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79화 (79/221)

079화 어린아이의 설득

그 말을 들은 공작성의 시녀가 헛웃음을 보였다.

“공작부인의 명령이신데 그리 나온다고? 평소에 백작이 얼마나 부인을 무시하면 아랫사람이 이러는 것이지?”

그 말을 듣고 자칭 레티시아의 시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작부인이 백작에게 서신 하나 보내면 끝이다.

네가 얼마나 나를 무시하면 아랫사람도 자신의 사람을 무시하겠냐며 따지면 백작은 자신을 벌줄 것이다.

자신을 대신하여 공작부인의 벌을 받아야 할 희생양이 필요했으니까.

그 일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해 도둑질을 하던 아이라며 평소의 행실을 문제 삼을 것이다.

도둑질한 적이 없더라고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무지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 모습을 보던 공작부인의 시녀는 혀를 찼다.

“이런 일로 시간을 끌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시녀를 짜증스럽게 보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인 것처럼 레티시아를 대했다.

레티시아가 귀한 가문의 영애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니에요. 괘념치마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가 볼까요?”

“네.”

시녀의 우아한 걸음을 따라서 레티시아도 성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부인, 레티시아가 인사드립니다.”

레티시아는 최대한 우아하게 인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태가 많이 좋아졌구나.”

“공작부인께서 신경을 써주신 덕분입니다.”

본디 레티시아는 노력파였다.

부모님이 알려 주는 예법을 혼자 열심히 예법을 연습했다.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배운 것에 한해서는 정말 월등했다.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아들의 첫 번째 사람이었으니까.

그녀가 친히 아들의 사람으로 점찍었다.

그런 만큼 레티시아는 완벽해야 했다.

그리하여 레티시아는 공작부인이 보낸 예법선생님에게 배움을 얻게 되었다.

“부인께서 보내 주신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이리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에요. 감사합니다.”

“내 아들의 사람으로 갖춰야 할 것을 갖추도록 해주는 일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렴.”

이것도 레티시아와 부모님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 교사를 초빙하려면 레티시아의 부모님이 모든 돈으로는 턱도 없을 만큼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대단한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할 기회였다.

그렇게 마음의 짐만 쌓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모부가 일을 벌인 것이다.

“그래.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공작부인은 직설적이었다.

레티시아가 앉아서 미리 준비된 차 한입을 마시자 물었다.

“네.”

그녀는 자신이 집에서 준비한 말들을 떠올렸다.

“이노무세키 백작 가문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작부인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무서워했다.

두려움의 이유는 대부분 둘 중 하나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아서 혹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였다.

레티시아도 그녀가 무서웠다.

그 이유는 달랐다.

그녀는 공작부인이 자신의 심연까지 들여다보고 들추고 움켜쥘 것 같았기 때문에 두려웠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던,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게 만들 것 같았다.

그 눈빛은 그런 공포를 줬다.

레티시아가 본능적으로 느낀 두려움은 진실에 가까웠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하려고 했다.

긴장하지 않은 척해야 한다.

아니면 긴장이 밖으로 보이는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미래를 위해 투자를 했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아름다웠다.

미소에도 완벽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작부인의 미소였다.

그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보였다.

저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그녀는 그 노력조차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그 이상일 것이니까.

“그에 관해 말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어린 네가 말이냐?”

의아해 하는 듯한 말투였다.

어린 네가 무엇을 안다고 투자에 관해 말을 하겠냐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공작부인, 어리지만 제가 또래에 비해 ‘세상을 읽는 눈’이 일찍 깨어졌습니다.”

“어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저에게 놓인 일의 무게를 이해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의 이치를 알고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일의 이치를 알고 행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위치를 알고, 능력을 알고, 상황을 알고 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른’이 현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며 가지는 책임감이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

자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감.

자신의 꿈에 대한 책임감.

‘어른의 책임감.’

그것은 여러 가지였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어리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것을 감안하고 대화를 나눴으면 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지.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은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이거든.”

그녀는 레티시아를 나이로 판단해 본 적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알려 줬다.

공작부인이 레티시아를 보던 시선을 내렸다.

차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게 된다고 해도 ‘세상을 읽는 눈’을 모두가 가지는 것은 아니란다.”

그녀는 ‘세상을 읽는 눈’을 레티시아와 다르게 해석했다.

“세상을 읽는 눈은 소수만 가져.”

그녀에게는 ‘세상을 읽는 눈’은 대부분이 가지는 책임감이 아니었다.

“타인의 결정이 자신에게 가져올 여파를 아는 안목은 타고 나는 거니까.”

그녀는 ‘세상을 읽는 눈’을 특별한 소수가 가지는 재능으로 보았다.

세상을 읽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니까.

