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초상화의 의미
“아!”
차를 마시다가 아르테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 드리고 싶은데 드릴 수 있는 것이 그림밖에 없어서요.”
“정말 예쁘구나.”
작은 액자 안에 든 그림에는 아기고양이들이 친하게 놀고 있었다.
바라만 봐도 미소가 지어지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하더니 다시 액자를 아르테에게 건넸다.
“그렇지만 받을 수 없구나.”
“아… 앗! 부담스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르테의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니 온갖 예술가의 작품을 다 접할 메디치 백작님이었다.
부족한 실력의 그림을 받고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자신의 실력이 창피하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액자를 받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실력이 부족해서 내가 거절하는 것이란 오해하지 말거라.”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아르테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페루제 공작부인은 품위를 잃지 않고 적당한 미소를 지었다.
재판장에 난입하여 ‘아르테 젠탈레스키’의 편을 든 것은 아르테 당사자 때문이 아니다.
친왕파 성향의 대법관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연약한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는 것을 막아 주기 위함으로 알려져 있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리 전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대법관’이니 ‘친왕파’니 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으니까.
백성들의 생각이 맞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 그림 대신에 너에게 받고 싶은 그림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까.”
“그림이요? 어떤 그림이십니까? 말씀만 해주신다면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그리겠습니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은인이 자신의 그림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원하는 그림까지 있는 마당에 이 액자까지 받는 것은 너무 양심이 없는 짓이 아닐까? 나는 그리 생각하는데 말이야.”
“아닙니다! 이 액자를 받아주신다면 저야말로 영광일 것입니다! 제발 이 액자도 받고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그림도 그리게 해주세요!”
“정, 그리 말하면 어쩔 수 없지. 감사히 받겠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분명히 상대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애원하면서 주는 상황이라니 말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가능하겠니?”
“네? 지금이요?”
“왜 어렵니?”
“아닙니다!”
“다행이구나. 그러면 그것들을 가져와라.”
아르테는 깨닫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페루제 메디치 백작의 말투가 하대로 변했음을 말이다.
그녀가 명령하자 방에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것들이 준비되었다.
이젤, 붓, 물감까지 전부였다.
아르테는 그것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처음 봅니다.”
“그러니? 나를 그릴 그림을 위해서 이 정도는 해야지.”
아르테는 그 말에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녀가 있는 방안에 준비된 화구들은 하나를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으로 배경으로 나의 초상화를 그려다오.”
“백작님의 기대에 부응할 초상화를 그리겠습니다.”
아르테가 그녀를 공작부인이 아니라 백작님으로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그녀 자신을 ‘메디치 백작’으로 등장하여 구해 줬다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각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던 재판관의 부당함을 증명한 당찬 여인은 그녀의 동경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기 전에 먼저 이곳을 파악할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나는 책을 읽고 있으마.”
“네. 알겠습니다.”
아르테는 차근차근 그들이 있는 방과 그녀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창가 쪽에는 적당한 햇빛이 비추고 있었고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모란꽃은 부귀영화를 상징했다.
또한 과하지 않은 무늬의 커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비스듬하게 기대어서 있는 소파 옆의 벽에는 지휘봉이 있었다.
편하게 기대는 와중에도 우아하다니 정말 대단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몇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초상화를 그리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갑작스러운 질문 요청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허락했다.
이곳에서 자신이 감출 일이 없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이 지휘봉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내가 라스타 왕국의 군통수권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란다. 폐하께서 하사해 주셨지.”
통수권자란 한 왕국의 병력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라스타 왕국에는 다른 사람이 통수권자로 있었다.
이 지휘봉이 의미하는 것이 그 통수권자보다 그녀의 명령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라스타 왕국의 군통수권자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드레스에 있는 허리띠는 무엇인가요?”
“지휘봉을 받을 당시에 같이 받은 것이지.”
녹색 드레스 위에 있는 허리띠도, 옆에 있는 지휘봉도 그녀가 라스타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그림의 물건들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 있음이다.
“드레스가 엄청 화려하세요.”
“초상화를 그리니까.”
녹색 드레스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드레스에는 딱 봐도 만들기 어려운 장식이 있었고 아름답고 금과 루비로 이뤄진 장미 브로치가 그 화려함을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권위와 부가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거기다가 반지를 2개 끼고 있었다.
“반지를 2개 끼셨네요.”
“자수정이랑 스피넬이지. 예쁘니?”
“네. 정말 백작님과 잘 어울리세요.”
자수정은 평화를 상징했다.
스피넬의 뜻은 예로부터 스피넬은 가주의 권력을 상징했다.
자신이 가문의 권력을 쥐고 있고 평화를 원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걸이도 너무 아름답고요.”
“공들인 목걸이를 알아주니까 기쁘구나.”
그녀의 목걸이는 다이아몬드는 고귀함을, 사파이어는 진리와 불변을 뜻했다.
자신이 고귀함은 불변이며 진리라는 뜻이 아닐까?
