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90화 (90/221)

090화 여기요!

강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드디어 페루제 공작부인의 등장이다!

눈에 담긴 여인이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광이 비치는듯한 미소는 덤이다.

“여기요!”

“응?”

재판관이 당혹스러워하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재판관은 ‘예상치 못한 제삼자의 등장’에 잠시 정신이 나갔다.

그 멍한 얼굴에 그녀가 손을 움직였다.

짝!

박수치며 그녀가 말했다.

그 단순한 행동조차 우아한 여인이었다.

“정신을 어디에 뒀나요? 어서 정신을 찾으셔야죠.”

“흠흠흠, 누구십니까?”

재판관은 정신을 차린 후 헛기침하고는 그녀의 행색을 봤다.

차분한 드레스와 대비되는 화려한 장신구는 이곳의 장소와 목적, 시간과 전혀 맞지 않았다.

과한 듯한데도 어울리는 것이 신기했다.

“벌써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분명히 아까 ‘여기에 백작 이상의 귀족은 없으신가요?’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부인께서 그 반대하는 귀족이라는 말입니까?”

“네. 맞아요. 이런 쓰레기 같은 판결에 반대하는 귀족이랍니다.”

‘쓰레기 같은 판결’이라는 말에 재판장의 표정이 굳었다.

이는 판결을 내린 재판장을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아주 상큼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더 기분을 나쁘게 해줬다.

자신을 모욕하는 것에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었다.

단지 참을뿐이지 말이다.

“부인, 이것은 법에 근거하여 합당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은 판결에 반대가 가능한 귀족의 기준을 모르시나 보군요.”

“제가 아는 기준과 다른가요?”

재판관이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설마 자신이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반대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면 알펜 왕국 귀족들의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데다가 무식하기까지 한 귀부인을 보고 혀를 찼다.

이래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무식한 부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가르침을 주기로 했다.

“부인, 이 판결에 반대할 수 있는 귀족은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져야 하고 그에 맞는 영지와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설마 제가 그것도 모르고 여기서 반대를 할까요?”

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보면 이런 기본적인 것을 모른다고 가정을 하는 것인지 대충 감이 왔다.

오히려 저 오만함이 자신을 옥죄게 될 줄은 모르고 나대는 것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안다고요? 부인. 남편의 작위와 영지, 군대가 아닙니다. 반대하는 당사자의 작위와 영지, 군대입니다.”

“왜 자꾸 아는 것을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재판관은 자꾸 억지를 부리는 눈앞의 여인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여인이 작위를 갖는 것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는 명예 작위의 경우에는 가능했다.

그러나 영지와 군대를 가진 영주는 다른 문제였다.

알펜 왕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얼마 전에 라스타 왕국의 여성 영주가 편입되었다고 들었다.

그 여자가 라스타 왕국에서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를 지녀서 왕실이 난리가 났다고 들었다.

재판관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봤다.

침을 삼키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귀부인의 성함은 어찌 되는지요?”

“제 이름이요? 이름이 2개인데 어떤 이름을 원하시나요?”

하나는 벨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으로 가지는 이름인 페루제 벨로나였고 다른 하나는 메디치 백작인 페루제 메디치였다.

재판관은 일이 꼬였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수도에 도착하여 폐하를 알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분위기가 좋지 않았음도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역시 영주로 제가 가진 이름을 알려 줘야겠죠?”

“아, 아니. 괜찮습니다만.”

“아니에요.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반대를 승인할 수 있겠어요. 그쵸?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예요. 메디치 백작으로 불러줘요. 메디치 백작 가문은 라스타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 주신 선물이죠.”

재판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자기를 소개했다.

이런 재판장에서 그것도 판결을 내리려고 하는 순간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수도에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자신을 알리기에는 딱 적합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저 웅성거림에서 그들의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여성 영주’가 알펜 왕국에 등장했음을 아는 백성도 있었고 모르는 백성도 있었다.

신문을 읽는 백성도 있고, 읽지 않는 백성도 있었다.

또한 글을 읽을 줄 아는 백성이 있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백성이 있었다.

“메디치 백작?”

“그 라스타 왕국에서 우리 쪽에 영지를 줬을 때 조건이 여성 영주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어.”

“그러게. 그냥 사람들 관심을 끌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

“주요 잡지사 기사들에 쫙 나왔던 것으로 보면 거짓은 아니었어.”

여성 영주에 대해 알던 사람들은 그 당사자를 실제로 재판장에서 봤다는 사실에 놀랐다.

거짓 이야기였다고 생각한 사람도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페루제 메디치 백작을 실물로 볼 줄은 몰랐을 것이다.

평민들이 귀족을 대면한다는 것은 그들의 고용인이 아닌 이상에는 손에 꼽을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영지를 다스리는 것은 남성의 일인데 어찌 여성이 할 수 있어?”

“여자란 자고로 집에서 애를 낳고 집안일을 하는 존재잖아. 어떻게 그게 가능해?”

