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92화 (92/221)

092화 재판관을 엿 먹인 이유

신관이 와서 신성력으로 검사 한 번하면 끝인 일이었다.

‘강한 농도’의 신성력이 담긴 물인 성수에 각자의 피를 넣으면 친자 관계를 알 수 있다.

부모 자식 관계이면 금빛의 성수는 붉게 변하고 완전 남이면 파랗게 변한다.

친족 관계면 보랏빛이 된다.

보랏빛이 옅고 붉은색에 가까울수록 서로 가까운 관계의 혈육이었다.

교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메디치 백작에게 신관 하나 불러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멍청한 놈. 어떻게든 재판을 연장하고 남몰래 저들을 만나서 설득했어야지. 오히려 자극하다니. 쯧.”

자신이 속인 여인들을 손가락질하며 난리를 치는 그를 본 메디치 백작이 작게 혼잣말했다.

혀를 차는 것은 당연했다.

청중들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섰다.

조금이라도 아고스 타시에게 억울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했던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10년 전, 8년 전, 6년 전에 그는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녀들의 거주지이자 고향에서 지냈던 기록이 있습니다.”

“…….”

“아마 그때 그녀들을 유혹하고 결혼을 한 것이겠죠. 다행히 왕실에서 지원금을 먹으려고 해당 내용을 기록한 서류가 있더군요.”

“저런 망할 놈을 봤나!”

“저런 놈은 감옥에 가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당장 죄에 합당한 벌을 내려라!”

그가 불쌍하게 사기 결혼을 당한 여인들의 고향에서 거주했던 정식 기록까지 있자 사람들은 분개했다.

중혼은 에클레시아 교단에서 크게 생각하는 죄악 중 하나였다.

백성들에게도 뿌리 깊게 그것이 아주 큰 죄임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명도 아닌 세 명에게 한 것도 부족해서 한 여인을 짓밟았다.

“뭐,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추방령으로 마무리를 지으시겠다면 더는 할 말이 없네요.”

“이리 반대할 근거가 넘쳐나는데 추방령을 진행하려는 것은 아니지요?!”

“추방령으로는 부족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청중들이 더 격분했다.

정말 이대로 간단하게 추방령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면 자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재판장도 알았다.

자신의 판결이 틀렸다.

그러나 틀렸다고 해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그동안 자신의 완벽한 판결들에 오점을 남기기 원치 않았다.

“비록 아고스 타시가 죄를 저지른 것은 맞으나 한창 젊고 전도유망한 화가였습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중혼을 3번이나 저지른 것이 한순간의 실수인가요? 처음 알았네요!”

재판관의 말에 청중은 흥분했다.

“개소리 좀 작작해라!”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냐!”

“조용! 더 소란을 피운다면 모두 이곳에서 쫓아내겠습니다!”

그 말에도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디 한 번 해봐!”

“이 일에 대해 아주 많이 이야기하고 다닐 거야!”

억울한 피해자를 더 억울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에 미운털이 박혔으니까.

참으로 이상한 것은 저들도 아까까지만 해도 재판관과 같이 피해자를 가해자로 매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소란은 의외로 쉽게 잠잠해졌다.

“모두 진정하세요.”

메디치 백작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강압적이지 않았고 다정한 말투였음에도 그녀는 타인을 복종하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재판장이 조용해지자 재판관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아고스 타시의 중혼죄에 관해 재판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그렇죠. 틀린 말이 아니네요. 저희는 아르테 젠탈레스키가 당한 사건만 가지고 말을 해야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한순간의 실수는 아르테 젠탈레스키에게 한 짓거리?”

“뭐…….”

솔직히 재판장은 난감했다.

마치 사자 앞의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녀에게 놀아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 저는 반대를 했고 재판관께서는 어서 다시 올바른 재판을 내려주시지요.”

“이 일은 다시 재판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이 재판의 판결을 미루겠다는 뜻이다.

이는 아고스 타시가 ‘준비되는 대로’라며 기한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수도를 떠나도 되는 불합리한 판결이 아닌 제대로 된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와!”

“정의가 이겼다!”

“죄인은 마땅한 벌을 받게 되리라!”

진실로 정의가 승리한 것이다.

청중들은 기뻐하며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이들 중 가장 기쁜 사람은 젠탈레스키 일가였다.

아르테와 젠탈레스키 부부는 페루제 메디치 백작에게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이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되었네. 귀족으로 해야 할 일을 했던 것뿐이야.”

그들의 감사 인사에도 그녀는 무심했다.

그것이 더 그녀를 멋있게 느껴지게 했다.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말은 그녀가 귀족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처럼 들리게 했다.

“아닙니다. 짐승도 제 은인을 알아보는데 사람인 저희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제발 거부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던가.”

그녀가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재판장을 나섰다.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 그녀를 향해서 젠탈레스키 일가는 허리를 숙였다.

젠탈레스키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혼잣말했다.

“감사합니다. 저택에서 부인을 위해서 헌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르테 젠탈레스키의 어머니이자 라치오 젠탈레스키 왕실 화가의 아내는 바로 수도 내의 벨로나 공작가문 저택의 시녀장이었다.

* * *

그녀는 마차에서 서류를 읽다가 밖을 보면서 말했다.

“시녀장이 자신 때문에 내가 나섰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닌가? 하긴 자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기 충분하기는 하잖아.”

내 사람으로 만들 생각도 없는데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나선 것은 시녀장의 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운이었다.

