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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7화 (87/221)

087화 답을 안다 (2)

아이에게 말을 마친 그녀가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도 아이가 이렇게 사과를 하는데 용서를 해주시지요.”

“용서하마.”

공작은 그 모습을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공작부인이 이미 열 받아서 화를 내는 모습을 봐서일까?

그 모습을 보니까 화조차 나지 않고 감정이 잔잔해졌다.

본래였다면 당혹스러움을 느끼다가 분노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공작부인이 먼저 나선 바람에 분노할 때를 놓친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아버지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에 화를 낸 것이 아니라 권력을 지닌 가문의 주인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에 화를 낸 것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란델리노가 아버지를 증오했으나 사과는 진심이었다.

이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귀족적이지 못했다.

지금처럼 무례한 모습을 남들에게 선보인다면 그의 이미지에 나빠질 것이고 어머니의 완벽함에 금이 가게 된다.

“가문의 일원으로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동은 이제 없을 것입니다.”

공작은 란델리노가 말한 권위가 ‘아버지의 권위’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엄연히 가주인 아버지에게 자신이 한 행동은 올바르지 못했다.

훗날 자신이 차지할 가주 자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이었다.

힘이 있는 가주가 되고 싶었다.

그러므로 가문의 주인이라는 자리는 언제나 그 권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도 페루제 공작부인처럼 ‘아버지’보다 ‘가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애정은 없으니까.

그에게 아버지란 자신이 가질 가주 자리를 잠시 차지하고 있는 인물에 불과했다.

* * *

저녁이 되고 어느 영지에 입성하게 되었다.

“공작님, 공작부인 이렇게 영지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이리 환대를 해주니 내가 고맙지.”

“이렇게 좋은 대접을 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식사를 준비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영지의 영주와 그 일가는 그들을 성대하게 맞이해 줬다.

그들이 준비한 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란델리노는 영주가 제공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곧 란델리노의 측근시녀인 아그리피나가 방에 들어왔다.

자신을 따라 방에 들어온 아그리피나에게 말했다.

“내가 네가 낸 문제의 답을 알아냈어.”

“답을 알아내셨다고요?”

아그리피나는 담담했다.

이제껏 답을 못 맞춰서 자신이 계속 힌트를 줬다.

그 힌트들은 아이가 맞추기에는 어려웠다.

현자들의 명언을 어린 란델리노가 알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수도에 도착하면 답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생각하신 답이 무엇인가요?”

“미래”

“어머니의 비호를 받는 입장에 불과한 나를 따르기로 한 것은 나의 ‘미래’를 본 것이 아니야?”

어린 란델리노가 말했다.

그 답을 말하는 란델리노의 눈빛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또 틀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보이지 않았다.

“아닌가? 그러면 답이 뭐야?”

답이 맞는 것을 아는데 왜 머뭇거리느냐는 듯한 장난스러움까지 보여줬다.

아무리 벨로나 공작 가문의 유일한 정실 자식이라고 해도 이렇게 여유로워질 수 있는가?

학대까지 당하던 어린아이의 변화는 그녀에게 놀람을 선사했다.

“정답입니다.”

“사실, 너무 어렵게 생각했어. 그대가 나에게 볼만한 것은 내가 미래에 크게 될 가능성이잖아.”

이 쉬운 답을 어렵게 생각하다니 스스로가 너무 아둔하다고 여겨졌다.

현자들의 명언을 힌트로 주지 않아도 바로 나왔을 답을 내뱉지 못했다는 것은 짜증이 났다.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피나는 ‘나의 사람’이지?”

“네. 저는 이제 진정한 란델리노님의 사람입니다.”

답을 맞히든, 맞히지 못하든 란델리노에게 자신의 미래를 걸어 보려고 했다.

그에게서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답을 맞히니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우리 서로에게 거짓이 없어야겠지?”

란델리노의 눈빛이 차가웠다.

창밖의 달빛과 어둠이 잘 어울렸다.

“내가 너에게 내 사람이 되라고 했잖아. 그렇지?”

“네. 맞습니다.”

아그리피나는 긴장했다.

어렸지만 란델리노에게 뿜어져 나오는 서늘함은 어린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루비로즈 가문에는 할아버지도 계시고 삼촌도 계시지.”

루비로즈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페루제 루비로즈였으나 엄연히 가주는 그녀의 아버지였고 후계자는 그녀의 아우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삼촌이 루비로즈 백작이 되겠지만 말이야. 삼촌이 돌아가시면?”

레무스 루비로즈는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임에도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가문을 이을 후계가 단단해야 가문이 안정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두 사람 모두가 죽는다면 그 가문의 주인 자리는 비워지는 상태이고 이는 혼란을 야기한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있기에 가문의 혼란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나 미래를 이을 후계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삼촌은 혼인도 하지 않으셨고 따로 사생아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삼촌에게 자식이 없는 것은 가문에서 큰 문제였다.

그런데 아직도 삼촌은 혼인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것을 허락했음을 뜻했다.

