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친구라고 다 같은 친구가 아니다
자신의 방에서 란델리노는 어떤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귀여운 동물들과 풍경이 어우러진 그림들이었다.
“백작님은 제가 여기에 올 때면 언제나 그 책을 보시네요?”
“언제 온 거야?”
레티시아였다.
예우경칭으로 백작님이라고 란델리노를 불렀다.
“방금요. 노크했는데도 못 들으셨나 봐요.”
본래라면 그녀는 노크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렇지만 란델리노는 그녀에 한해서는 노크 후에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너무 집중하느라 못 들었네. 이 책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어머니께서 그려 주신 책이라고 하셨지요?”
“응.”
어머니.
여기서 언급한 어머니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란델리노를 낳고 죽은 친모였다.
친모는 그를 낳기 전에 그림책을 계속 그렸다고 들었다.
반역죄로 가문의 멸문 당하고 소수의 여인만 살아남았을 때도 그렸다고 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서 말이다.
가족들의 죽음에 상처를 받고 죽었으나 그녀는 아들을 사랑했다.
“그림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엄청 정성을 들인 것 같아요.”
그림은 섬세하면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편하게 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란델리노는 책을 다정하게 만졌다.
너덜너덜한 책은 그가 얼마나 많이 친모의 유품을 봤는지 예상하게 해줬다.
친모를 책에서 느껴 보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웠고 애정이 있었다.
그가 책을 덮고 책상 서랍장에 넣었다.
그리고는 서랍장을 열쇠로 잠갔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말이다.
“그런데 내가 백작님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생각해 보니까 저만 너무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요.”
영식이라고 불러도 되었지만 그녀는 할 수 없었다.
“레티시아, 너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과함은 부족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어요.”
레티시아는 특별대우의 가치를 알았다.
그것은 그녀의 영향력이었고 힘이었다.
“공작부인께서 대단하시지요. 그런 공작부인께서 아껴 주시니까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세요.”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보다 높은 백작 가문, 후작 가문 등의 여식들도 고개를 숙이게 만들 수 있었다.
“제가 원한다면 후작 가문의 영애도 백작 가문의 영애도 제 아래에 둘 수 있겠죠.”
그녀는 공작부인과 란델리노의 비호와 총애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런데요. 백작님.”
문제는 공작부인의 힘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그 강한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뒤에서 숨어서 기회를 엿보는 하이에나들.
공작부인이 버린 먹이를 주워 먹으려고 기다리는 승냥이 떼.
그들은 레티시아를 주목할 것이다.
“저는 그들 사이에서 군림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실수 하나를 찾기 위해 눈을 빛낼 것이다.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으니까.
“공작부인의 비호 아래에서 군림하려면 이겨 내야 할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녀를 통해서 공작부인의 약점을 찾기 위해 달콤한 말을 속삭일 것이다.
허투로 사람을 들이지 않는 공작부인의 사람이었으니까.
어린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칫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탐욕스러운 사람들 위에 설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저는 지금 쥐고 있는 것을 지킬 자신이 없어요.”
다른 문제는 레티시아의 집안이 가진 힘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총애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
공작부인이 변덕이라도 부린다면, 란델리노가 다른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사그라들 허상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그 허상을 붙잡을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란델리노와 둘만 있으면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었다.
그들은 친구였으니까.
“저는 란델리노 백작님의 친구로 남고 싶어요. 공작부인의 총애를 받는 영애가 아니라 백작님의 친구로요.”
그러나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그녀와 그는 친구 사이로 쭉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이모부 때문이었다.
이모부는 평소에 부모님과 자신을 몰락한 귀족가문이라며 무시하던 작자였다.
레티시아가 공작부인에게 예쁨을 받는다는 소식에 달라졌다.
갑자기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지 않나, 자주 집에 놀러오라고 하지 않나.
그녀에게 부담스럽게 굴었다.
“언니! 형부 미친 거 아냐!”
결국 일을 쳤다.
어머니가 이모에게 달려가서 화를 낼 정도로 컸다.
“미안해. 설마 그이가 멋대로 그럴 줄은 몰랐어.”
“언니, 형부 어디에 있어. 따져야겠어.”
“일단 진정해.”
그녀의 이모는 동생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진정? 어떻게 진정을 해?! 형부가 레티시아의 이름을 거론하며 공작부인에게 상단의 투자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아직 어린 딸이었다.
그런 딸아이를 이용해서 투자금을 받아낼 생각을 하다니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며?!”
레티시아의 이름을 듣고 투자한 자금이다.
만약 그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대가는 레티시아가 지게 될 것이다.
어린 조카에게 그런 짐을 떠안긴 형부가 용서되지 않았다.
레티시아의 이모부라는 이유로 투자를 해 준 공작부인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기는 했다.
동생의 분노에 백작 부인은 울먹였다.
“요즘 그이 상단이 좋지 않았어. 크게 투자를 했던 건이 망하는 바람에… 이대로 가다가는 파산할 수도 있었어.”
“언니!”
“그이도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기고 공작부인을 찾아뵌 것이야.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백작도 사실은 기대하지 않았다.
워낙 높으신 분이다 보니 만나는 것도 어려웠다.
