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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9화 (89/221)

089화 기회는 자신이 기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침마다 수도의 대표 언론사의 기사들을 읽었다.

차와 간식은 언제나 함께였다.

수도의 기사들을 읽어 보면 수도의 트랜드가 보였다.

수도의 관심사를 반영해야 그들의 기사를 사람들이 돈을 주고 볼 것이니까.

“과연 수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알겠군. 나중에 이야기를 나눌 주제로 좋겠어. 여기 적은 정보들을 가져오렴.”

“네, 알겠습니다.”

시녀가 종이를 받고는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녀가 한 손을 들었다.

“잠깐.”

“네.”

시녀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주 작은 기사 하나를 찢어버릴 듯이 바라봤다.

아주 작은 기사였다.

수도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작은 만큼 기사의 내용도 부실했다.

도저히 그녀가 관심을 가질 내용이 아니었다.

한참을 읽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 사건에 관해 자세히 알아봐. 세세하게 하나하나 전부.”

“네. 알겠습니다.”

시녀가 나가고 그녀는 한참 동안 밖을 바라봤다.

* * *

참으로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미약한 관심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줬다.

수도에는 미술 선생이 학생을 상대로 너무 나쁜 짓을 한 사건이 발생한다.

공작부인이 관심을 가진 ‘작은 기사’가 이 사건이었다.

피해 학생의 이름은 아르테 젠탈레스키.

그녀의 아버지는 왕실 화가 중 하나인 라치오 젠탈레스키였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던 그녀는 자신이 당한 끔찍한 일을 알렸다.

“뭐야?! 그놈이 감히 그딴 짓을 하다니!”

“우리 딸,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내 그놈의 다리를 당장 분질러 놓을 것이야!”

딸에게 지옥을 선사한 놈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고 이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말했다.

“저는 그놈이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 놈은 벌을 받고 죄인으로 기록이 되어야해.”

부부는 딸을 다정하게 안으며 파렴치한 죄인을 단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그들은 결정을 내리자마자 고발장을 접수했다.

그 죄인의 이름은 아고스 타시.

그는 준수한 외모와 매너로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다.

인기만큼 인맥도 넓었다.

게다가 라치오 젠탈레스키와 같은 왕실 화가로 전도유망한 인재라고 불리고 있었다.

직장동료이자 좋은 평판을 지닌 그를 라치오 화가는 너무 믿었었다.

“여보, 그놈이 빠져나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 그놈이 아무리 평판이 좋아도 인맥이 넓어도 죄를 지었어.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그 작자가 보복이라도 하면 어쩌죠?”

“무슨 그런 걱정을 하니? 네 아버지도 왕실 화가로 인맥이 넓으니까 그런 불안감을 다스리렴.”

“그래. 이 아비를 믿거라.”

그들은 정의는 반드시 이뤄지리라 믿었다.

이일이 벌어지기 전만해도 행복만 있었던 삶이었으니까.

삶이 너무 평탄해서인지 몰라도 그들은 너무 순수했다.

* * *

‘정의’는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재판장에서 잘 드러났다.

“아르테 젠탈레스키와 아고스 타시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면 아고스 타시는 무죄를 주장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결단코 하늘에 부끄러운 짓을 않았습니다!”

“아르테 젠탈레스키는 아고스 타시의 유죄 주장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죄를 지어서 졌다고 하는데 어찌 변함이 있겠습니까?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시작하지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도 양측은 무죄와 유죄를 놓고 첨예하게 주장을 펼쳤다.

둘 중 하나라도 합의를 하자고 하면 쉬울 것인데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쪽은 단호한 벌을 다른 한쪽은 완벽한 무죄를 원했다.

재판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겨우’ 이런 일에 자신이 나서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측의 주장과 그 근거는 잘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양측에 질문을 해보지요. 괜찮겠습니까?”

“네.”

“네.”

“아르테 젠탈레스키부터 질문을 하죠.”

재판관은 이미 양측의 입장이 기록된 서류를 읽었음에도 다시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질문을 받는 대상자인 아르테는 보지도 않았다.

“의도적으로 남자에게 여지를 준 것이 아닙니까?”

“저는 재판관님께서 무슨 뜻으로 그리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고스 타시의 주장에 따르면 수업마다 은밀한 눈짓을 보내 왔고 매번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은근히 원했던 것이 아닙니까? 매번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수업을 들었다고 하는데요.”

재판장의 공기가 이상했다.

방청객들이 그녀를 서늘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먼저 유혹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고 하잖아.”

“처음부터 작정한 것이네.”

“신체적 접촉도 자주 했다고 하니까 남자가 오해할 만하지.”

“제자를 잘못 들여서 고생이네.”

“불쌍해.”

피해자인 아르테는 남자를 유혹하는 천박한 여자로 둔갑되었다.

피해자의 주장은 묵살이 되었고 가해자의 주장만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졸지에 피해자인 그녀는 죄가 없는 남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죄인이 되었고 가해자는 천박한 여자 때문에 재판을 서게 된 피해자가 되었다.

억울했다.

너무 화가 났다.

어째서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않는 것인가!

“저는 억울합니다! 은밀한 눈짓이 무슨 눈짓인지 모르겠고 그림을 가르쳐 주는데 손을 잡아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옷차림도 물감에 더러워지는 것을 고려해서 낡은 옷을 입은 것이 전부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여 목소리가 높아졌다.

