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77화 (77/221)

077화 부부간의 대화 (2)

공작부인이 너무 큰 사건들을 일으켜서 매번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오해다.

공작부인에게 일종의 빈집털이를 당하기는 했지만 금방 수습을 했다.

재정비한 세력들은 유지가 되고 있었다.

“나름 비슷한 위치에 있는 관계고요.”

그 이후에 가문 내의 세력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다.

미래를 위해 세력을 추스르고 자신의 세력을 단단히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저는 계속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만의 답을 내렸답니다.”

그녀가 미소를 유지하며 조곤조곤 말했다.

“후계자로 삼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왜 데려오지 않았을까?”

정말 마음속에 둔 후계자가 있다면 입적을 하면 되었다.

공작은 힘이 있는 가주였다.

작은 반발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다.

“혹시 원하는 후계자가 있지만 아직은 없는 것은 아닐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더는 못 들어주겠군.”

공작은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그녀의 말은 그가 사생아를 들여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내가 정부와 놀아나서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는 말을 어디까지 들어야지? 그것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정부의 아이를 말이야.”

이는 그의 사생활을 폄하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그를 정부에게 놀아나서 가문을 들쑤시려는 어리석은 사내로 만들었다.

분노는 정당했다.

그가 방을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들으시지요. 후회하지 마시고요.”

우아한 미소가 사라졌다.

무심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이었다.

정말 뭔가 사달을 내기 직전의 고요함이었다.

공작은 나가지 않고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곧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들어보지.”

그 말에 다시 우아하게 웃었다.

“이렇게 제 말을 경청해 주시려고 하니 좋네요. 역시 저희는 서로를 존중하는 좋은 관계예요.”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만해.”

공작부인에 말에 짜증을 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저는 생각했어요.”

그녀는 남편의 짜증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도대체 어떤 여인일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후계자로 삼고 싶을 정도로 총애하는 여인이잖아요.”

“그대, 아까도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아까 정부에게 놀아나는 남편으로 만드는 것에 분노했음에도 그녀는 말을 이어 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을 해야겠군요.”

그녀가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정부가 아니겠지요. 당신이 부인으로 원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니까요.”

그가 주먹을 쥐었다.

“코르티잔(고급창부)은 아닐 것 같아요. 그러면 아무리 귀족가문의 양녀로 들여도 본부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코르티잔과 노는 귀족들은 많았다.

그렇지만 코르티잔을 본처로 들인 귀족은 한 명도 없었다.

정숙은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가져야 할 기본이었다.

혼인 후에 문란하게 놀더라도 그 전에는 정숙해야 하는 이유다.

“코르티잔은 귀부인이 될 첫 번째 자질부터 없는 존재니까요.”

이 남자 저 남자와 대놓고 밤을 보내는 여인을 귀족 가문의 안주인으로 들이는 것은 그 가문의 격을 대놓고 떨어뜨리는 짓거리였으니까.

그리고 코르티잔과 혼인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애정’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략혼은 혼인을 대가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반해서 말이다.

“가문 간의 혼인처럼 재물이나 동맹 등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뭐 간혹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안주인으로 들이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니까. 일반 평민은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사랑에 빠져서 평민이나 고급창부를 안주인으로 들이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으나 옛날 옛적에는 있었다고 하니까 지금도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알펜 왕국은 있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겨우 진정했던 심장이 강하고 빠르게 다시 뛰었다.

“평민이었다면 제가 아니라 그 여인이 이 자리에 있었겠죠. 귀족 가문의 양녀로 들이면 되니까요.”

그녀가 차를 마셨다.

“제 머리가 아둔하여 그런 경우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녀가 찻잔에 든 차를 바라봤다.

“반역 가문의 여인. 평민으로 강등되었으나 반역자 집안이라 귀족 가문에 입적될 수 없죠.”

반역으로 가문이 몰살을 당해도 일부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귀족은 귀족끼리 혼인을 해야죠.”

반역에 가담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여인은 왕실의 재량에 따라서 평민으로 살 수 있었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찮은 가문의 여인을 들여서 사랑하는 반역자의 후손을 입적하고 후계로 삼으려고 했나요?”

칸나 백작부인의 죄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였다.

나중에 아이를 후계로 앉힌 후에 ‘칸나 고모님을 이용한 잔당’을 처리하고 그 자리를 아이의 사람들로 채우기 위함이었다.

물론 예상보다 더 많이 해먹어서 놀라기는 했다.

란델리노를 방치한 것은 유약하고 무능하다는 명분으로 그를 후계로 삼지 않기 위함이었다.

광기가 흐르는 눈빛이었다.

“가문의 격을 떨어뜨리는 짓거리는 내가 용납하지 못해요.”

감히 페루제 루비로즈가 안주인으로 있는데 그딴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로 남편을 바라봤다.

곧 다시 다정하게 웃음을 보여 줬다.

“이 가문의 후계자는 란델리노예요.”

그 말에 공작이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 아이 외에는 누구도 후계자가 될 수 없어요.”

“누가 뭐라고 했는가?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는 아직 후계자는 아니지. 그리고 후계자를 정할 권한은 그대가 아니라 나에게 있어.”

란델리노가 지금 유일한 법적 아들이기는 하지만 후계자는 아니었다.