“라스타 왕국이 미쳤나?”

여성 영주의 존재에 대해 몰랐던 이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에게 여인이라 자신의 말을 따르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존재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인의 도리를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시대니까.

그것이 대부분의 사고였다.

젠탈레스키 부부처럼 서로를 아끼며 존중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는 적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따위 말들을 하는지 한심하군요. 경쟁하고 또 경쟁하여 발전하고 그 사이에서 인재를 모아도 부족할 시대이거늘. 그렇죠?”

여성을 애를 낳고 집안일하는 존재로 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페루제 메디치 백작의 고개가 돌아갔다.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에 다들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치기를 피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눈치채지도 못하는 무능한 것들이나 지금 자신이 어떤 판결을 내린지 모르는 무능한 것들이나 다 같아요.”

“부인! 더 이상의 모욕을 할 시에는 강제로 쫓아내겠습니다!”

아까 재판관을 ‘쓰레기 같은 판결’을 내렸다는 말로 모욕준 것으로 부족했던 모양이다.

재판관과 이곳에 있는 모든 구경꾼에게 조롱을 선물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심하기는 했군요. 미안합니다.”

“좋습니다.”

너무 깔끔하게 사과를 하는 바람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재판관은 화가 났다.

한 번으로 부족하여 다시 자신을 모욕했다.

재판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죄로 벌을 받아 마땅했으나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여 참았다.

그녀가 가진 군대와 부는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숨을 고르고 진중하게 말했다.

“부인,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인재를 얻어야 하는 시대다.

사람은 많으나 인재는 많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부족할 인재를 굳이 남성으로 제한하여 더 찾기 힘들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재판관의 말이 더욱 그녀를 언짢게 했다.

이미 호칭 때문에 기분이 나쁜 상태였으니까.

“변하지 않는 진리요?”

“네, 맞습니다.”

자신이 백작으로서 이 재판의 판결을 반대했다.

그런데도 호칭이 백작이 아니라 부인이다?

재판관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재판관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 이래로 변하지 않은 여성관에 대해 언급했다.

수천 년 인간의 역사에서 여성은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존재였다.

“역사 속의 많은 위인의 말이나 기록에 여성과 남성은 엄연히 다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있고요.”

“지금 나랑 성서 해석을 놓고 싸우자고 하는 것입니까?”

신실하다 못해서 교황과도 과한 친분을 지닌 페루제 루비로즈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신관들에게 성서 교육을 받은 신자로 지금 재판관의 언행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지금 자신에게 성서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인가!

감히 자신에게 성서 해석을 놓고 싸움을 걸었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심을 모욕하는 것이며 자신의 신앙심이 시험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성서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셔야지요! 신께서는 ‘인간’을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성이나 남성이나 그 생명의 귀함은 동등한 것이지요. 어디에도 ‘남성’이 신의 형상이라고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판사가 엄청난 기세로 입을 연 페루제 메디치 백작에게 잠시 움찔거렸으나 성서의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내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성서에 보면 여인은 자고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며 간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신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좋은 것만 기억하시는 것입니까? 성서에는 적혀 있습니다. 남편들에게 에클레시아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기를 에클레시아께서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말씀이었죠.”

판사는 생각했다.

‘그런 구절이 있었나?’

자신이 독실한 신자도 아니고 솔직히 성서 원서를 읽어 본 적도 없다.

원서의 내용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고대어를 할 줄 알아야 했다.

성서 원문을 읽자고 어려운 고대어를 배울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곳 시대에 맞춰서 쓴 해석본은 있었지만 그런 재미도 없는 것을 읽어서 뭐하랴?

예배할 때, 신관이 말하는 말들을 좀 기억해 내는 것이 전부다.

“여기에 말을 더하자면 자기 아내를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거 진짜 있는 구절입니까?”

그에 비해 페루제 메디치 백작은 고대어까지 배워 가면서 원본 내용을 읽은 신자였다.

그녀가 한심해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꼭 성서의 그 내용으로 자신을 짓누르려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 말고 할 말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믿지 않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 원서에 나오는 말인데 당장 원서를 가져오라고 하세요!”

“원서는 고대어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찌 신자라는 사람이 고대어도 모르는 것입니까!”

분노가 어린 외침에 재판관은 자꾸 고개가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에게서 나오는 살기가 강렬했다.

뜬금없이 메디치 백작과 재판관 간의 성서 해석을 놓고 대립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감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순종에는 ‘사랑’이 전제가 있구나.”

“그러게.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할 이유는 없었어.”

“신께서는 여인도 사내도 동등하게 생각해 주셨네.”

그것은 성서를 근거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던 여인들이었다.

“그이가 아내의 도리는 남편에 대한 복종이라는 말에 따를 이유가 없었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없는 놈이니까.”

“어디 성서의 구절을 듣고도 행동이 그대로인지 한 번 봐야겠어.”

여인들은 눈을 반짝이며 페루제 메디치 백작을 바라봤다.

그들에게 그녀의 이름과 작위가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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