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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80화 (80/221)

080화 인재 영입

그런 상황에서 란델리노의 편을 들어주며 그들을 상대로 싸우던 아이는 레티시아가 유일했다.

“정말 자기 분수를 아는 아이였으면 티파티에서 란델리노를 무시하거나 그 아이들의 편에 섰겠지.”

레티시아는 몰락가문의 아이다.

부모가 출판사를 하다가 지금은 상단의 고용인으로 사는 그런 집안 출신이다.

정말 자기 분수를 안다면 약자인 란델리노의 편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힘이 있는 가문의 아이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어디에나 자녀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상대를 탓하는 부모들은 존재했다.

‘부모님이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힘이 없는 그녀의 부모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것이다.

이모가 괜찮은 집안의 안주인이라고 해도 그 집안보다 더 좋은 가문은 많았다.

“오늘 보아하니 그 아이는 마음에 깊은 뜻을 품고 있는 듯싶구나.”

공작부인은 그녀가 어떤 뜻을 품었는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의도가 있었음을 눈치챘다.

물론 그 뜻은 생각보다 허무했다.

레티시아는 공작가문 영식의 곁에서, 미래의 공작 곁에서 조금은 편히 살고 싶다는 깊은 뜻을 품었던 것이니까.

지금은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공작부인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가문을 위해 살겠다고 뜻을 품은 것이 13살이다.

레티시아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나름의(?) 깊은 생각을 간직했다.

추측이지만 공작부인은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목표를 정한 레티시아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건 그렇고 정말 귀엽지 않니?”

한껏 기분이 좋은 목소리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귀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자기 때문에 그 돈을 백작에게 줬다고 말이야.”

“아직 어린아이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빼앗으려고 한 것뿐인데 재미있어.”

그녀는 이노무세키 가문에 원하는 것이 있었다.

돈을 못 갚는 상황을 만들어서 억지로 빼앗으려고 했다.

가치가 있었으나 아직 모두가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었다.

“그 아이 덕분에 일이 쉬워졌죠.”

실리의 말에 공작부인이 동의했다.

“어떻게 이노무세키 백작에게 손을 뻗을까 고민했는데 설마 먼저 손을 벌릴 줄이야.”

원하는 것을 빼앗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접근해야 했다.

그렇지만 아무런 접점도 없는 공작부인이 먼저 연락을 취하면 경계를 할 것이었다.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은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용도는 몰라도 그것이 가치가 있음을 알고 가격을 높이려고 했을 것인데 이리 쉽게 일이 풀렸다.

“자칫 그곳의 가치를 깨닫고 일을 벌일지도 몰라서 조심스러웠는데 고마울 일이야.”

“맞습니다. 모두가 그곳의 가치를 아닌 레티시아 영애의 가치에 초점을 맞출 것이니까요.”

그녀를 주시하던 사람들 혹은 자신이 잘되는 꼴은 보지 못하는 남편이 대신 투자를 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레티시아의 이모부’라며 공작부인을 알아서 찾아온 것이다.

사자의 아가리에 스스로 들어온 토끼였다.

“그 아이가 정말로 마음에 드는구나.”

레티시아는 공작부인의 일을 수월하게 만들었고 즐거움도 선사했다.

이런 아이를 어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실리, 그 아이를 잘 키워라. 내 사람으로 써야겠다. 지금도 이렇게 능력이 좋은데 잘 키우면 얼마나 뛰어나게 될 것이며 나의 안목을 얼마나 칭송하게 될지 기대가 되지 않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녀는 공작부인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졸지에 그녀가 인재임을 스스로 밝히는 꼴이 되는 바람에 일이 꼬여 버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거둘 수 있도록 키워 보고 싶어졌다.

실리도 공작부인의 결정을 수긍했다.

레티시아는 그 나이의 아이들이 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알았다.

확실히 인재였다.

공작부인을 위해 크게 쓰일 재능이 있었다.

“기대에 부응할 수준까지 올려야한다.”

“네,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실리도 공작부인의 뜻을 받들어 정말 열심히 가르칠 생각이다.

레티시아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 * *

란델리노는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었다.

가정교사들이 알려 주는 내용을 복습해야 다음 내용도 잘 따라올 수 있었다.

그 곁에는 공작부인이 붙여 준 전속 시녀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침묵만 있었다.

* * *

그는 얼마 전의 과거를 회상했다.

한밤중에 어머니가 은밀히 불렀다.

모두가 눈을 감는 시간에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리라.

“어머니,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생각해 보니까 너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말이다.”

공작부인은 평소처럼 차를 곁에 두고 있었다.

우아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란델리노가 앉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는 항상 믿음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눈매는 차가웠으나 눈빛은 태양처럼 빛났다.

“근거도 없이 상대를 무조건 믿는 것은 아둔한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지.”

란델리노가 순간 흠칫했다.

“그런 경우를 보고 대중은 희대의 충신이니 하면서 망언을 해대지만 말이야.”

어머니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듯 싶었다.

“내가 자식을 낳은 후에 너를 버릴까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를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공작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잖니. 근거가 없는 믿음은 머저리가 하는 거라고. 나는 의심할 때에 의심할 줄 아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무작정 사람을 믿지 말고 의심하라고 한다.

그것이 어머니라고 해도 말이다.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부모를 의심하라고 가르칠까?

그 어머니가 여기에 있었다.