공작은 후계자 임명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것은 란델리노가 아닌 다른 이를 후계자로 앉힐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 것과 같았다.

유일한 공작 가문의 장남이자 적통을 후계자로 내세우지 않을 생각인가?

감히 ‘루비로즈’가 인정한 벨로나 가문의 아들을 말이다.

불쾌해졌다.

자신이 불쾌해졌으니 상대도 불쾌하게 해줘야 마땅했다.

“어머? 저랑 둘째를 볼 생각이셨나요? 저는 몰랐네요. 워낙 우리 사이가 좋지 않아서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그대랑? 끔찍한 말을 잘도 하는군.”

자신과 아내 사이의 아이가 있다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얼굴이었다.

자신이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저러는 것이다.

칸나 고모님이 아직은 생각이 있어서 그이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공작인 조카에게 밝힌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을 그 자리에 세우려고 했음을 자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공작의 법적 후손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니까.

조카나 고모나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 모습이 재미가 있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으나 참았다.

“그렇지만 당신의 부인은 저잖아요. 부인인 저에게서 아이를 보지 않는다면 다른 여인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당신이 싫어서라도 다른 여인을 품어야겠어.”

“저도 여자인지라 질투를 합니다. 그러니까 자중하세요.”

그녀가 그 말을 한 뒤, 순간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공작이 칼이라도 뽑아서 죽일까 싶었지만 굳이 그리하지 않았다.

저 여자가 그것을 대비하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수도의 일이 바빠서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인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내가 그동안 무심했음이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공작은 자신이 ‘무심한 아버지’에 불과했음을 언급했다.

너무 바빠서 그런 것이라며 그의 무심함의 근거를 댔다.

“당신이 이렇게 망상으로 가득 찬 여인인 줄 몰랐어.”

굳건해야 저 독사가 의심이 의심으로 끝낼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아니라 소설가가 되었어야 할 재능이야.”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천천히 관찰했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이 맞겠지요.”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공작의 비웃음을 보고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기분이 나빠질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첫 번째 계모를 병간호하면서 곁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을 믿는 것은 아내의 도리고 아내를 믿는 것은 남편의 도리니까요.”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마치 연인에게 말하는 듯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제 부하들이 조금 끈질기답니다. 의혹이 생기면 확신이 들 때까지 파고드는 성미인지라…….”

그녀가 말을 흐리면서 잠시 침묵을 했다.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존재하지도 않는 정부와 아이를 찾는 것은 시간 낭비지요. 그러나!”

우아한 도자기 같은 완벽한 미소였다.

귀족적인 미소.

아름다우면서 다정하고 고혹적이었다.

“만약 저에게 했던 말이 거짓이라면 아주 깊숙한 곳에 숨기셔야 합니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나는 내 믿음을 저버리게 하고 내 아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것들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들 거니까요.”

눈빛은 점점 강하게 빛났다.

“피가 서서히 말려 가면서 죽어 가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 거예요.”

광기로 물들은 눈이었다.

소름이 돋게 만드는 집착이었다.

“저도 여인인지라 질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봐요.”

능숙하게 광기를 감추고는 그녀가 농담조로 말했다.

다시 차를 음미했다.

“그대가 그런 여인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게.”

공작은 그녀를 혐오스럽게 보고는 방을 나갔다.

강하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그의 심기를 알게 해줬다.

그는 집무실에 와서 세베루스를 불렀다.

“한동안 그들에게 연락하지 말아라.”

“네?”

“페루제 그 여자가 알아챈 모양이다.”

세베루스가 기겁했다.

보통 여인은 아니라지만 벌써 ‘그들’에 대해 눈치를 챘을 줄은 몰랐다.

“알겠습니다. 미리 더 단단히 호위하고 위치를 변경하도록 한 것이 다행이었군요.”

“그래. 아니었으면 그들이 큰 고초를 당할 뻔했어.”

공작과 세베루스는 한숨을 쉬었다.

안도감과 긴장감이 함께 담겼다.

안도감은 공작부인이 ‘그들’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미리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켰으니까.

긴장감은 그녀의 부하들이 계속 찾아다닐 것이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피 말리겠다고 장담한 만큼 걸렸다면 정말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공작이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겨 두고 고문을 가할지도 모를 일이다.

즐거운 대화를 마치고 공작부인은 실리에게 말했다.

“대놓고 감시하도록 시켜.”

“대놓고요?”

“아, 너무 대놓고는 말아야지. 은밀히 보는 척하면서 들키도록 하라고 해.”

적당히 은밀한 척을 하며 사람을 보낸다면 공작은 더 신경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일 것이다.

일부러 들켜준 것은 모를 테지만…….

아니, 어쩌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일부러 철저한 그녀가 그런 허술한 사람을 감시 용도로 보낸다는 것은 이상했으니까.

반면, 실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의도를 감추고 공작을 방심시키는 것이 더 이득이었으니까.

이제 공작은 악을 쓰며 ‘그들’을 숨기려고 할 것이다.

찾아서 데려오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너무 쉬운 것보다는 어느 정도 난이도가 있어야 재미가 있는 법이지.”

그녀는 단지 ‘재미’를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 다른 뜻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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