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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1화 (81/221)

081화 당근

그가 더욱 자세를 곧게 하고 시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고용인들도 무서워하며 반발했죠.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불만은 싹 사라졌어요.”

말을 하고는 시녀는 침묵했다.

란델리노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머리를 작게 좌우로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눈을 떴다.

“어머니가 두려움에 대한 불만을 상쇄할 당근을 주니까?”

“맞습니다.”

“도대체 그 당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그녀가 웃었다.

란델리노의 말에 만족한 듯한 웃음이었다.

스스로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물음을 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발판으로 발전해 나가야 마땅했다.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는 놈은 그녀가 사양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모시는 영식은 그런 멍청이는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려고 하고 배우려고 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합격점이다.

“실리 시녀장님은 자식들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내정을 장악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시녀장 이야기로 넘어갔다.

“정작 그들 중 누구도 실리 시녀장님과 혈연관계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란델리노는 눈이 커졌다.

시녀가 말하는 ‘그들’이 란델리노 자신이 떠올린 사람들이 맞는 것 같았다.

“고용인들이야?”

“네, 고용인 중에 선별하여 실리 시녀장님의 양자, 양녀로 받아들이는 거죠.”

실리 시녀장은 엄연히 귀족이다.

이는 그 양자, 양녀들도 귀족이 된다는 것이다.

란델리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족이라고 해도 실리 시녀장의 후계자가 아닌 이상에는 남자는 ‘준귀족’으로 영지가 없는 처지고 여인은 남편의 신분을 따라야 하잖아.”

‘준귀족’은 부모가 귀족이지만 당사자가 후계자가 아니라서 그 신분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계급이다.

귀족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서 사내는 준귀족은 기사가 아닌 이상에는 계승이 되지 않았다.

여인의 경우, 귀족가문의 안주인이 되지 않으면 그 자식은 평민이 되었다.

준귀족 신분을 자식에게 줄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실리 시녀장의 자식으로 귀족이 된다고 하더라고 그들의 본질은 평민이다.

어느 귀족이 평민을 집안에 들이고 싶겠는가.

그들과 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실리 시녀장이 좋은 혼처를 주려고 해도 귀족 가문에서 고개를 저을 것이 뻔했다.

그런 것보다는 그녀가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가문에 그들을 팔아넘길 가능성이 더 높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자식들은 평민이잖아.”

후계자로 실리 시녀장의 작위를 잇지 못한다면 그 자식들은 귀족이 될 수 없다.

준귀족 신분이 되는데 기사가 되지 않는 이상에는 그 자식들은 평등이 되는 것이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준귀족이라는 신분에서 사내는 오직 기사만이 자신의 자식에게 신분을 물려줄 수 있었다.

여인은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많은 가문의 차남 이후의 사내들이 기사가 되려는 이유다.

자식에게 준귀족이라는 신분을 주기 위해서였다.

기사가 되지 못한 준귀족의 자식은 평민이라는 것과 연결이 된다.

귀족들이 귀족이 된 ‘고용인’과 혼인해서 얻는 이득은 따로 없었다.

결국 평민과 혼인을 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자식은 평민으로 평범하게 살게 될 것이다.

란델리노는 어린아이였기에, 철저한 약자였었기에 눈치 보는 것을 잘 하는 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부정적인 실리의 감정을 알아챘다.

어머니를 향한 실리의 마음도 조금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본 실리 부인은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눠 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직 어머니를 위해서만 자신의 모든 것을 쓰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다.

“귀족과 혼인하거나 연을 맺는다고 해도 문제가 있는 작자이거나 노친네일 거야. 그런 사람들에게 팔려가지 않으면 다행이게?”

란델리노의 생각은 타당했다.

내 가문의 방계를 입적시키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일반적으로는 헐값에 양자와 양녀를 어이없는 상대에게 팔아넘기고 지참금 등을 챙기려고 할 것이다.

“실리 시녀장님이 평범한 귀족에 불과했다면 그러했겠지요. 팔아넘기고 돈이나 챙길 생각에 그랬을 것이에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먹이를 보는 맹수와 같았다.

“그렇지만 실리 시녀장님이 누구의 최측근이겠습니까?”

란델리노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답을 내뱉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의문도 의혹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나의 어머니. 페루제 공작부인.”

“영식께서는 직접 본 적이 없으셔서 감도 잡지 못하시겠지만 라스타 왕국에서는…….”

그녀가 담담하게 사실을 말했다.

그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란델리노는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영식께서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무겁습니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왕조차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무게감이 있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라는 이름이 가지는 가치는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높습니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왕보다 높은 곳에 서 있어도 될 가치를 지녔다.

“페루제 루비로즈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죠.”

왕과 같은 위치에 앉을 자격을 얻은 권력자.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권력자.

왕국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보유한 권력자.

왕국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권력자.

왕국에서 가장 인재들이 따르고 싶어하는 권력자.

모두가 한 사람이었다.

바로 페루제 루비로즈다.