먼저 움직여서 차지하는 자가 주인이었다.

머뭇거리다가 대세를 따르는 것은 일반인이 하는 행동이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귀족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귀한 거지. 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보면 빨리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레티시아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을 그렇게 대단한 인재로 생각해 줘서 기쁘다고 해야 할지, 하필이면 저런 무서운 분의 덫에 걸리게 생겼다고 기겁을 해야 할지 말이다.

“그 인재를 돈으로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고…….”

공작부인의 발언은 ‘이노무세키 백작 가문’에 거금을 투자한 것도 인재인 레티시아를 옥죄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의미였다.

레티시아는 이노무세키 백작은 싫어했지만 백작 부인인 이모는 사랑했다.

그 투자금을 빌미로 이노무세키 백작 가문을 압박할 때에 모른 척할 리가 없었다.

결국, 공작부인이 그녀를 좌지우지할 것이다.

“그 돈을 이용한 위협으로도 가능하겠지.”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것을 염두에 뒀음을 감추지 않았다.

레티시아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역시나 이모를 위협할 생각이었구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공작부인의 마수에서 이노무세키 가문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런 인재가 곁에 있다면 공작부인께서는 정말 든든하실 것 같습니다.”

레티시아는 모르쇠를 하기로 했다.

그 인재가 내가 아니라는 듯이 뻔뻔하게 굴었다.

그 모습에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인재라고 하더라도 관심을 주지 않으면 나태해지고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그 어떤 인재라도 그냥 놔두면 점점 한눈을 팔고 딴짓을 하며 딴생각을 하게 된다.

인재도 그러한데 평범한 사람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을 감독하고 평가를 해서 긴장감을 줘야 하는 이유다.

“하물며 부인께 만족스러운 인재도 아닌 상대에게 한 자금 투자입니다.”

‘이노무세키 백작’은, 레티시아의 이모부는 공작부인이 원하는 인재가 아니다.

공작부인에게 직접 손을 벌리는 상황까지 오도록 만든 사람이었으니까.

“투자는 이득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이득은 사람이 내는 것이고요.”

인재도 사람이다.

인재가 아닌 사람이다.

무관심은 그들을 방만하게 만든다.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렇게 된다.

“꾸준히 관심이 있고 지켜보고 있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결정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나태함을 정당화시킨다.

그리고 허튼 생각을 하게 만든다.

들키지 않으니 횡령을 해도 되고, 일을 대충해도 되고, 업무를 허위로 조작해도 된다.

이런 생각들이 절로 들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생각을 실행하게 될 것이다.

누구도 관여하지 않고 상대에게 온전히 맡기면 벌어지는 일이다.

레티시아는 공작부인에게 이것은 투자임을 강조했다.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관심을 주고 상대가 열심히 하게 만들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저는 이모부에게 한 투자로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랍니다.”

레티시아를 위한 족쇄로 쓰기에는 금액이 컸다.

그녀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많은 기간이 남았다.

그녀가 공작부인이 원하는 사람으로 성장할지 아닐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런 불확실성에 기대어서 백작에게 주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녀가 아들의 곁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해도 말이다.

이노무세키 백작 가문에 준 자금을 ‘레티시아를 위한 족쇄’가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한 투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공작부인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방안에 그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투자는 이득을 얻기 위함이지.”

정말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하찮은 금액이라고 해도 투자는 투자고 말이야. 설령 ‘투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너의 이모부에게 준 자금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 말에 레티시아는 도대체 얼마나 재산이 많은 그 투자금을 하찮다고 표현하는지 궁금했다.

그녀에게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큰 액수였으니까.

그런 생각에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투자금은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공작부인은 그 자금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실리, 내일 사람을 보내서 이노무세키 백작이 일을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해라.”

“네, 알겠습니다.”

실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공작부인의 사람이 이노무세키 백작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레티시아가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의연함을 유지했다.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아니야. 내가 고맙지. 레티시아, 앞으로도 이런 조언을 아끼지 말아다오.”

레티시아는 인사를 끝으로 방을 나섰다.

이제 공작부인의 손아귀에 잡힐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자유를 누리면 되었다.

기분이 좋아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녀가 나가고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그대로였다.

“긴가민가했는데 이제야 확인이 서는군.”

“저는 자기 분수를 아는 아이로만 생각했습니다.”

공작부인이 주최한 첫 번째 티파티에서 레티시아는 그녀의 눈에 들었다.

당시에 그들은 몰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란델리노가 그런 공작부인의 비호를 받고 있음도 알지 몰랐다.

란델리노는 버림을 받게 될 아이라고 여겼으니까.

공작 가문의 유일한 적자를 무시하고 모욕을 주며 폭행까지 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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