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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2화 (82/221)

082화 사람을 따르게 하는 방법

자기는 계속 총애를 받을 것이라고 여겨도 그 총애가 무한하지 않다.

만약 그 가치가 더 없어진다면 귀족 가문에서 그들을 안주인으로 둘 이유가 있을까?

그동안 그들이 누린 것들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까?

누렸던 것만큼 악착같이 그들이 가진 것을 앗아갈 것이다.

거지꼴로 살게 되거나 다른 이의 정부가 되거나 사창가의 창부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은 귀족과 맺어질 기회라도 있지만 일반적인 여인은요? 과연 하굿간 하녀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을까요?”

아름다운 여인은 귀족에게 받은 돈을 잘 모아서 호위호식할 기회라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대부분의 여인들에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귀족들의 눈이 얼마나 높은데 그들에게 시선이 가겠는가.

정말 특이한 성적 욕구를 지녀서 상대를 찾지 못하는 변태들도 상대의 얼굴을 봤다.

뭐, 그래 봤자 정부에서 끝이다.

더는 올라가지 못한다.

“어느 누가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겠습니까?”

평범한 여인도 아름다운 여인도 도전할 수 있었다.

능력이 있고 공작부인을 위한 공적만 세운다면 가능했다.

사내의 경우, 여인처럼 정부가 될 기회조차 없었다.

귀족 여인들은 평민 남성보다는 부유한 상인 집안의 사내 혹은 기사나 같은 귀족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귀족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고 자신의 자식이 미래의 가주가 될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귀족 가문의 데릴사위로 자기 자식이 귀족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상대의 세력을 뺏어 오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상대를 없애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대를 자기 세력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고용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을 써야 한다.

“누군가를 포섭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 하죠.”

공작은 공작부인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없었다.

고용인들에게 돈을 뿌린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란델리노는 시녀의 가르침으로 자기 사람에게는 적절한 긴장과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란델리노가 깨달음을 얻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어머니보다 좋은 것을 그녀에게 줄 수 없었다.

자신은 어머니의 보호를 받는 아이에 불과했다.

그가 가진 돈도, 권위도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그를 보며 시녀가 웃었다.

집중하는 란델리노를 깨우기 위해서 그녀는 박수를 크게 쳤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영식께 숙제를 내드리죠.”

“숙제?”

“네.”

그녀가 기분이 좋았다.

“혹시 싫으신가요? 원하지 않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일개 시녀이고 영식께서는 그분의 아들이니까요.”

“아니야. 하겠어.”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그녀를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응당 그래야했다.

그래야 선택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영식께서 저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말해 주세요.”

“무엇이든지?”

“네. 답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을 말해 주세요. 그것이 무엇이든지요.”

란델리노는 그 말에 눈이 크게 떠졌다.

솔직히 그는 놀랐다.

란델리노에게 그녀가 그 자신을 선택하게 만들 무언가를 지녔다는 뜻이었으니까.

“정말로 나에게 있는 것이야?”

“물론입니다.”

어머니에게 나온 것들이 아니었다.

온전히 자신이 가진 중에서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어준 숙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가정교사도 아니고 한낱 시녀가 내준 숙제였지만 그 어떤 것보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듣기만 하던 란델리노가 입을 열었다.

“기한은?”

시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쉬운 길을 포기했다.

그녀는 고용인에 불과했다.

그가 답을 내놓으라고 하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다.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길 원했다.

스스로 답을 말하기를 원했다.

눈빛에는 그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왜 핏줄도 아닌 란델리노 영식을 애지중지하나 싶었다.

이제는 아니다.

왜 공작부인이 그를 아들로 대우해 주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선택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하나 이상은 부족한 것들을 가졌다.

도전할 용기, 스스로를 발전해 나갈 의지, 그것을 이룰 자질이었다.

대부분은 도전할 용기가 없어서 현재를 순응하고 살았다.

대부분은 발전해 나갈 의지가 없어서 현재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대부분은 도전해도, 의지가 있어도 그것을 이룰 자질이 없어서 실패한다.

“기한은 한 달 정도로 할까요? 아직 어리시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자.”

그를 잘 다듬는다면 미래가 기대될 인재였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그를 제대로 키워볼 요량이었다.

물론 그가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였지만 말이다.

그녀가 란델리노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려고 하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

“영식께서는 제 이름을 아시나요?”

“피나잖아.”

란델리노가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 측근 시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대답에 피나가 웃었다.

의외로 귀족 자제들 중, 자기 측근 시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좀 있었다.

시녀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면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네. 피나죠. 그런데 그건 본명이 길어서 줄인 거예요.”

피나가 그녀의 이름이 맞기는 했다.

정확히는 애칭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피나보다 길었다.

그녀를 부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피나’라고 불렸다.

“그러면 진짜 이름이 뭐야?”

“아그리피나요.”

아그리피나.

피나는 란델리노가 답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그에게 한번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 * *

남편의 환영연회를 끝내고 공작부인은 본격적으로 사교활동을 시작했다.

알펜 왕국 북부의 사교계는 난리가 났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헬리오 대공 간의 대화는 북부 사교계를 강타했으니까.