그녀의 신임을 얻는 자는 부와 권력, 명예를 얻으리라.

“그분이 상대가 원한다고 만나 줄 분도 아니지요. 모두가 원한다고 말을 나눌 분도 아니고요.”

그녀와 말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은 밖의 돌맹이만큼 많았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어머니의 만족을 이끄는 일은 쉽지 않지.”

최고답게 그녀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라스타 왕국 최고의 부자답게 웬만한 사업 제안은 눈에 차지 않았다.

그 제안을 뛰어넘는 것들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으니까.

라스타 왕국 최고의 지배자답게 웬만한 인재는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미 곁에는 엄청난 인재들이 있었으니까.

라스타 왕국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자답게 웬만한 정보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까.

그녀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흥미를 끌지는 못하더라도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면 경청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이 서면 곁을 내주셨죠.”

참 이중적이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모순적으로 모두의 접근을 강하게 막지는 않았다.

상대가 온갖 수를 써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는다면 무조건 대화에 응했다.

“그녀와 이야기 나눌 기회를 만든 것만 봐도 능력은 있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능력이 되고 야심이 있는 자들이 자격을 갖추고 온다면 기꺼이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그 이중적인 모습이 사람들에게 2가지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나는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다른 하나는 ‘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최측근의 자리는 무한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는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죠.”

최측근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최측근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간의 경쟁은 엄청났다.

“그렇게 경쟁이 심해졌을 때였죠. 실리 시녀장님이 양녀를 들였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란델리노는 침을 삼키며 들었다.

너무 집중하느라 침을 삼킨 줄도 몰랐다.

“마구간에서 일하던 하녀가 성공한 것이죠.”

그냥 성공이 아니다.

정말 경악할 성공이었다.

마구간에서 마부들의 수발이나 들고 말똥을 함께 치우던 하녀가 준귀족이 되었으니까.

모두가 실리 시녀장의 선택을 비웃었다.

뒤에서 계속 비웃음을 당했다.

“그것도 엄청난 행운인데 더한 행운이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남작이 그녀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죠.”

귀족이 되었다고 하더라고 마구간에서 붙어먹던 하녀였다.

그런 그녀를 남작 가문의 안주인으로 들이겠다는 청혼서를 보낸 것이다.

모두가 놀랐으며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란델리노도 너무 놀라서 눈이 커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을까?

실리 시녀장의 정략혼을 원했다고 해도 과했다.

“사람들은 그 남작을 미쳤다고 했어요.”

당연했다.

아무리 귀족이 되었다고 해도 평민이다.

그냥 평민도 아니고 마구간에서 말 엉덩이가 쫓던 하녀였다.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것은 파격을 넘어서 미친 짓이었다.

“그렇지만 곧 모두가 남작의 선택을 수긍하게 되었지요.”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덩달아 란델리노도 그녀를 따라서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그녀를 따라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음을 몰랐다.

곧 그녀는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어렵고 어렵기만 했던 페루제 루비로즈님과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실리 시녀장 아니 실리 남작은 페루제 루비로즈의 최측근이다.

자신의 최측근인 실리의 딸이 혼인한다고 하는데 무시할까? 짜증을 낼까?

아니다.

당연히 축하를 해줄 것이다.

나아가서 실리 시녀장의 사위가 될 상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번쯤은 만나고 싶고 대화도 하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쉬운 길이 있음을요.”

정말 쉬운 길이었다.

실리 시녀장의 사돈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공작부인과 연결고리가 생겨난다.

어렵게 억지로 연결될 실마리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 양자와 양녀를 매년 스무 명 혹은 백 명씩 뽑는 것은 아닙니다. 공작부인께 공적을 세우고 능력을 갈고 닦은 소수 중에서 몇 년에 한 번씩 몇 명을 선택하는 거죠.”

시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선택됩니다. 그럼에도 많은 고용인이 얻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죠.”

극소수만 차지할 자리이면 어떠냐?

평민은 귀족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깨는 방법.

전장에서 큰 공로를 세우지 않는 이상, 목숨을 걸지 않는 이상 가질 수 없는 기회.

목숨을 걸지 않아도 원칙을 깨고 귀족이 되는 길에 모두가 열광했다.

공작부인을 위해 공을 세우면 되었다.

거기에는 집안도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직위도 필요가 없었다.

오직 능력을 증명할 의욕과 광기만 있으면 되었다.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 기회는 의지가 있는 자들만이 해낼 수 있었다.

“여인의 경우, 아름다운 배우나 평민여인이 백작 부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리죠. 그러나 그것은 정말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일이에요.”

수십 년에 한 번 있을지도 모를 일이란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대부분 정부로 살다가 끝나거나 버림받는 것으로 끝을 맺죠.”

이게 현실이다.

아름다운 미모로 귀족의 눈에 들어서 정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귀족의 곁에서 부유하게 사는 길이었다.

귀족의 변덕에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다.

자식을 낳아 봤자 사생아고 가문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에 최대한 많이 뜯어내고 그것을 잘 관리하면서 먹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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