아르테의 질문에 그녀가 책을 읽으며 진지하게 대답해 줬다.
‘메디치 백작님’의 모습을 눈에 담고 난 뒤에 그녀의 주변이 보였다.
책장에는 범상치 않은 책들이 있었고 책상 쪽에도 한눈에도 어려운 내용임을 알 수 있는 책들이 세워져서 그녀의 지적인 면모를 한껏 드러냈다.
또한, 책상에 있는 많은 서신은 그녀가 사교계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알게 해줬다.
그것이 북부에 국한된 것일지라도 말이다.
“어떤 책인지 알고 싶니?”
“네?”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 네. 간략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알았다.”
아르테가 알기 원한다고 말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은인이 얼마나 지적이고 대단한지 알고 싶었던 것뿐이다.
“책이 너무 많으니 저기 책상에 있는 책들 일부만 말하마. 괜찮지?”
“네,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자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다.
책상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이미 거기에 어떤 책이 있는지 알았으니까.
그녀가 제대로 책을 읽고 기억하고 있음이다.
“앙리아드는 종교로 인한 전쟁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광신도의 무서움을 고발하고 있단다.”
신을 믿되 그것이 수단이 되어서 사람을 괴롭혀서는 아니 된다.
그런 생각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앙리아드와 같은 책이었다.
교황과 정치적 동맹이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말해줄 정도로 생각이 없지 않았다.
“‘법의 정신’은 법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지. 법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가설하고 이를 다시 역사를 통해 증명하는 방식인데 내용이 알차단다.”
법과 함께 과거의 정치 제도를 비교 분석한 내용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
변해 가는 세상에서 변화를 추구할 때에 도움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리비우스 역사 논고’는 롬 제국과 관련된 역사서를 읽고 쓴 논문집인데 롬 제국의 전성기와 패망에 대한 근거가 참으로 흥미롭지. 물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말이야.”
역사를 모르는 자는 미래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초심을 찾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디도로의 백과사전’은 지식은 선택받은 이들만 얻어야 한다는 사고에 대항하여 만든 책인데 너에게도 추천해 주고 싶구나. 평민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서 읽기 편할 것이야.”
이해하기 편하다는 것은 순전히 페루제 루비로즈의 입장일 뿐이다.
어려운 논문과 서책들을 읽는 그녀에게는 쉬울지 몰라도 ‘디도로의 백과사전’은 기본적인 교양은 갖춰야지 읽을 만한 책이었다.
어려운 책들을 소유하고 있음은 이를 이해할 교양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줄 하나의 이미지 수단이며 정치 수단이었다.
이런 중요한 그림을 아직 경력도 없는데 여성이기까지 한 화가가 그릴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 시대에 알펜 왕국에서 ‘여성’에게 허락된 것은 많지 않았다.
그 무게를 아는 아르테는 단단히 각오한 얼굴을 했다.
이것들을 모두 담아내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기본 틀을 세우고 집에 돌아가서 완성해야 했다.
그녀가 이젤 앞에 앉았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로님이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
이상한 사내가 들어왔다.
부스스한 머리와 대충 입은 허름한 옷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온 자신과 완전히 반대인 모습이었다.
그는 손님이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잘못 온 모양입니다.”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을 잊고 있었군. 내일 그대를 찾아가지.”
“알겠습니다.”
그는 인사하고는 바로 나갔다.
걸음걸이에서 심히 기분이 상한 모습이었다.
괜히 신경이 쓰였다.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된다. 원래 삐지기를 잘하는 사람이니까.”
“삐진다고요?”
“응.”
그녀의 말이 웃겨나 웃음이 삐져나왔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르테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림이 완성되면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기대하며 기다리마.”
* * *
아르테가 사라지고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했다.
“시녀장을 불러와. 자기 딸을 부른 것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곧 시녀장이 방에 도착했다.
“인사드립니다.”
“그래.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무슨 무례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걱정할 것 같아서 불렀네. 어쩌면 딸을 이용하여 무슨 짓을 벌일까 하는 걱정?”
“어찌 은인이신 공작부인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페루제의 생각이 맞았다.
시녀장은 은인을 상대로 몰상식한 생각을 했다.
공작과 자웅을 겨를 인물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방향으로 아이를 이용할까 싶어서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의 은인을 위해 움직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서 말이다.
참으로 이중적이었다.
“아니야. 그대의 마음을 이해해. 그때 나의 등장이 뜬금없기는 했잖아. 그치?”
“죄, 죄송합니다.”
공작부인의 말에 시녀장이 결국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을 인정했다.
공작부인이 자신의 딸을 부르지 않았다면 감사함만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렀다고 하니까 불안이 몰려온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해하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네.”
“감사합니다.”
“감사까지야. 그대를 부른 목적은 이것일세.”
그녀가 무언가를 시녀장에게 줬다.
“이것이?”
“내가 그대의 여식에게 그림을 받았어. 저기 보이지? 작은 액자. 은인이라면 선물을 받았는데 내가 원하는 그림까지 그려준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돈주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