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이유
그녀는 그들이 어찌 자신을 생각하든지 관심도 없었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이단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을 경계하라고 하셨죠. 여기에 더하면 인식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바른 가르침을 거스르는 자도 죄인이고요.”
그녀가 아름답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성서 어디에 이혼이 죄라고 되어 있습니까?”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여기에 더하자면 성서에 있기를 남의 배우자와 간통하는 사람은 뜨거운 불 위에 걷는 죄라고 했습니다. 또한,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자기 영혼을 망치는 일입니다. 그런 죄인과 같이 사는 것이 합당합니까?”
한순간에 신관들의 입을 다물게 해버렸다.
그녀가 즐거운 재미를 찾았다는 듯이 웃었다.
상대가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은 언제 봐도 웃겼다.
자신들이 밀리고 있음에도 개혁안을 반대하는 무리가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며칠 동안 신전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페루제의 승리’였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있어.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승리에 대한 그녀의 감상이었다.
* * *
벨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 돌아왔다.
어머니의 귀가 소식에 란델리노가 달려왔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에게 안기며 말했다.
“어머니, 그리웠어요.”
“미안하구나. 빨리 오고 싶었는데 도무지 나를 놔주지 않지 뭐니.”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외롭고 가슴이 허전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마.”
“정말로요?”
“그럼.”
착한 아들과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내부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미소를 보였을 만큼이다.
“어머니! 저는 공부해야 할 것이 남아서 방으로 돌아갈게요.”
“그래, 이따가 저녁에 보자. 그리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쉬엄쉬엄하렴. 네 건강이 우선이란다.”
“네!”
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저택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인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란델리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아그리피나에게 말했다.
“피나, 너는 어머니의 행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
“사실 좀 당혹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아그리피나가 사람을 좀 쓸 줄 안다고 해도 일개 시녀였다.
동생이 페루제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페루제 루비로즈 세력의 윗선은 아니다.
그녀가 알아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
“네, 아무리 위세가 등등하신 분이시지만 여기서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한걸음 뗀 시점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모두가 꺼내지 않았던 의문이지만 사실, 그녀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왕을 알현하는 것이 맞았다.
새롭게 편입된 알펜 왕국의 귀족으로 왕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바로 수도 내의 공작 가문의 저택으로 갔다.
아버지인 공작도 거기에 관해 아무런 불만도 없는 듯했다.
“폐하를 만나지 않은 것으로 말이 많았던 상황이야. 그런데 거기다가 대법관 임명에도 영향을 줬어. 그것도 폐하의 사람이 대법관이 되지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말이야.”
“반왕파에서는 부인께서 친왕파는 아님을 명백하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반왕파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이번 일로 왕이 알았다.
‘자신의 편이 되지 않을까’하는 미세한 가능성은 사라졌다.
모든 왕족이 알았다.
‘알펜 왕국 북부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하는 헛된 희망도 사라졌다.
모든 귀족이 알았다.
‘왕당파에 편입되어서 자신들의 위협이 될까’하는 걱정은 사라졌다.
머리가 좀 돌아간다는 모든 사람이 알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왕과 척을 질 인사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렇게 화려하게 어필해서 반왕파에 자연스럽게 합류하려는 생각일 수도 있다.
누가 봐도 친왕파 성향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과했어.”
“그분은 누군가의 아래에 있는 분이 아니신지라 뭐라고 말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반왕파 세력에 들어가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근거가 빈약했다.
그녀의 결단력과 행동력 그리고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반왕파의 수뇌부들을 긴장시키기 충분했으니까.
“이해해. 피나, 네가 판단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하게 어머니는 자신의 능력을 가감 없이 보여 줬어.”
“네. 그런데 과하기는 하지만 상관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길 원하지 않는 분이시다.
설령 그 상대가 왕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분이 반왕파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어필한다?
어머니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의도’다.
그리고 그 의중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의중을 가졌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승리를 향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우리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법이니까 세세하게 관심을 가져줘.”
“알겠습니다.”
의혹만 가슴에 남기고 그는 책을 펼쳤다.
승리로 모든 것을 가질 어머니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적은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 * *
아들과 즐거운 재회를 마치고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우아한 표정이었다.
조금은 쉬어도 될 듯싶은데 그녀는 쉬지 못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어딘가로 갔다.
향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서류를 찾았다.
눈치가 빠른 시녀가 얼른 일거리를 가져왔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군.”
“여기 분류해 놓은 서류입니다.”
“딱 일하기 적당한 업무량이구나.”
국왕이 대법관 선정을 방해하여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막아냈다.
신전의 개혁도 성사시켰다.
조금이라도 쉴 법도 하지만 그녀는 달랐음이다.