“저번에 연 티파티에서였다고 들었다.”

얼마 전에 귀족 자제들을 모으고 조촐한 티파티를 열었다.

모두가 란델리노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려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그에게 엄청난 희열을 줬다.

자신에게 모욕을 준 이들에 대한 복수가 준 기쁨이다.

“비잘 후작 가문이었던가? 후작 부인이 나처럼 계모라고 하지.”

란델리노는 ‘계모’라는 표현에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 저에게는 어머니는 계모가 아니라 어머니에요.”

그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의 후처가 아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인 법적 어머니도 아니다.

그냥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인 것이다.

그 말에 공작부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기분 좋아지는 말이구나.”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만큼 어른들의 변화를 잘 알아챘다.

새로운 후작 부인이 친자식도 아닌 비잘 영식을 애지중지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사람들이 극성이라고 혀를 찰 정도였다.

그랬던 그녀가 바뀌었다.

“자식 하나 낳았다고 그리도 바뀌다니 말이야. 쯧.”

그녀가 자식을 낳은 후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다음대 후작으로 올리고 싶었으니까.

의붓아들에게 잘해 줄 이유가 더는 없었다.

그는 아이의 미래를 막는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다.

티타임에서 비잘 영식이 입은 옷은 몰락귀족 가문의 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낡았다.

“너의 불안은 타당하다.”

그녀는 아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란델리노의 불안은 당연함을 인정했다.

공작부인 덕분에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버림을 받는다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 재혼하여 들어온 부인들은 자기 자식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 하니까. 그런 야심도 없이 오는 바보는 거의 없거든.”

그녀가 다정하며 따스하게 란델리노를 바라봤다.

아까의 차갑게 빛나던 눈빛은 사라졌다.

“그래서 너에게 믿음의 근거를 주려고 불렀다.”

“믿음의 근거요?”

“그래.”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서 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머니의 품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다.”

란델리노의 입이 벌어졌다.

정말 상상도 못한 말이다.

동시에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확실한 이유였다.

“뭐, 그것 때문에 칸나 백작 부인이 나를 이집에 들였으니 좋았어.”

일반적인 여인들은 수치스러워하며 감출 일을 그녀는 당당하게 밝혔다.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느낌이 강했다.

“고모할머니도 알고 계셨군요.”

“너를 쫓아내고 나도 아이를 못 낳으면 다음대 후계는 칸나 백작 부인의 아들이니까.”

하찮은 가문 출신에다가 아이도 못 낳는 여인.

그것은 칸나 백작부인이 좋아할 만한 조건이었다.

칸나 백작 부인의 마음을 50%는 만족시킨 것이다.

하찮은 가문출신은 거짓이지만 아이를 못 낳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그녀가 아들의 불안을 완전히 부셔버릴 말을 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만든 거짓이다.”

그녀는 자신이 절대로 아이를 가질 수 없음을 확실히 다시 말했다.

그녀의 임신은 계략일 뿐임을 말이다.

란델리노는 ‘어머니에 대한 강한 믿음’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 * *

회상을 끝내고 란델리노가 책을 덮었다.

“생각은 해봤어?”

그가 시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 상당히 구미가 당기기는 하더군요.”

그녀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옅은 흥분이 얼굴에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공작부인의 사람’이 아니라 ‘영식의 사람’이 될 이유로는 부족합니다.”

란델리노는 알았다.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은 ‘공작의 유일한 아들’이라서 받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보호가 있었기에 누리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 믿지만 세상일은 모른다.

혹시라도 불운하게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다면 란델리노의 유일한 방패는 사라진다.

과거의 모욕과 수치를, 아니 더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 힘이 주는 안락함과 평온함을 알았다.

그때의 자신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지금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란델리노’ 자신이 힘을 가져야 했다.

“왜?”

“공작부인께서 주시는 당근이 어마어마하거든요.”

란델리노가 눈을 크게 떴다.

다음대 후계자의 사람이 되는 것을 고민해야 할 혜택이 무엇인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작 각하께서 하는 회유도 통하지 않을 당근이거든요.”

공작의 회유조차 거부할 비책은 무엇일까?

“그 당근이 무엇인데?”

란델리노의 물음에 화답하듯이 시녀가 다정한 말투에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공작부인께서는 이 가문의 내정을 단기간에 장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너무 쉬운 물음이었다.

답은 뻔했으니까.

“어머니께서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잡으셨기 때문에 가능했지.”

어머니는 윗사람을 윗사람으로 볼 줄 모르는 것들을 때리시고 쫓아내면서 기강을 바로 잡았다.

원래의 시녀장이 맞아서 죽은 것도 자기 위치를 모르고 나댔기 때문이지 않는가.

별채에서 사사로이 돈을 받고 가문의 정보를 내뱉은 불순한 무리들을 고문하지 않았던가.

“맞습니다. 그것도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것 뿐은 아닙니다.”

란델리노는 고개를 작게 흔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본 것은 윗사람으로 권위를 되찾는 과정이었으니까.

“두려움이 상대를 복종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동시에 배신의 명분이기도 합니다. 더는 이런 두려움을 느끼고 싶다고요.”

시녀의 말은 맞았다.

공포만으로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면 그만큼 반발도 심해지는 것이다.

계속되는 공포는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무뎌지게 만들고 결국 저항하게 만든다.

란델리노는 이것은 귀한 가르침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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