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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8화 (88/221)

088화 답을 안다 (3)

과연 평민에서 귀족이 되는 일임에도 그녀가 그것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맞아요. 공작부인과 연이 닿고 싶어서 실리님의 양녀, 양자들과 혼인을 원하는 가문들은 많아요. 그만큼 지참금도 많이 필요하죠.”

지참금은 신부의 가문에서 신랑의 가문에 결혼하는 대가로 주는 것이다.

데릴사위의 경우에는 신랑 가문이 신부 가문에 지참금을 지불해야 한다.

“실리 시녀장님은 그 어떤 가문에도 지참금을 보낸 적이 없으세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 주고 너희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뜻?”

“그렇죠. 지참금도 없이 맨몸으로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되었어요. 그만한 값어치를 하지 않으면 쫓겨나겠죠.”

결혼을 전제로 받은 것이 없으니 쫓아내기도 쉬웠다.

원래 귀족에게 고개조차 들 수 없는 평민이지 않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공작부인의 사람이라는 것뿐.”

“어머니 혹은 실리 시녀장의 총애를 잃으면 위태로운 자리다?”

“그분에게 기대어 한몫 잡으려고 실리님의 평민 자식들과 혼인을 추진했는데 그것을 못하면 같이 있을 이유가 더는 없죠.”

매일 밤마다 실리의 방으로 환수를 통해서 자신들이 얻은 정보를 보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악을 쓰겠네.”

“매일 자신이 얻어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견제하고 미워하며 불안에 떠는 자리죠. 지금도 예비 양녀와 양자들을 키워 내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네 능력이면 내가 없어도 가능할 것 같은데?”

“저도 제 능력에 부족함이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공작부인께서 이미 후계자로 생각해 둔 상대가 있지요.”

“아… 그렇구나.”

란델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음 대의 권력 세력을 구축했겠네.”

“네, 이미 그 후계자 후보를 따르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아닌 제가 실리님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보기만 할 리가 없죠.”

“실리 시녀장의 자리는 어머니의 최측근 자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게 3가지겠네.”

“네. 맞습니다.”

“하나는 영식을 지지할 굳건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머니의 심중에 있는 녀석을 반대할 적대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겠네.”

“그리고 영식께서 부인께서 마음에 둔 상대보다 훨씬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어머니는 능력을 중시하시는 분이니까.”

꿈속의 자신은 어머니의 아들임에도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꿈이었음에도 다른 녀석을 후계자로 선언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던 자신의 굴욕감, 수치심, 패배감이 지금도 느껴졌다.

“어머니가 경계하기 전에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 줘야 해.”

자신이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다면 어머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경계하며 루비로즈 가문과 거리를 두게 하기 전까지 말이다.

또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

기회를 주지 않으면 그 기회를 달라고 할 세력이 필요했다.

무시하지 못할 세력은 그를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 발판이 될 것이다.

“그러면 저는 포섭할 만한 사람들을 조사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파악해줘.”

“알겠습니다.”

아그리피나가 방을 나서고 그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혼잣말했다.

“보여줄 것이면 한꺼번에 보여줄 것이지. 애매하게 보여주고 있어.”

전부를 보여주지 않고 찔끔찔금 미래를 보여줬다.

해야 할 것과 그것을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약올리듯이 조금씩 나오는 예지몽에 짜증내며 눈을 감았다.

* * *

시간은 흘러서 수도에 도착했다.

공작 가문의 격에 맞게 수도의 저택은 크고 아름다웠다.

우아함으로 무장한 하얀 저택은 그녀의 안목을 만족스럽게 했다.

“공작 가문의 저택답군. 마음에 들어. 너는 어떠니?”

“저도 마음에 들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어머니.”

처음 온 수도는 란델리노의 눈을 크게 뜨게 할 매력이 있었다.

수도답게 왕국의 모든 행정기구와 물자가 오가는 분주함을 보냈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게 움직여서 아이의 눈에는 재미가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에 루비로즈 공작부인은 시큰둥했다.

루비로즈 백작령과 메디치 백작령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분주함만 비교하자면 하품이 나올 것 같았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이군.”

“집사는?”

“허리를 삐끗하시는 바람에 쉬시고 계십니다.”

“그렇군. 그러면 푹 쉬어야지. 건강이 우선이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용인들이 딱딱 선을 맞춰서 그들을 맞이했다.

공작령의 고용인들보다 훨씬 교육이 잘된 모습이다.

실리보다는 아니겠지만 아랫사람 관리를 잘 하는 듯싶었다.

본디 공작에게 인사를 했으면 공작부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맞았다.

“란델리노님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메디치 백작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시녀장이 공작부인이 아닌 란델리노에게 먼저를 인사한 것도 황당한데 자신의 호칭을 ‘메디치 백작’으로 했다.

공작부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었다.

란델리노도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눈치챘다.

불안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 어머니…….”

“이게 무슨 짓이지?”

그것은 공작부인으로 자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것은 모욕이었다.

란델리노가 놀라서 그녀를 올려다봤지만 그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났으니까.

공작 가문의 내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실리를 두고 오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저 망할 것의 뺨을 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리 고용인들을 잘 관리하는 시녀장이 자신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 저런 무례를 저질렀을까?