원하는 것이 딱딱 맞게 이뤄지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흥얼거리면서 펜을 잡았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공작이었다.
“그딴 짓을 해놓고 이제야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오!”
“분명히 신전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며칠 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새삼스럽게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의 목소리가 저택을 울릴 만큼 컸다.
이에 귀가 아픈 듯이 그녀가 눈을 잠시 찡그리고 말했다.
“귀족의 품위를 지키세요. 뒷골목 양아치도 아니고 어찌 이리 ‘가볍게’ 목소리를 높이십니까?”
“가볍게? 가볍게?! 그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그리 말하는 것이요!”
“알지요. 설마 모르고 했겠습니까?”
“지금 그것을!”
잠시 고민했다.
시녀장의 억울함을 풀어줬다는 거짓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말할 것인가?
그 고민은 짧았다.
“그가 대법관이 되면 왕실의 힘이 강해지겠지요.”
“도대체 왜 왕실과 척을 지려는 것인가!”
“각하는 왜 왕실과 손을 잡으시는 것입니까?”
“뭐?!”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로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없는데 거짓을 말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은 부부의 신뢰를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물론 루비로즈 가문을 위한 정보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직’은 남편을 존중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이가 선만 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진실을 말할 수 있다.
“궁금해서요. 왕실의 힘이 강해져서 벨로나 가문에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귀족이 왕실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왕실이 단단해야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고 왕국이 분열되지 않고 강해질 수 있는 것임을 몰라서 물어보는가?”
“아, 왕실을 향한 충심은 당연한 책무이며 왕권이 강해야 왕국을 굳건하게 하고 백성을 위할 수 있다?”
남편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그녀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벨로나 간략하게 공작의 말을 따라 말했다.
벨로나 공작은 도대체 이 여자가 왕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귀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일 것이 뻔하기는 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면 딱하십니다.”
“내가 딱하다고? 나야말로 그대가 딱하군. 옳은 것을 보지 못하니까.”
서로가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서서 서로 아내를 내려다보는 공작과 앉아서 남편을 올려보는 공작부인의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그녀는 남편의 눈빛에서 그의 진심을 엿보았다.
“‘왕권이 강한 것이 옳은 것이다’라고요. 그것이 당신의 진심이라니 놀랍군요.”
“귀족들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왕권 강화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귀족들이 마음대로 백성을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왕이 강건한 권력으로 그들을 눌러야 한다고 믿었다.
왕의 권력 아래에서 그들이 조심하게 할 이유가 될 것이니까.
백성을 다치게 하는 귀족을 언제든 단죄할 힘은 백성을 편하게 해줄 것이다.
벨로나 공작은 그리 확신했다.
그녀의 얼굴이 조롱에서 불쌍함으로 느끼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부족을 채우는 것은 아내의 도리였다.
마땅히 바른길로 갈 수 있게 조언해야 했다.
“폭군이 왜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폭군?”
“폭군이란 사악하고 사나운 왕을 뜻하죠. 그들이 왜 사악하게 굴고 사납게 굴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다정한 미소라 말했다.
마치 아랫사람에게 가르침을 주는 듯한 오만함이 느껴졌다.
정말 싸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능력은 최고였다.
“아, 참! 폭군이라는 단어도 그 뜻도 잊어버린 듯이 구셔서 굳이 뜻을 알려드렸어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드는 능력도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말에 그를 화나게 하기 부족했다.
이미 화가 엄청난 상태라서 그것으로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을 가지고 말을 시작하면 이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
“그대는 지금 나에게 말하는 것인가? 폭군이 생기는 이유는 왕에게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네, 맞습니다.”
“그대는 지금 왕권이 강했던 많은 성군을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어. 그건 아는가?”
성군이라 불리는 인물들은 모두가 강건한 힘을 가지고 귀족들을 아래로 짓눌렀다.
짓누르는 동시에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며 조화를 이뤄 냈다.
짓누름을 견딜 만한 보상으로 귀족들의 만족을 이끌어냈다.
그것이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이다.
벨로나 공작이 하는 말의 뜻을 하는 그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성군’의 업적과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성군이요? 아니지요. 강한 왕들이 즐비했던 과거의 롬 제국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들 중 몇이나 성군이라고 불리었습니까? ‘성군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왕 중 성군이 얼마나 있었느냐. 비율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대…….”
수많은 왕과 황제가 존재했고 그중에 그 권력이 컸던 이들이 있었다.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이었다.
그들 중 성군이라 불린 이는 몇이었는가.
그들 중에 괴짜랑 불리던 이는 몇이었는가.
그들 중에 실책으로 손가락질을 당했던 이는 몇이었는가.
그리고 그들 중에 폭군은 몇이었는가.
과연 그것들을 비율로 하면 성군은 많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생각하니 그는 성군이 많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