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작은 희망도 없다
잠시 말을 멈춘 벨로나 공작을 보며 동정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폐하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정말 믿을 만한 분입니까?”
“말을 삼가라. 이 왕국의 국왕이시자 나의 주군이시다. 그분을 의심하는 발언은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
“폐하를 향한 당신의 믿음은 확고한 듯싶네요.”
벨로나 공작의 눈빛에는 자신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의아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왕의 무엇이 그에게 이런 확신을 줬을까?
벨로나 공작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유능했고 유약한 사람이기에는 강했다.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중요하지 않았다.
“솔직히 대법관 9명 중 친왕파 3명, 반왕파 3명, 중도파 3명 이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면 저도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나서지 않았을 것이에요.”
“그것을 어찌 믿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거짓을 말해서 제가 얻는 것이 있나요?”
그녀는 알펜 왕국의 ‘균형’이 참 좋았다.
서로가 견제하면서도 돕기도 하는 발전할 수 있는 정치 상황이 좋았다.
한쪽에 힘이 쏠리면 결국 힘을 가진 쪽은 나태해지고 비리가 가득해지는 것이다.
언제든 ‘자신을 칠 수 있는 적’의 존재는 죄를 짓기 어렵게 하는 명분이었다.
“힘은 언제나 균형을 이뤄야 좋아요. 그 균형이 깨지는 순간은 보통 피바람이 불죠.”
“그 힘이 반왕파에게 쏠리면 반역이 일어나는 것이지.”
“혹은 친왕파의 세력 확장에 불안감을 느낀 반왕파가 반역을 일으키는지도 모르죠.”
자신이 라스타 왕국에서 혁명으로 등장하게 된 ‘신생귀족’ 세력을 처리하지 않는 이유였다.
상대를 견제하면서 긴장하고 발전하며 조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언제든 가치가 떨어지면 제거할 수 있다는 여유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대는 어찌 왕국을 나약하게 만드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지?”
“왕실의 힘이 약하다고 왕국이 약한 것인가요?”
“왕국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왕국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그 구심점이 ‘왕’이라고요?”
“그래. 그는 그 구심점의 힘과 신뢰가 강해질수록 모두가 하나가 되기 쉽겠지.”
벨로나 공작은 그녀의 눈빛을 보았다.
확신에 차 있었고 만고의 진리인 것처럼 당당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신이 왕국을 위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아주 미약하나 그녀가 이해가 되는 듯했다.
처음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욕망만 채우기 급급한 여인이 아닐지 몰랐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싸우는 과정에서 그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기분이 들다니 말이다.
어쩌면 그녀를 설득하면 누구보다 강력한 정치 동맹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구심점은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하지? 그대가 신실하게 믿는 ‘신’?”
아까보다는 진정이 된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였다.
도대체 무엇을 그리 확신하기에 왕권 강화를 반대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리 강하게 믿는 ‘신’을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인가?
교황의 권한이 강화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녀의 행보는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신전의 엄격한 규율 중 하나인 ‘이혼 불가’의 원칙에서 ‘이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바꿨으니까.
그것은 신권 강화와는 상관이 없었다.
공작 정도 되면 신전 안의 은밀한 일을 전해줄 사람들이 있었다.
“백성의 구심점은, 왕국의 구심점은 왕도 신도 아닙니다.”
“왕도, 신도 아니다?”
“네.”
“그러면 그대가 생각하는 구심점은 무엇이지?”
“희망.”
희망.
그녀는 구심점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믿음이 강한 신자로 유명한 그녀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내가 노력하면 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내가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
내가 노력하면 병을 이겨 낼 수 있다는 희망.
내가 노력하면 더 편히 살 수 있다는 희망.
“미래의 희망이 모두를 저절로 하나로 만들 것이에요. 나는 그리 생각해요.”
“희망이라는 말은 좋아는 보여.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허상과도 같지.”
“그 허상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죠.”
서로가 한참을 바라봤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것같이 서로만 바라보았다.
얼마간 침묵하며 보던 중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더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시지요.”
축객령이었다.
대화를 더 해봤자 그들은 합의점을 찾을 수 없음이다.
시간 낭비였다.
그녀의 말에 그의 입이 움직였다.
“그 허상이 허상임이 밝혀지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 허상을 진실로 만들면 더 많은 것을 얻겠죠.”
희망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모든 이의 원망과 증오를 얻게 된다.
공작은 그리 말하는 것이다.
희망이 이뤄지게 될 때는 모든 이의 믿음과 그 이상을 얻게 된다.
공작부인은 그리 대답했다.
“나는 이만 나가지.”
“네. 그러시지요.”
* * *
공작은 방을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가신이 다가왔다.
부부간의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다 알기에 더 걱정스러웠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아니, 아닌 것 같다. 조금 힘든 것 같다.”
그가 외롭게 밖을 잠시 바라봤다.
벨로나 공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 부부싸움으로 확인했다.
그 둘은 결단코 한편이 될 수 없었다.
