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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5화 (85/221)

085화 체스

곧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제 진짜로 놀아 볼까요?”

“기다리느라 기운이 다 빠지더군.”

“아이에게 질문이라도 해보지 그러셨어요.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만들고 싶다면서요?”

작은 비아냥거림에도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데는 도가 텄음을 알았으니까.

일종의 내성이 생긴 것이다.

“아이의 의사도 존중해 줘야지.”

아이가 원하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는 말.

정말 핑계도 좋다.

아이에게 자신의 방관을 떠넘기는 꼴이다.

“아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넘어갔다.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에 비하면 ‘란델리노’는 가치가 낮았다.

“나부터 질문을 하지.”

“그러세요. 그냥 하는 것은 재미가 없죠.”

그녀가 손짓하자 시종이 체스판과 그것을 둘 나무기둥을 가져왔다.

그가 그것을 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로 말했다.

“좀 더 어렵게 해도 재미가 있을 거예요.”

“흔들리는 마차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인가?”

“마법으로 만든 것이니까 괜찮아요.”

그녀가 의문을 바로 해소시켰다.

공작의 눈빛이 커졌다가 돌아왔다.

“마법이라고?”

“네.”

마법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이루는 근간에는 마나라는 에너지원이 있다.

마나는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조상들은 그 에너지원을 변환시켜서 형태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방법이 바로 마법이다.

그녀는 남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그런 듯싶었다.

“자기 순서가 되면 질문을 하는 것으로 하죠.”

“그러지.”

벨로나 공작은 그런 그녀를 신경쓰지 않았다.

표정으로는 그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저부터 질문하지요.”

그녀가 흰색 말을 잡으며 말했다.

체스는 실력이 낮은 상대가 흰말을 잡고 더 높은 상대가 검은 말을 잡는다.

만약 이곳에 여러 사람이 있고 그들을 지켜봤다면 일부는 그녀가 남편을 자신보다 더 높다고 여긴다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인간은 의미 없는 작은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생물이었으니까.

겉으로 보기에 공작부인의 선택은 남편의 격을 높여주기 위함으로 느껴졌다.

“좋아.”

정말로 남편을 자신보다 위로 생각했다면 화살로 죽이려고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작의 대답을 듣고 흰말을 체스판 위에 뒀다.

탁!

“폐하께서는 저를 위험인물로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가 대답하고 검은 말을 움직였다.

탁!

“무슨 의도로 시간을 끌다가 건국제에 맞춰서 가는 거지?”

그 질문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건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데요.”

‘놀이’에 부합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대가 체스를 두면서 하도록 변형하지 않았는가.”

공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얄미운 표정은 덤이다.

“우리가 애도 아닌데 더 바꿔서 놀아도 괜찮겠지. 좀 더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을 하지.”

“제가 거짓을 말할 수도 있어요. 놀이니까요.”

“감안해서 듣지.”

“좋아요. 대답하죠.”

그녀가 호탕하게 대답했다.

한 치의 거리낌도 없는 시원함이다.

“헬리오 대공이 귀빈으로 방문했는데 안주인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잖아요.”

지나가던 개가 비웃고 가던 길을 갈 말이었다.

공작이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에게 선왕 암살배후라고 했던 그대가 그런 것을 눈치를 본다고?”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으면 그딴 말을 하지 못한다.

“맞아요. 내정업무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던 때고요.”

그녀가 가문의 고용인들과 가신 가문의 안주인들까지 모두가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넘어서 숨막히게 가문 분위기를 만들어 놨다.

“그걸 믿으라고?”

“아까 말했잖아요. 놀이니까 거짓을 말할 수 있다고요.”

“누구도 믿지 못할 말을 하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지.”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말을 했고 감안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모욕이라도 당한 듯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완전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게 거짓입니까? 그리고 저는 대공전하에게 무례한 적이 없습니다. 무례는 대공전하가 하신 것이고요.”

진실이 거짓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거짓이 들통난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 안다.

“그렇다고 치지.”

“이제 제가 질문을 하죠.”

그녀가 흰말을 체스판에 뒀다.

“도대체 가문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저를 막으시려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그녀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가문을 더 높게, 더 위대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가주라는 작자가 그것을 돕지는 못할망정 막으려고 악을 쓰고 있었다.

물론 성안을 장악하고 군대로 남편을 위협했던 과거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죽지 않았으면 된 것이니까.

“벨로나 가문이 아니겠지. ‘그대의 가문’이겠지.”

차가운 목소리였다.

체스판을 보던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가 검은말을 체스판에 두면서 말했다.

“그대의 가문이 ‘루비로즈’가 아니라 ‘벨로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두 가문이 대립할 시에 벨로나 가문을 선택할 수 있느냐는 뜻이 담겼다.

부부간의 시선이 맞닿았다.

서로가 물러섬이 없었다.

그러다가 페루제 공작부인이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두 가문 모두가 제 가문이죠.”

그녀는 벨로나 가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루비로즈 가문을 택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로나 가문과 척을 질 수 있음을 인정한 것과 같았다.

양쪽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언제든 한쪽을 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일반적인 경우에는 맞는 해석이다.

