 이혼소송이라고. 이혼 합의도 만만치 않은데? 멱살 잡히고 쌍욕 듣고 말이야. 진정된 후에는 이혼 거부하고 소송 쪽으로 향하잖아.”
“아씨, 괜히 로테이션으로 하자고 했어. 고정으로 하자고 말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러게. 야, 그만 이야기하자. 우리 쪽으로도 사람들이 몰린다.”
“그래.”
신관들이 다정하고 순수한 것처럼 보이는 미소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신도님.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나요?”
“이혼 관련해서 문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그러시군요. 어떤 것을 알려드릴까요?”
“이혼에 관해서는 전부요.”
“네? 전부요?”
“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요.”
이혼상담에 있던 신관은 깨달았다.
이혼상담도 지옥이 열렸다.
하나부터 열까지라니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달라는 것이니까.
“일단 합의이혼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신전에서 발급한 협의 이혼 의사 확인서 1통, 이혼신고서 1통, 혼인관계증명서 1통이 필요합니다. 행정청에 가셔서 신분증명서를 가져오셔야 하고요. 참고로 신전에서 서류발급비용은 여기 종이에 적혀 있습니다.”
이혼을 위한 서류발급비용.
이것은 순전히 신전의 수익이 된다.
이것만 가지고도 어마어마할 것은 지금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이 아빠가 저와 아이들을 때리는 사람이에요.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나가고 싶은데 먹고 살길이 막막하네요.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한정적이고 벌이도 적으니까요.”
“이혼소송을 통해서 이혼과 함께 양육비를 배우자에게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양육비를 주지 않을 때는요?”
“양육비를 줄 여력이 있음에도 거부할 때를 대비하여 헤라님의 은총을 내려서 이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신성력은 에클레시아 밑에서 그를 보좌한다는 천사들의 권능에 따라 능력이 나눠진다.
헤라는 ‘가정의 평화’를 담당하는 천사로 그의 권능을 사용한다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함이리라.
‘가정의 평화’를 위한 조건에 한하여 인간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일종의 신벌로 고통을 받게 된다.
아내는 무조건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으로 널리 퍼진 시대였다.
이로 인해 형식적인 권능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부당함을 참는 여인들이 대부분이라서 거의 쓸 일이 없었다.
“신께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인간이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죠. 그것을 이용해서 일부러 뒤에서 돈을 빼돌리고 없는 척을 하는 것들도 있겠죠.”
“그렇죠.”
“그럴 때는 바로 ‘양육비 지급명령’을 신청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신관이 파견 나와서 조사를 하고 돈을 징수하여 부인께 드릴 것입니다. 신청 비용은 여기 적혀 있습니다.”
그녀는 ‘양육비 지급명령’의 비용을 집중하며 바라봤다.
“신전은 언제나 약자의 편입니다.”
“감사합니다.”
신관의 온화한 웃음에 여인이 감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재산 분할과 관련된 상담은 특수 상담으로 추가 비용이 필요합니다.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건 생각해 보고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신관은 여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상담 비용 부탁드립니다.”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신도님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10시부터 시작된 이혼관련 업무는 19시가 되자 끝났다.
“헤라의 문을 닫습니다. 이만 나가 주십시오.”
“헤라의 문을 닫아야 하오니 ‘헤라의 방’에 계신 신도님들은 나가 주십시오.”
이혼을 위해 남아 있던 사람들이 항의했으나 신관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몇 시간을 여기서 기다렸는데 나가라니요!”
“저희까지는 처리해 주시지요!”
“나가세요. 신전기사를 부르기 전에요.”
신전기사는 신전에서 육성한 기사였다.
과거에는 이단 종교 세력을 받기 위한 기사였으나 지금은 신전의 안전과 신전 주변 치안을 위해 존재했다.
“나. 가. 시. 라. 고. 요.”
“네”
신관은 피곤했다.
지금 진상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짜증과 살기까지 느껴지는 말투였기 때문일까?
항의하던 신도들이 빠르게 ‘헤라의 방’을 나갔다.
“피곤하다.”
“몸 전체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야.”
“멱살을 잡던 손힘이 어찌나 세던지 신전기사가 떼는데 고생했잖아.”
“진짜 체력도 좋아.”
신관들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피로한 만큼 하나는 확실했다.
“신전이 돈을 쓸어 모으겠네요.”
“그치? 신전을 욕하는 기사로 도배가 된 지금도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데 말이에요.”
‘이혼’을 통해서 알차게 돈을 벌 것이 눈에 보였다.
이렇게 이혼에 적극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 *
속이 시원한 표정으로 신전을 나온 한 부인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그래. 성서에 나온 내용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남편이 아내를 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런 기본도 못하는 놈에게 순종하며 살 이유는 없지.”
아르테 젠탈레스키 사건의 재판장에서 페루제 루비로즈가 인용한 ‘성서의 내용’은 수도 전체에 금방 퍼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동안 침묵했던 여성들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대해적.
아니다.
대이혼 시대가 열린 것이다.
* * *
그녀는 아르테 젠탈레스키 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대법관을 통한 왕권 강화를 막았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정의를 위해서 움직인 여인으로 만들었다.
이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서 신전의 자금력을 도왔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한가지의 일로 3가지의 이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