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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6화 (86/221)

086화 답을 안다 (1)

어느 순간부터 마법사 추적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 마법사들이 싹 사라졌다.

심지어 거주지가 파악되던 ‘일정 수준 이하’의 마법사까지 말이다.

마법사의 추적은 어려운 일이다.

마나를 변환하여 쓸 줄 아는 그들은 환영을 만들기도 하고, 불꽃을 일으키기도 하며 도망을 쳤으니까.

“당신이 가져오게 한 이 마법 물품을 보니까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더군.”

그가 살짝 마법이 깃든 나무상을 쳤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말이다.

“왕실의 최고 기사들이 은밀히 움직였음에도 찾지 못했다. 그들보다 마법사를 더 잘 추적할 사람은 누구일까?”

왕실 기사는 정말 실력이 최상위급이어야 될 수 있었다.

마법으로 추적을 피하려고 해도 미세하게 남은 흔적을 못 찾을 리가 없었다.

“이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마법사들을 잡는데 도가 튼 무리가 있지.”

수많은 마법사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몰아서 죽인 것은 신전이다.

당연히 그들의 추적과 처단을 주도했던 것도 신전이다.

그들을 찾아내고 잡는 능력과 경험은 왕실 기사보다 신전이 월등했다.

“그 신전과 그대는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가 아닌가.”

싸구려 마법 물품 하나로 그런 것을 추측해 낼 줄은 몰랐다.

공작부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으니까.

“제가 믿음이 강하지 않겠습니까? 교황 폐하께서 어여삐 여겨 주시고 계시지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마셨다.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렇지만 교황 폐하께서 죽여 마땅한 이단자들을 저에게 보낼 이유는 아닙니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잠잠해지고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감히 자신이 감춘 것을 알아냈다는 것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고, 이런 일에 자신이 흔들렸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일 수도 있다.

“오해다?”

“네.”

침묵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고요함이다.

그런 분위기가 유지되던 가운데 그가 화통하게 웃었다.

“뭘, 그리 진지하게 구는지 모르겠군. 이건 놀이이지 않은가. 거짓말도 할 수 있는 놀이.”

그가 웃기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움직이려던 순간, 공작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이가 일어났을 시간인 것 같군. 부르도록 하지.”

그녀가 빤히 공작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이야기해 봤자 진전될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도록 하지요.”

공작이 란델리노를 데려오라고 말을 하고 있던 때.

* * *

란델리노는 이미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그는 어떤 종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많이 접고 펼쳐봤는지 너덜너덜했다.

그 종이에는 아이의 필체로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그리피나가 알려 준 힌트? 힌트가 아니라 수수께끼?

—이것을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지만 피할 수 없으며, 항상 당신 앞에 놓여 있었다.

—이것의 가장 좋은 점은 한 번에 하루씩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불가능이고 겁 많은 자들에게 미지이며 용기 있는 자들에게 기회다.

—현명한 사람은 이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므로 지나간 일을 생각할 틈이 없다.

이것? 이것은 무엇이지?]

아그리피나가 준 숙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단지 오답을 말할 때마다 힌트를 주는 것으로 바뀔 뿐이었다.

란델리노는 그 종이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그는 더는 답이 궁금하지 않았다.

요즘 잊을 만할 때마다 꾸는 이상한 꿈에서 그 답이 나왔으니까.

“현자들의 명언을 힌트로 주다니 아그리피나도 참 대단해.”

그렇다.

아그리피나가 준 힌트는 현자들의 명언으로 실제 존재하는 말들이었다.

아직 어린 자신에게 이것을 힌트라고 줬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답지 않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의 꿈은 좀 빨리빨리 알려 줄 것이지. 답을 알아내기 위해 고생이란 고생을 다한 다음에 알려 주네.”

이 답을 알아내기 위한 시간을 아꼈다면 어머니의 마음에 들 만한 공부를 한 자라도 더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까다로운 분이시다.

그분의 마음에 드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으셔서 그 속은 어떨지 모를 분이었으니까.

“아직은 어리니까 감추는 것은 없으시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지겠지.”

아들조차 그 속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 속을 감출 줄 알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상대에게 비수를 꽂을 줄 알았다.

자신의 친부를 방심시켜서 루비로즈 백작가문을 손아귀에 쥔 것은 그런 연기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아이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는 법이니까.”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으나 이상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내가 순수하다고 믿도록 해야겠지.”

아이는 어리기에 무지하고 무지하기에 순수한 것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고, 그것은 순수성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차가 멈췄다.

어머니가 탄 마차에 자신을 다시 태우기 위해 멈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자신이 깰만한 시간이었다.

똑! 똑!