헬리오 왕국의 선왕 암살의 배후로 대공을 지목하는 엄청난 짓을 했음에도 도리어 사과를 받았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헬리오 대공이 나름 저자세로 군사지원을 요청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사교계는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여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을까 하며 긴장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 생겼다.

오들오들 떨면서 무서워하던 것이 무색했다.

화려한 방에서 여인들이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부인이 두려움에 떨며 눈치를 볼 줄 알았다.

그녀의 악명은 그렇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와 함께였지만 단 한명의 눈빛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부인, 너무 즐거워요.”

“맞아요. 이런 시간을 더 자주 가졌으면 좋겠어요.”

“공작부인께서 앞으로도 기강을 세우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라스타 왕국의 선진문화를 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오히려 광기와 기쁨이 넘쳐흘렀다.

“기쁠 수밖에요. 부인들이 어찌하느냐에 따라 가문의 격이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녀들은 넓은 방에서 원형으로 앉아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머리가 흐트러진 여인들이 있었다.

쓰러져 있는 여인들을 채찍을 쥐며 바라보는 여인도 있었다.

“맞아요. 그동안 가문의 기강을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이 후회될 정도랍니다.”

“정부도 엄연히 남편의 여인. 가문의 여인인데 저희가 너무 무심했어요.”

중앙에 정상인 정부는 없었다.

채찍을 든 여인에게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멍이 든 정부, 다리가 매질에 피가 나는 정부, 얼굴이 긁힌 자국이 있는 정부.

“정부들이 본부인들을 윗사람으로 모실 줄 알도록 교육을 잘 받는 듯하니까 뿌듯하네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귀족 부인들의 광기어린 폭력과 희열을 ‘교육의 성과에 대한 기쁨’으로 포장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바보는 적어도 여기에 없었다.

“맞아요. 가르치면 이렇게 말을 잘 듣는걸요.”

“정말 발전해 나가는 모습에 제가 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니까요.”

“북부의 사교계가 천박해지지 않게 되었어요.”

그들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교육의 한 과정일 따름이다.

자신들의 폭력을 아름답게 미화해 주는데 거절할 턱이 있나.

자신이 만든 판에 모두가 좋다고 뛰어들었다.

그 판을 왜 만들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자신이 얼마나 위협적인 인물인지 들었음에도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짠 판에 뛰어드는 것도, 자신을 사교계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도 부인들에게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정도로 남편의 정부들을 때리기를 원했다.

가슴속에 쌓인 분노를 풀 방도는 많지 않았으니까.

“공작부인께서 없으셨다면 어찌 이것이 가능했겠어요.”

“네, 부인께서 오시니까 북부 사교계의 품위가 한껏 올라갔어요.”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자주 가져요. 부족한 저희를 이끌어 주세요.”

이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모욕한 정부다.

그들은 남편의 뒷배를 믿고 기세등등할 수 있었다.

자신이 홀로 정부를 혼내면 그것은 남편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처럼 되며 남편과 싸워야했다.

자기 잘못을 모르는 남편과 싸우는 것은 화가 나서 쓰러질 만큼 짜증이 난다.

남편은 무작정 정부의 편만 드니까.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이 허락하니 어떠한가?

“부인께서 이리 저희의 버팀목이 되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럼요. 부인께서 오신 이후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남편들이 많아졌답니다.”

“맞아요. 남편이 잘못을 저지른 정부를 두둔하지 않으니 가문의 위계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어졌어요.”

자기가 총애하는 정부가 이렇게 매질을 당해도 남편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다.

그들의 행동에 항의한다는 것은 그것을 허락한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하는 항의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항의를 한다?

소드마스터인 남편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세웠던 그녀를 상대로?

헬리오 대공조차 한발자국 물러나게 만드는 그녀를 상대로?

감히 그랬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에 무서웠다.

이런 상황에서 무서운 소문이 들려왔다.

물론 그것은 남편들에게 무서운 것이었다.

“자기 분수와 잘못도 모르는 어떤 귀족을 크게 혼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도 들었어요. 자기 잘못을 크게 후회하며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며 사라졌다고요.”

“가주가 없을 때, 그 후계자가 가문을 이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어떤 귀족이 따졌다가 의문사를 당하고 본부인의 아들이 작위를 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뿐이 아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 후계자가 어리면 전(前) 가주의 아내이자 현(現) 가주의 어머니가 대신해 주는 것이 마땅하고요.”

“맞습니다. 공작부인. 정말 맞는 말씀만 하세요.”

“정말 모든 귀부인의 귀감이 되실 분이세요.”

“저도 부인처럼 우아함과 현명함을 다 갖추고 싶네요.”

그녀가 말하자 다른 부인들이 들 떼처럼 시선을 모으며 아부를 떨었다.

어린 아들이기에 가문은 본부인의 차지가 되었다고 백성들 사이에서 퍼졌다.

이와 함께 친인척들의 견제를 막고 가문을 차지하도록 해준 배후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있다는 말도 같이 나돌았다.

아낀다고 하더라도 자기 목숨이 귀한 법이다.

남편들은 자기 목숨이 귀한 줄 알았다.

그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귀족만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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