“후계자가 혼기가 지났음에도 미혼으로 그대로 두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아.”

“그리 따지면 공작부인께서도 늦게 혼인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처럼 원하는 상대와 혼인을 하길 바라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가문을 우선시하잖아. 가문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일은 미리 막아 내는 분 아니야? 나는 그리 알고 있는데?”

눈빛을 보니까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 자신에게 물어보고 있다.

이것은 확인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아그리피나는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그리고 곧 등 뒤에 번개가 내려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란델리노의 뛰어남에 희열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 일어날 싸움에서 우리는 승리하게 되리라.

승리의 확신은 얻었으나 궁금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글쎄… 어렴풋이 느낀 것은 꽤 되었고 확신하게 된 것은 얼마 전이야.”

“어떻게 아셨는지요?”

“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공작가문의 후계자라고 말하지만 단 한 번도 어머니의 후계자라고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것 만으로요?”

“아니, 처음에는 그 사실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어.”

꿈 덕분에 알게 되었다고 하면 미친놈으로 보고 손을 털 가능성이 높았다.

아그리피나는 이성적이었고 예지몽과 같은 것들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그리피나가 이해할 선에서 자신이 어떤 판단을 내렸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분의 아들이니까 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거든.”

꿈속의 자신은 그러했다.

부모의 자식이 뒤를 잇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자신도 어머니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삼촌을 미혼으로 둔다는 것은 나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확신했었지.”

그래서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

크게 당하고 난 뒤에 상황이 파악되었고 부랴부랴 대응을 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런데 아니잖아. 그건 내 착각이잖아.”

그 착각으로 방심한 대가는 컸다.

어머니의 아들임에도 어머니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고 2인자에 머물러야 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아이에게 루비로즈 가문을 주고 싶으니까.”

어머니가 이미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로 낙점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루비로즈 가문의 핏줄이 아니니까.”

꿈속에서 자신은 ‘혈통’이라는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다른 귀족 가문이었다면 무조건 1순위로 고려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루비로즈 페루제는 일반적인 귀족과 달랐다.

평민이 귀족의 자질을 갖췄다고 생각이 들면 귀족이 되도록 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그녀가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사람을 선택할 것이라고 믿었다.

설령 핏줄이 아니더라도 란델리노 자신은 그녀의 아들이면서 아주 많이 유능했다.

“그렇지?”

방 안이 조용해졌다.

란델리노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 안의 침묵에 익숙해질 때쯤이었다.

“공작부인께서 후계자로 생각하신 분이 있다는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

“역시 그렇구나.”

“들리기로는 그분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치명적인?”

꿈속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그의 눈빛에 호기심이 엿보였다.

“네. 그 치명적인 문제만 아니었다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미리 후계자로 선언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지?”

어머니의 성격상, 자신이 후계자라고 점찍었다면 바로 공표를 했을 듯싶었다.

그 정도로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이인 것이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치명적인 문제를 가졌음에도 후계자로 삼고 싶은 인재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극비로 다뤄지는 문제로 접근하려는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하니까요.”

“그러면 너는 어떻게 살아 있어?”

“제 동생이 다행히 공작부인에게 능력을 인정받아서 나름 총애를 받고 있거든요.”

어머니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진짜 인재 중 인재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얼른 자신의 사람으로 미리 포섭해야 한다.

“그 동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아이도 곧 수도로 온다고 하니까 오면 만남을 주선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그리피나의 동생이라서 자연히 자신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그리피나는 아그리피나고 그녀의 동생은 그녀의 동생이다.

형제간에 적이 되어서 피를 흘리는 일은 역사 속에서 많이 벌어졌다.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동생은 별개로 여기는 것이 마땅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내가 루비로즈의 핏줄이 아닌데 나를 따르려는 이유는 뭐야?”

“저는 실리 시녀장님의 자리를 잇고 싶어요.”

“실리의?”

대부분 평민 여인들은 자신이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 상상을 한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상상은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어머니다.

불가능한 꿈이 야심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그리피나는 ‘대부분의 평민 여인’과 달랐다.

자신에게 문제를 내는 것부터 다르기는 했지만 야심이 실리 뺨을 칠 정도인 듯싶다.

“네.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가문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가지고 싶습니다.”

“의외네? 평민이 귀부인이 되는 일인데 그것보다 실리의 자리가 낫다고?”

실리 시녀장의 자리는 권리와 함께 책임도 많았다.

어머니의 최측근이다.

어머니의 수족으로 자신은 상상도 못할 만큼의 업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뿐이랴?

어머니의 기준에 맞는 능력과 판단을 해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어머니의 주변 모든 것들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의 도움이 될 자, 적이 될 자, 가치가 없을 자 등 수많은 인물을 분류해야 했다.

그것들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죠. 누가 봐도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되면 인생이 펴는 거죠.”

“뭔가가 있구나? 그 장점을 상쇄할 단점이 말이야.”

심드렁한 아그리피나의 표정에 귀부인이 되는 것이 생각보다 좋지 않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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