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수도로 출발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니었다면 평생 볼 수 없을 정도의 최상위급이었다.
“한 번만 공작부인을 뵐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공작부인께서 좋아하실만한 선물은 무엇일까요?”
“연회를 열려고 하는데 공작부인께서 좋아하실 만한 컨셉일까요?”
“공작부인께서 싫어하시는 음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공작부인이 지명한 사교계 최측근인 4명의 부인들은 바빠졌다.
비명을 지를 만큼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줄이라도 한 번 대보려는 가문들에서 선물이 끊이지 않고 왔다.
그녀에게 줄을 댈 이유는 많았다.
군사력, 자금력, 권력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페루제 공작부인의 최측근들에게라도 줄을 대려고 아양을 떠는 사람들도 넘쳤다.
즐거운 비명이었다.
그들은 이 부와 권력을 놓치기 싫었다.
그들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요소를 잘 알았다.
공작부인은 절대적 권력으로 사교계에서 군림해야 했다.
“어미가 어찌 가르치기에 감히 그분을 욕을 하는 것이냐!”
공작부인을 욕했다는 작은 소문이라도 들리면 당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얘야, 얼른 사죄드리렴.”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어미와 자식이 무릎을 꿇으며 빌 정도로 혼을 냈다.
공작부인의 권위가 흔들림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이 흔들린다는 것과 같았다.
불만이라는 작은 불씨조차 밟아 놓아야 했다.
“제가 그 악랄한 것을 아주 혼쭐을 내줬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거리를 하지 못할 것이에요.”
“사람인데 그런 뒷말정도는 할 수 있지요.”
“어찌 이리도 마음이 아름다우십니까. 이리도 선하신 분을 욕하다니 더 혼을 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작부인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공작부인, 제가 들었는데 말입니다. 저번의 ‘작은 조언’을 건넸던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기억이 납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글쎄, 부인께 거짓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실망이군요. 거짓으로 누군가가 다치는 일은 없어야겠죠. 이게 다 위아래 없이 나댈 수 있는 분위기 탓이겠죠. 그대가 알아서 혼을 내고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세우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교계를 지배하는 공작부인의 최측근 자리를 지켜내야 했다.
그것을 위해서 공작부인의 눈에 들려는 사람들을 떼어 놓는 노력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상대에 대해 조사하고 약점을 알아내서 공작부인에게 말하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이런 공작부인의 전략은 사람들을 무디게 만들었다.
정부들을 괴롭힐 수 있다는 희열감.
누군가의 위에 서면 느낄 수 있는 우월감.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게 만드는 소유욕.
지금의 자리를 지키려고 움직이게 하는 권력욕.
공작부인이 주는 자잘한 불만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런 불만들은 공작부인이 주는 쾌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
그녀가 자신의 부름을 받고 온 귀부인들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반대편으로 가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비록 그녀의 노력이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일지라도 그녀의 노력은 성과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벨로나 영지를 떠나야 하는 날이 되었다.
건국제가 다가온 것이다.
수많은 시종과 시녀들,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양을 가늠하기 어려울 물자가 마차에 실렸다.
고용인들도 놀랄 양이었다.
“엄청나다. 수도에 가면서 이렇게 많이 무언가를 가져간 적 있어?”
“아니. 내가 여기 있으면서 이렇게 많이 챙겨서 간 적은 없었어.”
“이것들을 다 어떻게 쓰려고 가져가는 것이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냐?”
“그건 그렇지.”
그것이 페루제 공작부인이 넓은 마음으로 귀족들에게 그 물자를 뿌리겠다는 의미인지, 왕실에 받침으로 겉으로나마 충심을 보이려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양산으로 햇빛을 가려 주는 시녀와 함께 그녀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집밖으로 나왔다.
아들과 손을 잡은 모습이 제법 사랑스러웠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일렬로 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과거에 그녀를 하찮게 봤던 고용인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차에 다가갔다.
그녀는 우아했고 란델리노는 그런 그녀처럼 우아하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이제야 고용인들이 고용인답게 행동을 하는구나.”
“기강이 잡혔다는 뜻인 거죠?”
“그래. 란델리노 네 말이 맞아.”
그들을 호위할 기사들도 있었는데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2개였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깃발 말고 다른 가문의 것도 있었던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벨로나 공작부인이지만 동시에 메디치 가문의 백작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깃발에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이다.
안주인이기 이전에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백작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깃발에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공작 가문과 백작 가문의 동행인 것이다.
이는 라스타 왕국의 최고 가문과 알펜 왕국의 최고 가문 간의 결합을 보여주는 장관이었다.
그녀는 아들과 메디치 가문의 문양이 있는 마차를 타려고 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거기로 가는 것이지?”
그녀가 란델리노와 함께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대가 메디치 백작이기는 하지만 란델리노는 벨로나 공작가문의 아이고 그대는 나의 부인이지.”
벨로나 공작이었다.
그녀는 란델리노를 내려다보고 다시 메디치 가문의 마차를 바라봤다.