자신이 하려는 일에 이 사건이 엮인 것은 말이다.

자신의 이해관계만 맞았다면 이 사건이 아니라 다른 사건에 개입했을 것이다.

“다들 내가 시녀장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고 오해할 것이니 나에게 나쁜 것은 없지.”

시녀장과 관계된 사건으로 그녀가 난리를 치는 명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벨로나 공작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시녀장을 위해 나선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이 일을 저지른 저의를 감출 수 있어서 좋았다.

* * *

이 사건은 한 잡지사를 시작으로 곧 수도 전체의 잡지사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상에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그러게. 이놈 왕실 화가라며? 왕실에서는 이런 쓰레기를 왕실 화가로 뽑았냐?”

“왕실의 지원금으로 중혼을 하고 다녔다고 하네.”

“왕실에서 이런 놈에게 지원금까지 쥐어줬다고? 도대체 돈을 얼마나 막 쓰는 거야?”

“그러니까. 그거 다 우리 세금에서 나오는 거잖아.”

“왕실 지원금이 중혼 지원금이었어.”

백성들은 왕실 지원금으로 중혼여행을 즐겼다며 왕실을 비판했다.

그런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는 못할망정 그를 종용하듯이 자금을 지원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 * *

“그 사건의 재판관이라는 놈이 아주 쓰레기였다고 하네.”

“그래? 어떤 놈인데?”

“그놈이 여자가 고발자면 무조건 퇴짜를 놓기로 유명한 놈이라고 해. 어떤 여인이 판결에 억울함을 보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기사에 적혀 있네. 그 외에도 많았다고 하고 말이야.”

“그 사건도 그놈이 보지 않고 판결을 하려고 해서 피해자만 불쌍하게 만들려고 했잖아. 그런데 그런 일이 많았다고?”

“그딴 놈을 대법관으로 세우려고 한 왕실이 미쳤네.”

아르테 젠탈레스키 사건의 재판관은 곧 대법관으로 지정될 예정이었다.

* * *

이 소식은 왕실에 당도했다.

알펜 왕국의 국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서류를 한 귀족에게 던졌다.

그 귀족은 벨로나 공작이었다.

“그대가 해결하게!”

“송구합니다.”

“내가 그딴 사과를 듣고 싶어서 그대를 부른 줄 아나?!”

왕국의 세력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왕과 왕실을 지지하는 친(親)왕파, 친왕파와 친왕파를 적대하는 반(反)왕파 그리고 상황과 이익 관계에 따라 어디든 붙을 수 있는 중도파였다.

국왕은 자신의 왕권을 더 강화하기를 원했다.

“도대체 왜 그 여자가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냐고! 거기서!”

“죄송합니다.”

왕과 친왕파에게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고 대법관이 되도록 힘을 실어 줬는데 여기서 이렇게 되어 버리냐고!”

“설마 그 여자가 그리 움직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법관은 정치적 방향을 결정짓는데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대법관 9명 중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굳이 번거롭게 왕실회의에서 특정 법안을 없애고 개정하는데 실랑이할 필요 없이 바로 시정할 수 있었다.

법안의 합법성을 정한다는 것은 대법관이 누구의 세력에 있느냐와 그 세력에 유리한 법인지에 따라 법을 막거나 제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미안하네. 그대도 그녀가 그러리라고 예상한 것도 아닐 것인데 말이야.”

“아닙니다. 모두 제가 부족하여 생긴 문제입니다.”

벨로나 공작은 너무 죄송하여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모든 것이 생각 없이 일을 벌인 고모의 욕심과 그런 고모가 멋대로 구는 것을 방관한 자신에게 있으니까…….

“그대도 알잖아. 우리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말이야.”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친왕파 성향의 대법관이 4명, 반왕파 성향의 대법관이 3명, 중도파 성향의 대법관이 2명이었다.

반왕파 성향의 대법관 중 하나가 임기가 끝나서 대법관의 자리를 물러나게 된 것이었다.

대법관 후보는 3명으로 추려지는데 친왕파, 반왕파, 중도파에서 추천한 인물들이 된다.

“강압적으로 그를 다음 대법관으로 밀어붙임에도 반대파들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죠.”

“그래. 그가 대법관이 되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반왕파, 친왕파, 중도파 모두가 보기에는 도덕적으로나, 평판으로나 대법관이 되는데 문제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 흔한 비리와 뇌물도 없었으니까.

페루제 루비로즈가 일으킨 사건 이전엔 그는 완벽한 대법관 후보였다.

그리고 아르테 젠탈레스키 사건이 그가 재판관으로 맡은 마지막 사건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희가 지지한 이는 대법관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중도파 성향의 재판관이 대법관이 되도록 해야겠지.”

* * *

그들이 머리를 흔들고 있었을 때, 춤을 추는 인물들도 있었다.

“아이고! 이렇게 일이 돌아가는군요!”

“우리는 친왕파 측의 사람이 대법관이 되는 것만 막으면 되는 거지요.”

“그럼요. 어차피 친왕파랑 중도파랑 중도파를 밀어줄 것이니까요.”

바로 반왕파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이 행복한 사건에 축배를 들었다.

반면, 그 축배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반왕파의 수뇌부였다.

“어떻게 생각을 하시오?”

“무엇이 말입니까?”

“페루제 메디치 백작 말일세.”

반왕파의 수장은 서부를 담당하는 파필리오 공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에게 질문했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계했다고 생각했으나 안일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아.”

경계한다고 경계를 하고 알아보고 주시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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