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76화 (76/221)

076화 부부간의 대화 (1)

세상에 그렇게 외면당하는 아이들은 많았다.

란델리노보다 더한 외면, 멸시, 폭력을 당하는 이들도 많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보호와 관심’을 받는 란델리노는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 것은 잘 합의가 되었나?”

“뭐, 생각보다 만족스럽게 진행될 듯싶어요.”

전날 연회가 끝나자마자 공작은 부하들에게 헬리오 왕국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빨리 취합해서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도 공작부인만큼 거리상의 문제로 정보를 늦게 받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헬리오 왕국과의 관계도 알펜 왕국보다 공작부인이 우위에 있었다.

“걱정 마세요. 설마 제가 알펜 왕국에 해가 되는 하겠어요?”

백 번이라도 해를 가할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 뻔했다.

“그건 그렇고 아이에게 궁금한 것은 없나요? 오랜만에 만난 ‘유일한 아들’이잖아요.”

그 말에 공작의 시선이 잠시 란델리노에게 향했다.

그의 모습은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완벽한 식사 예법이었다.

공작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공작부인이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게 해줬다.

이 아이를 이용해 공작 가문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는 나와 만나고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네? 그런 것은 왜 물으시나요?”

그가 아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리어 왜 그런 것을 물어보냐고 되물어본다.

생각해 보면 공작은 자신의 아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본 적도 없었다.

아이가 당하고 있던 학대도 외면할 정도로 무관심했던 아버지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아들의 물음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공작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아비가 되어서 그런 것도 못하는 것이냐?”

“하고 싶은 말은 어머니에게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나는 할 말이 없으니까 네가 하라는 뜻이었다.

공작부인의 아들답게 아버지야말로 신경을 끄라고 말했다.

정말 그녀가 자신처럼 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란델리노가 곁에서 배울 만한 어른이 페루제 공작부인뿐이었으니까 당연했다.

그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들도 ‘가장 완벽한 귀족’이 되려면 공작부인을 보고 따라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내 아들이 아닌 것 같군. 당신의 아들처럼 보여.”

공작의 짜증이 담긴 말에 란델리노가 움찔거렸다.

자신에게 향하는 차가움에 란델리노의 손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다고 여겼던 과거의 두려움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떨림이 커지려고 하는데 공작부인의 말이 들렸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제 아들이지요.”

그녀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웃었다.

누가 봐도 미워하는 것이 보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미워해 봤자 효과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란델리노의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래. 어차피 아버지가 나를 싫어했던 것은 알고 있었잖아. 이따위 일에 마음이 흔들릴 필요는 없어. 어머니도 말씀하셨잖아. 모든 사람이 나의 편이 될 수는 없다고 말이야. 버릴 사람과 가질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하셨어. 아버지는 명백히 버릴 사람이야.’

“아버지, 칭찬 감사합니다.”

공작의 비아냥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뻔뻔함도 배웠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견제를 하는 식사 시간이 지났다.

란델리노가 식사를 끝내고 공작과 공작부인도 식사를 끝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서 각자의 방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란델리노, 너는 먼저 올라가거라. 나는 네 아버지랑 할 이야기가 있단다.”

공작부인의 말만 없었다면 말이다.

* * *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공작은 자신의 시야에서 부인이라는 여인이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저 여인과 있으면 있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졌으니까.

“할 말이 무엇이지? 우리가 서로 무언가를 이야기할 만한 사이였던가?”

그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에는 너무 먼 사이였다.

대화를 해봤자 견제와 의심이 난무할 것이니 무의미하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결혼한 아내와 처음부터 아내를 존중해 줄 뜻이 없던 남편.

애당초 서로 간의 믿음과 존중도 없이 시작한 부부였다.

“부부 사이에 대화는 당연한 것이죠?”

“그동안 우리가 했던 대화가 떠오르지 않나 봐?”

그동안 했던 대화를 생각해 보면 진심이란 한 톨도 없거나 우위를 탐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거야. 서로 간의 ‘작은 오해’가 만든 일이고요.”

이제보다 공작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면 공작부인이 능청스럽게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이제 부부간에 할 만한 대화를 해야죠. 저도 안주인으로 적응이 되었으니까요.”

“적응? 그대에게 적응이 필요한가? 이곳에 온 첫날 시녀장을 때려서 죽이는 사람인데.”

이곳에 온 첫날, 전 시녀장을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밖에 방치해서 죽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당시의 공작부인(허접한 가문 출신으로 알고 만만히 봤다)을 하찮게 보고 건방을 떨기는 했지만 그렇게 목숨을 잃을 죄는 아니었다.

그것 외에도 여러 일들을 벌였지만 하나하나 말하기 입이 아팠다.

“당연히 적응이 필요하죠. 여기가 루비로즈 가문과 다르잖아요.”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남들이 보면 ‘사랑을 받고 사는 아내’인 줄 착각할 정도다.

“루비로즈 가문이었으면 집사도, 시녀장도 죽고 그들의 일족도 죽였을 거예요. 당연히 고용인들도 상당수 죽어 나갔겠죠.”

다정한 말투는 남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아내를 연상하게 했다.

