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91화 (91/221)

091화 멋있는 여인

이 재판의 사건 피해자인 아르테 젠탈레스키와 그 부모님이 받은 감동과 감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성별에 따른 이 불합리한 판결을 대놓고 반박해 줬으니까.

성서는 많은 백성에게 삶의 기준이 되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어도 종교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아르테 젠탈레스키에게 그녀는 충격 그 자체였다.

“메디치 백작님. 멋있는 분이시구나.”

“네 억울함을 이렇게 풀어주시려고 하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이리 백성을 생각해 주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그녀가 페루제 메디치 백작의 추종자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고대어까지 알 정도로 지적이며 여인임에도 백작 작위와 영지를 지닌 멋있는 인물이었기도 했으니까.

여인의 인권이니 그런 것보다 그녀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자신의 신실함을 의심하는 저 머저리 재판관을 엿 먹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원래의 방문 목적이 저 머저리를 엿 먹이는 것이기는 했다.

페루제 메디치 백작은 사람들이 어찌 자신을 바라보는지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면 원서 번역본이라도 서점에서 사서 가져오라고 하세요! 어디 누가 맞는지 확인해 보게요!”

“이런 무의미한 대화는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리도 당당한 것을 보니 고대어를 할 줄 아는 것 같기는 했다.

듣기로는 교황과 친분이 있을 만큼 신실하다고 하니까 고대어를 할 줄 안다는 것도 진실이리라.

재판관은 여기서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눠 봤자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진 것도 논리도 하나도 이길 수 없었으니까.

“여기는 죄의 유무를 판단하고 벌의 적용 여부를 결정하는 곳입니다. 그것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곳의 본분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죠.”

“본분을 지켜야 한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먼저 시작해 놓고 피하는 꼴에 페루제 메디치 백작이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곧 그를 공격하기 위한 말을 하기 위해서 잠시 숨을 골랐다.

“좋아요. 그러면 본분에 맞게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그대가 고쳐야 할 것이 있지요. 변하지 않는 진리를 무시하는 것은 그대였으니까요. 내가 백작으로 여기에 왔는데 호칭을 그따위로 하는 것은 무슨 예의입니까?”

그 말에 재판관의 얼굴이 굳었다.

사실 그녀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분명히 백작으로 이 사건을 반대했는데 그녀를 부인으로 부르는 것은 무례했다.

그것은 ‘메디치 백작’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일을 공론화하고 문제를 제기하기 바랍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보아하니 이 일이 공론화되면 악착같이 자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악을 쓸 것 같았다.

정답이다.

실제로 상대의 ‘귀족 작위’를 모욕하는 죄가 인정되면 이는 귀족모욕죄로 재판관이 감옥에 갈 판국이었다.

이미 그녀의 신실함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는 순간, 그의 나락은 결정되었다.

지금의 위치에서 조금만 떨어질 그의 운명이 아주 확실하게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좋아요. 사과를 받아들이죠.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네, 이 사건의 판결을 반대하신다는 것이죠?”

“그 이유와 근거를 알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재판관의 언행이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방금 전까지 페루제 공작부인을 하찮게 여기며 아랫사람 취급하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에 반해 페루제 공작부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재판관을 버러지처럼, 곧 버릴 쓰레기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 오만함이 너무 잘 어울렸다.

“일단 판결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죠. 아고스 타시는 유죄를 인정하며 그 벌로 수도 추방하며 그는 준비가 되는대로 수도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맞죠?”

“맞습니다.”

여유와 당당함으로 무장한 그녀의 자태에 재판관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그런 판결을 내린 것이죠?”

“아르테 젠탈레스키의 잘못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를 반영한 판결입니다.”

“잘못이요? 피해자인 그녀가 잘못했다면 무엇을 얼마나 했다고요?”

“남자가 오해할 만한 행동들을 반복적으로 했으니까요.”

“아까 재판장님이 언급했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 은밀한 눈짓, 계속된 신체적 접촉이요?”

“맞습니다.”

그녀가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재판관의 표정이 굳었다.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거물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빤히 그를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닌가.

정말 무심하기 그지없고 귀찮은데 억지로 보는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상대가 싫은데 상대하는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어머! 제 눈빛을 보고 그 의미를 모르시나요? 은밀한 눈짓을 보냈잖아요. 은밀한 눈짓은 상대가 알아채야 하잖아요. 아닌가요?”

능청스럽게 페루제 메디치 백작이 말하는데 재판관과 대비되어서 더 극적으로 보였다.

“풋!”

“그만 웃게. 재판장에서 쫓겨날 수 있어.”

“그렇지.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지.”

“이렇게 재미가 있는 재판을 놓칠 수 없어.”

재판장에 있던 청중 중 일부가 웃고 말았다.

웃은 사람들은 빠르게 입가를 가렸으나 그 소리를 감추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머지 일부는 재판관이 소란죄로 쫓아낼까 봐 힘을 다해서 웃음을 참았다.

재판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법정에서 무슨 언행입니까!”

“이게 무슨 언행이라니요? 아까 반대하는 근거를 말하라면서요. 말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녀는 대놓고 자신의 판결을 하나의 희극으로 만들어 버렸다.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재판관이 화를 내는데도 그녀는 평온했다.

마치 여기에 나들이를 온 것처럼 말이다.