가치가 없는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약속도 없이 찾아갔다가 몰매를 받고 쫓겨난 귀족들도 있다고 듣기도 했다.
“이노무세키 백작이라고 하네. 공작부인을 만나고 싶네.”
“가신이나 방계 가문도 아니고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시군요. 죄송하지만 이만 가시지요. 허락되지 않은 인물은 그 누구라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근엄하게 백작의 출입을 막았다.
공작의 고모라는 이유로 칸나 백작부인을 성에 멋대로 들인 경비병들을 죽인 사건은 그들에게 긴장감을 줬다.
상대가 공작의 고모일지라도 허락 없이 출입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경비병이 죽는 판국에 생판 남인 백작을 들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병사들의 강경한 대응에 이노무세키 백작은 당혹스러워하며 소리쳤다.
“레티시아라고 벨로나 영식의 말벗이 있네! 내가 그 아이 이모부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 말에 병사들이 멈칫했다.
레티시아 영애를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성안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한 인물 중 하나였다.
병사 하나가 얼른 공작부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공작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 알겠네.”
믿어지지는 않지만 레티시아의 이모부라는 이유로 바로 그 공작부인을 만났다.
“네?”
“투자해 주겠다고 했네. 그리고 나는 같은 말 두 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네. 기억하게.”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나보다 그대 부인의 조카에게 감사하게.”
“네, 알겠습니다!”
“내가 여기 적은 금액 정도면 충분한가?”
“물론입니다! 충분하고말고요!”
그뿐이랴?
엄청난 금액의 투자를 바로 승인했다.
상단을 위한 고급인력들도 파견되었다.
레티시아는 그에게 ‘아주 귀한 보석’ 같은 조카가 되었다.
몰락 가문 출신이라서 창피했던 조카가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레티시아의 이모부는 적극적으로 그녀와 부모님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내 조카! 드레스들을 보니까 네가 생각이 나더구나.”
선물을 바리바리 사서는 집에 찾아왔다.
“언제든 놀러 오거라. 여기가 네 집이라 생각하고 말이야.”
그녀가 백작저에 찾아오기를 강렬히 원했다.
그 태도 변화는 레티시아도 그녀의 부모님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공작부인께 내 이야기를 잘 좀 전해다오.”
“공작부인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이 있니?”
“공작부인께서 너를 그리 예뻐하시는데 감사인사를 해야지. 다음에는 나와 같이 가자.”
불순한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또한 공작부인은 이모부처럼 들이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이모부의 행동들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찌푸렸다.
“아마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이 날 듯싶어요.”
괜히 공작부인의 심기를 거슬려서 장례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싫어도 이모부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모부만 죽는 것으로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모의 안위도 달려 있으니까 레티시아는 움직여야 한다.
“저는 지금 이대로 만족해요.”
란델리노는 그녀가 이유도 없이 자신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지만 알았음에도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
레티시아가 난처해했으니까…….
그들은 한참을 즐겁게 놀았다.
“백작님,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레티시아, 다음에도 와!”
“네, 알겠어요.”
그들은 서로 밝게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레티시아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란델리노의 미소도 사라졌다.
그가 눈짓으로 시녀 하나를 다가오게 했다.
“레티시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와.”
“네, 알겠습니다.”
시녀는 대답하고 어딘가로 갔다.
그는 레티시아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지금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사이는 싫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고 해결해야 한다.
그는 꿈속에서 겪은 바가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판단이다.
아직 어리지만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누군가를 처리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았다.
레티시아는 성 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신가요?”
그녀 옆에는 한 시녀가 있었다.
이모부가 붙여 준 시녀였다.
아내의 조카인데 시녀 하나 없으면 어쩌냐며 온갖 생색을 내면서 보낸 사람이다.
시녀가 여기에 있었던 일을 이모부에게 고해 받칠 것임을 잘 알았다.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침묵을 택했다.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이모부의 정신 나간 행동을 막기 위해서 공작부인에게 독대를 청한 편지를 보냈음을 말이다.
공작부인은 ‘귀족적’이다.
귀족의 예법을 중시했다.
윗사람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찾아오는 것도 귀족적이지 못했다.
무례하고 천박한 짓이다.
아랫사람이 볼일이 있어서 방문하고 싶으면 먼저 방문 승인을 받는 서찰을 보내야 했다.
레티시아가 ‘란델리노 백작의 유일한 친구’ 임에도 말이다.
그녀가 독대 요청이 거절되었다고 여기고는 마차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레티시아 영애.”
공작성의 시녀가 다가왔다.
이모부가 붙여 준 시녀보다 훨씬 우아하고 단정하며 차가웠다.
모시는 분을 닮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공작부인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레티시아 곁에 있던 시녀가 따라가려고 했다.
공작성의 시녀가 막아서며 말했다.
“그대는 돌아가게. 영애는 우리가 직접 모셔다 줄 것이니까.”
시녀는 안 된다고, 모시는 분을 홀로 둘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녀 곁에 있는 다른 시녀와 시종의 눈빛이 무서웠으니까.
그렇지만 이모부가 보낸 시녀는 입을 열었다.
“저는 레티시아 영애의 시녀로 영애의 곁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레티시아는 이모부의 시녀가 참 미련하다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이모부가 시킨 일도 제대로 못하냐며 혼을 낼 것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