피해자를 취조하듯이 말하는 현실에 대한 항의였다.

그렇지만 재판관은 그것을 다르게 해석했다.

“험한 일을 당한 사람치고는 기운이 넘치군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닙니다.”

피해자가 아니기에 소리칠 기운이 있다는 논리다.

무슨 쓰레기 같은 논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피해자는 언제나 두려움에 떨면서 숨어 있어야 하는가.

고발도 용기를 냈기에 할 수 있다.

그 용기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힘을 내는 것이 잘못인가!

“단지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아르테는 재판관의 망언에 경악했다.

그녀가 충격에 소리를 쳤으나 재판관은 무시했다.

가장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봐야 하는 그는 전혀 여성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재판관 자신이 남성이기에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아고스 타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아르테 젠탈레스키의 말이 맞습니까?”

“전혀 다릅니다! 지금 자신의 천박함을 감추려고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까?”

“그윽한 눈빛으로 저를 본 적이 여러 차례이며 은근히 제 손을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옷도 저를 유혹할 정도의 옷차림으로 입었단 말입니다!”

시대의 편협함이 가져온 폐단이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니까.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르테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어찌 피해자인 제 딸에게 이리 가혹하게 구는 것입니까?! 어째서요!”

“법정에서 소란을 피운 죄로 퇴장을 선언합니다. 어서 데리고 나가세요.”

병사들이 강압적으로 중년 여인을 끌고 재판장에서 나가려고 했다.

“여보!”

“엄마!”

“이거 놓으시게! 놓으란 말일세!”

병사들을 막으려는 아버지와 저항하는 어머니 그리고 절규하는 딸.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계속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으니 그 주장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손가락고문과 산파의 검증절차를 거치겠습니다.”

“어찌 제 딸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려고 합니까!”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어찌 그러는 것입니까!”

쫓겨나고 있는 중에도 부부는 재판관을 비난했다.

그들은 정의가 세상에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손가락 고문은 고발자들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절차였다.

장갑을 연상하게 하는 철기구로 행했다.

그 기구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면 기구로 철을 조이는데 손가락이 부러질 수 있었다.

그 기구로 손가락이 부러지기 직전까지 견뎌내며 자신의 주장을 계속 번복하지 않는다면 계속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다.

방청객들은 그녀가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을 하지.”

“그러게. 어차피 저거 하면 진실을 말하게 되잖아.”

“아파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지금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인데 말이야.”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재판을 취소하는 피해자들도 있었다.

가해자 측에서 손가락 고문 실행자를 매수하여 실제로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고통에 울부짖으며 재판진행을 더는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산파의 검증 절차는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산파가 직접 확인을 하는 것인데 치마를 입고 있어서 산파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수치스러웠다.

재판장에서 해야 하니까.

그러면 이곳의 모든 사람이 그런 자세로 있는 자신을 다 보게 되는 것이니까.

“이게 강제로 재판을 취소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진실이라면 끝까지 참을 수 있겠지요.”

재판관의 말에 따라 다른 병사들이 아르테에게 다가와서 손가락 고문기구에 손을 넣었다. 이게 고통스럽게 고문을 당하겠지만 참을 것이다.

이대로 고통만 받다가 재판취소를 당하느니 고통을 이겨 내고 재판을 계속 진행할 것이다.

아르테가 그리 다짐했다.

“꺄아아아악!”

“고발 내용이 진실입니까?”

“진! 꺄아아아악! 실입니다!”

손가락 고문을 이겨내며 진실을 지켜냈다.

“자, 치마 안에서 보느라 잘 보이지 않네요. 손으로 좀 벌려 볼게요.”

“빨리 끝내주세요.”

그녀는 수치스러운 자세로 산파의 검증까지 받으며 자신의 진실을 증명해냈다.

“아르테 젠탈레스키의 고발이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이만 그녀의 부모들도 다시 재판장으로 불러오게.”

“네.”

부모님은 진정이 되었다고 판단이 되었는지 손가락 고문과 산파의 검증이 끝나고 다시 재판장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판결을 내리겠다. 아고스 타시는 유죄를 인정하며 그 벌로 수도 추방령을 내리겠다. ‘준비가 되는대로’ 수도에서 나가십시오.”

“무슨 소리입니까!”

“겨우 추방령이라니요!”

아르테와 그녀의 부모들은 분노했다.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한 여인을 유린한 대가가 겨우 수도 추방령이라고 한다.

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준비가 되는대로’라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놈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며 어영부영 수도에서 계속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가게 하려면 바로 나가게 해야죠! ‘준비가 되는대로’는 무슨 말입니까!”

“반대는 없으신가요?”

재판관은 그들의 분노를 무시하며 반대가 있는지 물었다.

여기서 반대는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귀족의 반대였다.

그것도 영지와 그에 맞는 군대를 가진 귀족이어야 했다.

아테르의 아버지는 왕궁 화가이기는 하지만 작위가 승계되지 않는 ‘준귀족’이었다.

백작 이상의 거물급 귀족이 왕궁 화가 중 하나에 불가한 그를 위해 이 재판장에 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대로 저 악마는 수도에서 ‘준비’를 핑계로 눌러앉을 것이다.

“여기에 백작 이상의 귀족은 없으신가요?”

“…….”

“반대는 없는 것으로 하고 판결을 확정하겠습니다.”

재판관이 판결봉을 내려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재판장 문이 열렸다.

아름다운 여인이 재판장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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