재판관은 네가 말하라고 해서 말하지 않았냐고 너무 뻔뻔하게 말하니까 할 말을 잃었다.

“자기가 말해 보라고 해서 말했는데 괜히 울컥하기는…….”

“그러게. 그러면 말해 보라고 하지 말던가.”

청중들은 메디치 백작의 편이 되었다.

“뭐, 재판관님이 판결을 반대하는 이유를 계속 말해야겠죠. 모두가 궁금해하니까요. 그렇죠?”

“맞습니다.”

“정말 궁금해요.”

“알려 주십시오!”

그녀가 윙크하며 청중들에게 말하자 그들이 강하게 호응했다.

그녀의 말에 빠져들던 청중들의 마음은 점점 가해자인 아고스 타시가 아닌 피해자인 아르테 젠탈레스키에게로 기울어졌다.

“그러면 이번에는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에 대해서 말해 볼까요. 아르테 양, 내가 그대에게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물어봐 주세요!”

자신을 도와줄 구원자에게 눈을 반짝이며 아르테가 대답했다.

“좋아요. 그대가 그대의 스승이었던 아고스 타시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어떤 옷을 입었죠.”

“물감에 옷이 더러워질 것을 고려해서 낡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께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낡은 옷을 한 벌만 입은 것이 아니라 두세 벌을 겹겹이 입었습니다.”

“그렇군요. 한 벌만 입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벌을 입음으로 오해를 원천 차단했음에도 그런 일을 당한 것이군요.”

“네, 정말 억울했습니다.”

“이 내용도 고발장에 적혀 있었나요?”

“네.”

그 대화에 사람들은 작게 속삭였다.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려고 했다.

“뭐야? 한 벌만 얇게 입고 유혹한 것이 아니잖아.”

“그러게. 그런데 왜 재판관은 그따위로 이야기를 한 거야.”

“뭔가 저 화가에게 받아먹은 것이 있겠지.”

“그러게.”

재판관도 가해자인 아고스 타시에게도 좋지 않았다.

아고스 타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재판이 진행되자 불안해졌다.

그가 아무리 인맥이 넓어도 재판의 판결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은 없었다.

대신에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줄 성향의 재판관이 사건을 담당하게는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획대로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았는데 방해꾼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녀는 여러 벌의 옷이 아니라 한 벌의 옷만 입고 있었습니다. 재판관님! 그녀의 거짓에 현혹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지요. 메디치 백작께서는 지금 너무 한쪽의 말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아고스 타시의 말에 재판관이 헛기침하며 슬쩍 만족스럽게 웃었다.

페루제 메디치 백작은 웃음이 삐져나올 것 같았다.

정말 계획대로 착착 움직여 주니까 일할 의욕이 강해졌다.

“아고스 타시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 말에 재판장이 웅성거렸다.

도대체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내뱉는 상대를 신뢰할 수 없는 상대라면 그 말도 거짓일 확률이 훨씬 높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재판장도 이런 물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그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고 그가 이 질문을 하지 않는 순간,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들이 널리 널리 퍼질 것이다.

“바로 이런 뜻이지요. 어서 들어오라고 해!”

“네!”

그녀 뒤에 있던 시종이 재판장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3명의 여인과 7명의 아이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고스 타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대들은 어서 자신을 소개하라.”

“저는 에이미 타시입니다.”

“저는 니콜라 타시입니다.”

“저는 사라 타시입니다.”

그녀들의 이름을 들은 재판관도 청중도 젠탈레스키 일가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이 타시인데 아고스 타시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저는 9년 전에 아고스 타시와 혼인을 했고 쌍둥이 아들들과 딸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7년 전에 혼인했어요. 저는 딸아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저는 5년 전에 결혼하고 아이가 2명 있습니다.”

전도유망한 왕실화가이자 행동거지가 좋기로 유명했던 아고스 타시의 실체였다.

“중혼은 왕국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이혼을 한 것이 맞는데 왜 ‘타시’라는 성을 쓰죠?”

“저는 이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도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녀의 다정한 물음에 아고스 타시의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는 그이가 잘나가는 왕실화가인지 몰랐어요. 저 같은 평민이 어떻게 왕실화가의 이름을 알겠어요. 저는 단순히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밖에서 일을 다니는 줄 알았어요. 수도에는 한 번도 간 적도 없고요.”

“저도 그이의 진짜 직업을 몰랐어요. 아니, 수도에 갈 일도 없고요.”

“저도요. 그이의 직업은 물론이고 수도 출신인 것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아세요?”

정말 가관이었다.

여기서 더 가관인 것은 따로 있었다.

“사람이 와서 마차 사고로 그이가 죽었다고 했어요. 신원을 알 수 없어서 화장했는데 나중에서야 생전에 가지고 있던 물품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저를 찾아왔다고 했다고요!”

“저도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는 여인들에게 질리면 자신을 죽은 척 위장하고 사라졌었다.

그러면 자신은 죽은 것으로 되어 버리니까 굳이 그 여인들과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사라지는 래퍼토리가 참으로 같네요. 얼마나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다 허접하게 마차 사고로 위장했군요.”

“거, 거짓입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뭐, 신관을 부르면 친자 여부를 알 수 있으니까 금방 증명이 되겠죠.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요.”

그녀의 담담한 비꼼에 아고스 타시가 발악을 했다.

소용이 없는 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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