그녀는 일반적인 경우에 대입해서는 아니 된다.

공작은 아직도 몰랐다.

그녀가 ‘루비로즈 가문’을 얼마나 위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든지 루비로즈 가문을 위해 벨로나 가문을 버릴 수 있다는 대답임을 몰랐다.

그들 간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체스가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결국 한 번의 질문이 남았다.

공작이 체스판에 말을 두고 말했다.

“체크메이크.”

그의 승리였다.

막상막하였으나 결국 그녀가 지고 말았다.

“제가 졌군요. 역시 실제로 전장에 나가는 분을 이기기는 역부족인가보네요.”

그녀는 패배에 짜증내지 않았다.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이런 패배는 얼마든지 당할 수 있었다.

이 패배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마지막 질문을 하시지요.”

그녀가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여유로움이 가득한 얼굴이다.

얼굴만 보면 그녀가 승자처럼 보일 정도다.

분명히 이긴 것은 공작 자신인데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가 큰 숨을 들이켜고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녀는 놀이에 집중하느라 마시지 못한 차를 마시려고 했다.

미리 시녀가 마차 안에 준비해놓은 차였다.

“신전과 결탁하여 마법사를 모았나?”

그녀의 입술에 찻잔이 닿기 전에 멈췄다.

여유를 즐기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마법사는 마나를 변형하여 사람들이 보이게 변환하는 사람이다.

무지한 백성들에게 마법사는 신처럼 보이기 충분했다.

자신들은 쓸 수 없는, 기적처럼 보이는 일을 만들어 내니까.

신관은 신에게 받았다는 신성력으로 사람을 치료하고 오염된 마나로 인한 피해를 정화하며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줬다.

신에 대한 믿음을 전도해야 하는 신전의 입장에서 마법사는 전도를 방해하는 적이었다.

신이 아닌 악마의 힘을 빌리는 이단이었다.

그들을 악마의 하수인으로 칭하고 마법사 사냥에 나섰다.

여인은 마녀라며 격하하여 불렀다.

그녀가 마시려던 찻잔을 잔 받침에 뒀다.

“성서를 부정하는 부정한 무리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알아낸 근거를 이유로 성서의 내용들을 부정했다.

성서를 진실로 여기며 설파하는 신전을 거짓으로 만드는 주장을 펼쳤다.

그녀는 에클레시아의 신실한 신자로 유명했다.

“지금 하신 말이 저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생각은 하신 것입니까?”

이단으로 지정된 무리와 어울린다는 것은 그녀를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말투에는 한껏 짜증이 담겨 있었다.

“그래. 그대의 반응이 지극히 당연하지. 자연스럽고 당연해.”

공작이 그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바라봤다.

“그런데 왜 나는 그대가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모르겠군.”

고대에는 ‘마도 왕국’이라고 하여 마법이 번성했었던 때도 있었다.

에클레시아가 퍼지고 신전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마법은 쇠퇴하게 된다.

마법사를 악마의 부하로 처단에 나서면서 그들이 씨가 말랐다.

교황의 권력이 하늘에 닿을 때의 기록을 보면 끌려가는 마법사들이 너무 많아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각 왕국에서는 최대한 많은 마법사를 모으고 양성하려고 하고 있지.”

지금은 예전보다 교황의 힘이 강하지 않았고 각 왕국은 신전을 견제하고 억누르기를 원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성력은 백성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그 성력에 대항할 만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 수단이 마나가 변형된 마력이다.

‘악마의 하수인’으로 불리던 마법사들은 ‘신전의 대항마’로 떠올랐다.

“교황폐하의 명을 어기고 비밀리에 마법사를 숨겨 주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벨로나 공작이 아는 이야기를 페루제 공작부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모르쇠를 하며 아버지께 들었다고 주장했다.

“과거보다 못해도 그 위세를 무시하지 못해서 대놓고 마법사를 모이지 못하지.”

예전보다 힘이 약해진 것이지 교황의 힘은 강했다.

비록 성도로 쳐들어온 알펜 왕국의 군대로 인해 도망친 전적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신전의 인맥과 자금력, 백성의 지지를 무시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과거와 달리 마법사들은 자잘한 일을 하면서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나요?”

신전 전성기에는 마법사란 마법사는 모조리 죽였으나 시대가 달라졌다.

민생을 위해 일정 수준 이하의 마법사들은 잡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체스를 둘 수 있게 한 상도 ‘살아남은 마법사들’이 만든 것이다.

“마법을 발전시킬 수 없는 어중이떠중이를 말하는 것인가? 그대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이 그들만으로 만족했다고? 장난이 심하군.”

성서를 부정할 과학적 근거를 알아내지 못할 사람들만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신전이 ‘악마의 하수인’으로 칭한 마법사란 시대를 앞선 지식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멈췄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하지.”

마법사를 양성한다는 말은 왕국의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왕국에서 그들을 모으기 위해 안달이 난 것은 당연했다.

“미래를 위해 마법사를 모으려고 하는데 말이야. 어느 순간 싹 사라졌어.”

비밀리에 마법사들을 데려와서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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