이곳에 고용인들이 있었다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도망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별채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해 죽은 고용인들이 상당수였으니까.

그것도 부족하다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직 가문의 분위기를 모르니까 참았답니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참! 가신, 방계 가문의 건방졌던 부인들도 참았어요. 아직 그들의 가치를 모르는데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설마 진짜로 칭찬을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다.

공작은 알 수가 없었다.

‘진짜로 칭찬을 원하는 것이면 도대체 어떤 칭찬을 원하는 것일까? 설마 그대가 하찮은 가문출신인 줄 알고 무시하던 부인들을 모조리 몰살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오. 이런 것을 원하는 것인가.’

칭찬을 원할 리가 없음에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처음에는 놀랐어요. 제가 기대하던 공작 가문의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는 듯했다.

정말 속상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왔던 초기를 회상하자면 벨로나 가문을 정말 쉽게 장악을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말 속상했어요. 역사와 명성과 부를 지닌 공작 가문의 품격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죠.”

“이 가문을 쉽게 가질 수 있겠구나 한 것은 아니고?”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칸나 부인만 있었으면 모를까요.”

이제껏 문제가 없었던 공작 가문이었다.

칸나 백작부인이 몰래 뒤에서 챙긴 자금이 만만치 않았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을 그대로 놔둔 의도가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를 불러들이는 패착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도 자신의 고모님만 있었다면 벨로나 가문을 가졌을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더 늦게 공작령으로 돌아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답니다. 공작 가문의 격이 다시 올라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윗사람에 대한 예의도 없는 것들을 교육은 의무지요.”

공작은 더는 들어줄 수 없었다.

가증스러움에 끝이 있다면 그녀일 것이다.

그녀는 공작 가문의 주인인 자신의 권위를 떨어뜨린 원흉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이딴 말을 하려고 단둘만 있게 한 것은 아니겠지. 이제 그만하지.”

다른 목적이 있음에도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

페루제 공작부인이 잠시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곧 차분해졌다.

차분함을 넘어서 인간과 완전히 같은 모양인 인형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우아함이었다.

‘푸른 피를 가진 사람’이라 불리는 귀족의 표본이었다.

“그래도 편한 분위기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싫다면 어쩔 수 없죠.”

그녀가 특유의 오만한 미소로 말했다.

아까의 사랑스러움은 거짓이었다는 듯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하기 싫다고 하는데 남편의 뜻을 존중해 줘야 아내가 된 도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시 그게 본성이지. 다음부터는 그딴 가식을 떨면서 내 눈을 더럽히지 마.”

공작이 상당히 강한 말투로 말했다.

무례한 말이었고 공격적인 말이었다.

일반적인 귀족 가문의 부인들은 충격에 기절할 수 있었다.

무례함도 원인이지만 그가 표출하는 살기가 상당했다.

그 살기에도 당당하게 디저트를 먹고 차를 마시는 여인이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으니까 존중해드려야죠.”

귀족답게 그녀는 우아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원하시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을 잃지 않았다.

“란델리노에 대해서예요.”

공작이 눈을 찌푸렸다.

그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대상이었다.

그가 언급하지 않길 원했던 대상이었다.

그가 여러 감정이 들게 하는 대상이었다.

“왜 갑자기 그 아이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거지?”

그동안 공작부인은 란델리노와 공작을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충분히 만나게 할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공작도 굳이 그를 찾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당신의 유일한 적장자예요.”

“왜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

“맞아요. 당연한 말이에요.”

그녀가 담담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정말로 당연한 말이었다.

란델리노는 공작의 유일한 아들이자 ‘죽은 공작부인’의 자식이었다.

그가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당신의 유일한 아들이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자라고 있는데 가만히 뒀나요?”

그녀는 듣지 못하겠지만 공작의 심장은 크게 뛰고 있었다.

게다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보지 못하겠지만 공작의 눈이 찰나의 순간에 떨렸다.

“가문의 후계를 중시하지 않는 경우는 3가지죠.”

그녀는 곧은 자세로 앉아서 말을 계속했다.

“후계를 챙길 여유조차 없는 무능력자이거나 가문의 미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머저리거나.”

가문의 후계자는 가문의 미래다.

가문을 존속하기 위해서 후계자는 필수였다.

자기 하나 건사하기 힘든 무능한 것들은 후계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기가 살기도 힘든데 자기와 상관이 없는 미래 따위가 중요하겠는가.

여색이나 도박 등의 유희에 빠져서 가문을 말아먹는 놈들은 많았다.

그들은 가문이 자신 때문에 몰락하고 있음에도 한순간의 즐거움을 선택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작자가 어찌 미래를 대비할 생각을 하겠는가.

그녀가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그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따로 생각해 놓은 후계자가 있거나.”

마치 정답을 맞힌 것과 같은 만족감이 드러나는 미소였다.

그 말은 들은 공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은 폐하도 인정하는 인재이고 가문을 위해 힘쓰는 가주죠.”

공작은 무능하지 않았다.

수많은 몬스터를 토벌하여 백성들의 안위를 지킨 영웅이자 왕의 최측근으로 왕권을 수호하는 인물이었다.

공작은 가문의 미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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