주저하지 않고 벨로나 가문의 마차로 아들을 이끌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맞는 말이에요.”
“빨리 인정하는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귀족적인 것이죠.”
그는 아내의 깔끔한 인정에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 여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도 상대방의 기분이 나쁘게 만드는 것일까?
인정하니까 마음이 시원하다는 표정이 사람을 더 열 받게 만들었다.
“저희와 같은 마차를 타겠다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마차 안에 들어와서 앉자마자 한 말이었다.
그저 사실을 말한다는 듯이 감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명색이 남편이자 아버지 아닌가? 가족인데 따로 가면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지.”
솔직한 마음이야 꼴도 보기 싫은 부인이 다른 마차에 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고 부인이다.
따로 마차를 타고 간다면 뒤에서 말이 나올 것이 자명하다.
이미 수도에서는 온갖 이야기가 퍼져있겠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아이가 불편해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란델리노는 아직 어머니처럼 마음을 한순간에 끊어 내는 것을 하지는 못했다.
결심은 했지만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것이다.
그가 어색해하며 눈치를 봤다.
그가 아버지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내렸다.
바닥을 쳐다봤다.
“이제라도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마련해 보려고 하거든.”
“오붓한 시간? 좋아요. 그러면 정답게 대화를 나눠 보죠.”
서로가 서로에게 애정이 없었다.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거짓 웃음만 판쳤다.
마차 안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그러니까 더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시원해서 좋군.”
“그냥 하는 것은 재미가 없으니 좀 다르게 했으면 해요.”
그녀가 란델리노에게 시선을 줬다.
남편에게 보여 줬던 차가움과 정반대였다.
따스했다.
“란델리노, 라스타 왕국에는 ‘yes or no’라는 놀이가 있단다.”
“yes or no요?”
“그래. 질문하고 대답을 하는 놀이인데 대답은 오직 예, 아니오로만 말해야 하지. 어때요?”
일종의 진실게임으로 오직 예,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있는 것이 어색한 아들을 위해 놀이를 제안했을지 모른다.
아이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밝아졌으니까.
“대답을 못하면요?”
“원래는 벌칙이 있지만 너는 없는 것으로 하자.”
“알겠어요.”
란델리노는 어머니와 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괜찮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니까.
그것을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보다 자신을 보호하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믿었다.
“당신도 괜찮지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공작은 이 놀이에 참여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아들보다 그녀와 할 말이 있었다.
“고마워요.”
처음의 답변자는 란델리노였다.
“요즘 가정교사들이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오랫동안 학업에 매진하지 못한 것이 아까울 정도라고 말이야.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알지?”
“네!”
란델리노는 자신에 대한 칭찬에 활짝 웃었다.
힘찬 대답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 물음에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칭찬이기도 했지만 그를 방치한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었기 때문이다.
“검술을 배워보고 싶어 한다고 들었단다. 아버지 대신에 이 어미가 검술 선생을 초빙해도 되겠니?”
“네!”
란델리노는 검술을 배워서 어머니를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대답했다.
공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본디 부인이 자식들의 교육을 맡는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직접 관여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검술이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암살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전략과 검술이다.
그것은 남성의 영역으로 가주가 직접 그 선생을 초빙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녀는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하지 않은 공작을 욕한 것이다.
“네가 벨로나 공작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임을 명심하고 있니?”
“네.”
만약에 정부가 있다면, 만약에 그 정부에게 자식이 있어서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고 싶다면 포기하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만약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너의 머리 위에 있으려는 자들에게는 작은 경고 정도는 해줘도 된다는 것도 알지? 네 곁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마렴.”
“네!”
그 ‘머리 위에 있으려는 자들’은 혹시 모를 정부와 그 자식이었다.
란델리노는 그 심중의 의미를 전혀 몰랐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옷태가 살아 있구나. 이런 아이를 방치하다니 칸나 고모님은 정말 쓰레기구나. 그치?”
“어…….”
아무리 쓰레기 같은 고모할머니라고 해도 아버지의 고모였다.
란델리노는 잠시 눈을 굴리며 눈치를 봤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네.”
란델리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한 표정이다.
자신의 고모할머니는 쓰레기가 맞았으니까.
너무 대놓고 긍정을 하니까 조카된 입장에서 민망한 공작이었다.
“너는 부인에게 충실하고 본처의 아이에게 헌신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단다. 할 수 있지?”
네 아버지처럼 아이를 방치하는 쓰레기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아이를 놀아주는 다정한 눈빛으로 남편을 공격했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다.
“네.”
이 놀이는 놀이를 가장한 남편 엿먹이기다.
그 이후에도 물음 하나하나가 벨로나 공작을 비꼬는 말들뿐이었다.
이렇게 전부 그런 내용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이가 있어서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점점 붉어지려는 얼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모자간의 즐거운 시간이었다.
대화할 거리가 끝나가고 아이가 피곤하여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가 마차를 세웠다.
“뒤에 있는 마차에 눕히고 부르면 그때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기사가 아이를 안고 사라지자 마차 안은 정적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