서로가 생각하는 정치 방향이 극과 극이었다.
한쪽은 왕권 강화를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정치 균형을 주장했으니까.
왕국을 위한 신념이 달랐다.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느꼈던 것 때문인지 공작은 기분이 심란했다.
상대가 생각보다 악한 여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던지라 더 그러했다.
* * *
페루제 공작부인도 남편이 가고 신경이 쓰였는지 서류를 보지 않았다.
우아하게 앉아서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녀는 내보냈는지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햇빛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정말 어리석었어. 참았어야 했나?”
사실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지금은 참아야 했다.
자신의 능력을 너무 드러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수도는 정치의 중심지.
이런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너무 보여주면 질투와 경계를 사는 법이니까.
중립을 지키면서 자기 사람을 수도에서 늘려야 했다.
대놓고 어느 한쪽의 성향임을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었다.
자신이 그 밑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면 말이다.
설령 반왕파 측에 편입할 생각일고 해도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자기 세력의 내부를 뒤흔들 존재를 환영할 수뇌부는 없었다.
그것들을 떠올리면 재판장에서의 일은 실책에 가까웠다.
적들의 경계는 있는 대로 사고 ‘적이 아닌 세력’의 경계심까지 사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거기서 막지 않았다면 수습하기 힘들었을 것이야.”
한번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면 난감해졌을 것이다.
흐름을 한번 타면 그것을 막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니까 왕권 강화의 흐름을 타기 전에 끊어 놓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쓸쓸하네.”
평소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옳은 일을 했음에도 마음이 허전했다.
아마도 그이가 자신을 친왕파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도 그이를 자신의 세력에 있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진짜 부부처럼 서로를 존중하며 같은 길을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말이다.
“이제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은 가질 수 없겠지.”
그 희망은 허상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다.
그런 둘이 ‘같은 편’을 먹고 싸울 일은 없으리라.
부부임에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괜찮았다.
부부간에 싸울 수 있다.
사이가 나쁜 부부는 많았다.
혼인 전부터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단지, 오늘은 서로가 같은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에 잠시 외로워졌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구나. 내일 화가를 부르거라.”
“네, 알겠습니다.”
“화가는 여기 적힌 화가로 하고…….”
“네.”
감정 정리를 빠르게 했다.
* * *
다음날, 벨로나 공작 가문의 저택에 손님이 방문했다.
젊은 여인이었다.
평민치고는 좋은 옷이고 귀족치고는 낡은 옷이었다.
기가 죽은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문을 지키던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저는 아르테 젠탈레스키라고 합니다. 여기 초대장…….”
아르테 젠탈레스키.
피해자인 그녀를 가해자로 몰아가는 재판관에게 맞서 페루제 메디치 백작이 나서준 덕분에 억울함을 풀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녀가 자신의 가방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낸 초대장을 꺼냈다.
문지기 하나가 얼른 저택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곧 사람이 나왔다.
“아르테 젠탈레스키님 맞으십니까?”
“네.”
“따라오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시종이 우아한 자태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일터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어머니가 일반 시녀일 때조차 방문한 적이 없었다.
저택 특유의 웅장한 분위기에 취할만했다.
한참을 걸으니 어떤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아르테 젠탈레스키 화가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네. 그러면 들어가시지요.”
시종이 다정한 말투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르테 젠탈레스키는 입을 벌렸다.
재판장에서도 느꼈지만 정말 눈앞의 메디치 백작님은 아름다웠다.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아르테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앉아요.”
“네!”
“그래. 잘 지냈나요?”
“네? 아! 네! 백작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때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족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는 백성을 구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란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에 빠져 있던 아르테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품위도 없이 인사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받은 초대였다.
그래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왔다.
“마차를 보낼까 했으나 하지 못했어. 이해해 주렴. 내가 공작부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손님으로 있는 것이라서 말이야.”
“아,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사정을 듣기는 했다.
벨로나 공작님이 메디치 백작님을 공작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욕적인 언행과 결정을 내렸다고 말이다.
공작님은 이런 우아하고 완벽한 부인을 맞이하고도 왜 무시하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 라스타 왕국산의 로즈차를 가져왔습니다.”
“역시 향이 좋구나. 내가 좋아하는 차인데 그대 입맛에도 맞았으면 좋겠네요.”
시녀가 조용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몸짓으로 찻잔을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서 향을 맡고는 말했다.
아르테의 시선으로 본 페루제 메디치 백작은 손짓하나도 우아함을 표현해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귀족들이 우아함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페루제 메디치 백작의 권유에 따라 얼른 차를 마셨다.
라스타 왕국의 로즈차는 달지는 않았으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입맛에 맞나요?”
“정말 맛있습니다.”
“취향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손님인데 맛없는 것을 주면 민망하지요.”
그녀가 다행이라는 듯이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 우아함에 아르테는 깨닫지 못했다.
귀족인 페루제 메디치 백작이 평민인 아르페 젠탈레스키에게 하대를 하지 않고 대우를 해주고 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