시녀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딴 행동을 했을 리가 없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가 갈리는 것도 참아낼 수 있었다.

“내가 그대를 공작부인이 아니라 메디치 백작으로 대우하라고 명령을 했네.”

“역시 당신이에요. 고마워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하게 웃으면서 공작을 다정하게 바라봤다.

아내가 애정이 담긴 미소로 자신을 보자 그는 표정이 굳어졌다.

강하게 공작에게 항의해도 이해가 갈 일이었는데 말이다.

“이 건국제에 메디치 백작으로 참석하는 것이라서 따로 저택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준비하지 못했네. 이번 수도에 있는 동안에 잘 부탁하지.”

“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공작은 그녀가 화를 내며 따질 줄 알았다.

가문의 안주인이 아니라 메디치 백작으로 대우하겠다는 것은 이 수도 저택 내에서 내정업무에 그 어떤 것도 관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여인이니 참지 못하고 난리를 칠 것이라 예상했다.

그 난리를 본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 뻔했다.

소문이 나는 것도 퍼지는 것도 빠른 수도에서 그것은 참으로 좋은 조롱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북부의 사교계’처럼 그녀의 손아귀에 수도 사교계가 넘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라 여겼다.

‘안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주인’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하려고 했던 계획은 실패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이리 큰 선물을 줬는데 나도 무언가를 줘야죠.”

“당신은 그냥 내가 주는 것을 받기만 해줬으면 좋겠군.”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요.”

그는 자신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아내에게 헛수작 부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고용인들 앞에서 위엄 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선물을 주겠다는데 이렇게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도대체 이번 일을 가슴에 새기며 자신에게 얼마나 큰 엿을 먹이려고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위해주니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군.”

마치 처음부터 자신은 ‘메디치 백작’으로 수도에 온 것처럼 행동했다.

그 당당함은 수도의 고용인들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서로 눈빛으로 대화를 했다.

‘전혀 모욕적으로 느끼지 않으시는데?’

‘정말로 고마워하는데?’

‘공작님이 아내를 위해 그런 명령을 내리셨나 보네.’

‘진짜로 공작이 공작부인을 위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이만 방으로 가고 싶은데 말이야. 좀 피곤해.”

“그래. 이제 막 도착을 했으니까 그러는 것이 좋겠군. 어서 메디치 백작을 안내하게.”

“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녀장은 떨떠름한 얼굴을 다시 고치고는 공작의 명령에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띤 얼굴을 유지하면서 시녀장이 안내하는 방으로 갔다.

“여기서 편히 쉬시면 되십니다.”

“그렇군. 이만 가 보게.”

“네.”

손님 대접하겠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그녀를 안주인이 있는 방이 아니라 손님방으로 데려왔다.

시녀장이 사라지고 공작부인의 시녀들이 짐을 정리했다.

시녀 중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놔두렴. 그이의 말도 틀린 말도 아니니까. 좀 쉬다가 움직이는 것도 좋겠지.”

“알겠습니다.”

이 저택의 시녀장을 어떤 방법으로든 처리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안주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자신을 감시하려고 손님으로 대우하겠다고 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어차피 지금 자신을 감시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상관이 없었다.

정말로 그녀는 일을 도모하기 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 * *

그녀는 우아하게 저택 내의 정원을 구경했다.

“어머니, 정원이 정말 예뻐요. 아무리 예뻐도 어머니의 정원보다 예쁘지는 않지만요.”

“이 멋진 정원을 두고 그리 말해 주다니 기분이 좋구나.”

“진심이에요.”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보고 행복해하는 아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들이 그런 어머니를 향해 웃다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물었다.

“저는 좋은데요. 일하시지 않아도 괜찮으신 건가요?”

“네 아버지가 내가 쉬도록 기회를 줬는데 당연히 써야지. 상대가 준 선물은 함부로 버리는 것이 아니란다.”

이리 공작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도록 해줬으니 되갚아줘야 마땅했다.

그것이 페루제 루비로즈다운 행동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갚아줘야 할지 고민 중이다.

시녀장이야 남편의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으니 따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인데도 의연하려고 한 그 자세를 칭찬하고 싶었다.

“그렇군요.”

“그래. 어떤 식으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리고 그 선물만큼 너도 줘야해. 상대에게 마음을 받은 것인데 적어도 그 마음 이상은 줘야지.”

“네, 알겠어요.”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말을 잘 이해했다.

받은 굴욕은 그 이상으로 상대에게 줘야 함이 맞았다.

자신은 그럴 힘이 없어서 매번 당하지 않았던가.

칸나 고모할머니에게도, 방계들에게도, 가신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해주지 않으면 상대는 바뀌지 않는다.

“이만 들어가자.”

“어머니와 차 마셔도 될까요?”

“물론 괜찮지.”

그들은 사랑스러운 그 모습 그대로 저택으로 들어갔다.

* * *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용인들은 생각했다.

“소문만큼 무서운 분이 아니시잖아.”

“맞아. 영식께서도 저리 좋아하시면서 따르고 있고 말이야.”

“소문이 과장되었나 봐.”

그들은 엄청난 오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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