마차 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부인께서 다시 마차를 옮겨 탈 수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이다.”

시녀의 말에 란델리노는 당당하게 대답을 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바로 페루제가 있는 마차에 탔다.

* * *

“어머니, 제가 너무 오래 잤죠?”

“아니다. 처음 경험하는 여정이니 피곤한 것은 당연하지.”

공작 가문의 적통임에도 대우를 받은 적이 없어서 이렇게 장시간 마차를 탈 일도 없었다.

타 영지의 연회에 초대를 받은 적도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칸나 백작부인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지 내를 돌아다니고 싶어도 마차를 내어줄 마부조차 없는 것이 과거의 란델리노였다.

“어머니가 없는 마차에 홀로 있으려니 너무 외로웠어요.”

“저런! 그러면 잠시 마차를 세우게 하지.”

“그러면 이 어미가 네가 깬 것을 알고 마차를 세우게 하고 너를 여기 오게 했을 것인데 말이야.”

그의 아버지인 공작이 있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적통은 자신밖에 없었으니 아버지가 죽으면 공작자리는 자신의 차지다.

밝혀지지 않은 사생아가 있고 아버지가 입적을 원한다고 해도 어머니가 공작 가문에 그것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확고하게 말한 것처럼 벨로나 공작 가문에서 정실부인의 아들은 오직 자신 1명이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진실이다.

“너는 나에게는 할 말이 없느냐?”

공작이 무심하게 아들을 바라봤다.

마차에 타자마자 그녀에게는 인사하고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분명히 아까는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런데 잠을 좀 잤다고 이렇게 돌변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 인사조차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으시는 분이 제가 하는 다른 말들은 들으시겠어요. 아버지 귀찮게 해드리기 싫어서 말을 걸지 않았어요.”

란델리노는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꾸는 예지몽에 고마웠다.

쓸모도 없는 감정을 소모하지 않게 해주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감정을 줬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가능성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일에 헛된 희망을 품기도 싫었다.

그럴 시간에 권력을 쥐기 위한 소양을 기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외면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가장 컸다.

꿈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었으니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고 그것이 모여서 여러 번이 되었다.

그 기회들을 고민조차 하지 않고 거부했다.

그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표출된 것이다.

“너…….”

공작은 아들이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자 당혹스러웠다.

분노보다는 당혹스러움이 그를 엄습했다.

가끔 영지에 왔을 때마다 봤던 아들은 기대감으로 눈빛이 빛났으니까.

자신의 외면과 방치에 한결 같았었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은 참으로 낯설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투냐?”

공작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화가 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들렸다.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페루제가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이기 이전에 가문의 가주다. 감히 가문의 주인에게 그따위 말투로 말을 하다니!”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공작이 가문 안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주인이었기에 화가 난 것이다.

가문의 주인에게 비아냥거리다니!

이것은 가주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을 넘어서 가문을 무시하는 짓거리였다.

자식부터 가주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데 아랫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가문의 기강을 흐트러지게 만들 일이다.

“벨로나 공작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스스로 가문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는구나!”

게다가 자식의 교육은 안주인의 역할이다.

아들의 무례는 안주인인 자신이 제대로 자식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 자신에게 이것은 그 완벽함이 깨지는 것이었다.

“어머니!”

란델리노는 그녀의 일갈에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에게 점수를 따도 부족할 판국에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지금 놀랄 틈이 없었다.

어서 수습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예의를 잊고 무례를 저질러서 어머니를 욕보였습니다. 아버지,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마법 덕분에 달리는 마차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이렇게 예의를 다하며 사과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는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다는 말을 듣기 충분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공작에게는 가문의 일원으로 가주에게 무례하게 군 것을 사과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음과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모습에 그녀의 굳었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아직 어린 나이다.

한순간에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경험도 부족하니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

후계자로, 공작 가문의 아이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충분히 그 무례를 이해할 수 있다.

기어코 그녀는 아들의 무례를 이해할 근거를 찾아냈다.

이해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사과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잘못을 알고 바로 사과를 한 것은 잘했다. 무릇 귀족이란 자신의 잘못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도록 노력해야지.”

기본이 나아지니까 아들의 장점이 보인다.

란델리노는 아무래도 귀족의 소양을 타고 난 것 같았다.

진정한 귀족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야 한다.

그래야 발전하고 남들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

자신의 단점을 고치지 않고 발전하지 않는 작자가 어찌 가문을 드높일 수 있겠는가.

공작 가문에 맞는 자질을 지녔다.

“세상에는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내 아들이 그런 작자들과 달라서 다행이구나. 물론 자기 잘못도 모르면서 거짓 사과를 하는 것들과 같아지지 마렴”.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윙크하며 란델리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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