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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75화 (75/221)

075화 에클레시아의 수호자

페루제 공작부인은 군사적 지원에 관한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리로 실리가 참석했다.

“지금 군사지원까지 받는 마당에 군량도 우리 측에서 마련하라는 것입니까?”

“군사지원에는 그 군사지원에 필요한 것도 포함되어 있는 법이네.”

“억지로 환영연회에 밀고 들어와서 한 군사협정도 그래야 한다고요? 장난하십니까?! 원칙을 그리 따르고 싶었으면 헬리오 대공 전하부터 지키셨어야죠.”

전날 그녀가 직접 작성해 놓은 조건들만 얻는다면 나머지는 가신들의 판단에 따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리는 헬리오 왕국 측 가신들을 압박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연회장에서 나온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공과 한판 붙은 일 따위를 신경쓰기에는 일이 많았다.

곁을 지치던 실리가 입을 달싹거리고는 말을 뱉었다.

“어찌하여 그런 것들을 반드시 합의하라고 하신 것인지요?”

실리는 공작부인이 작성한 내용을 떠올렸다.

필요도 없는 땅을 받는 것치고는 말이다.

군대를 보내겠다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식량 보급은 누가 담당할지, 후방과 전방은 어떤 구성을 할지, 라스타 왕국과 헬리오 왕국의 장군 중 누가 더 높은 명령권자가 될지 등 정해야할 것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그녀가 반드시 얻어야 하는 조건들은 의외의 것들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서류를 놓고는 실리를 봤다.

“내가 잘못된 결정을 한 것처럼 보이느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제가 어리석어서 부인의 깊은 의중을 알 수 없어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리는 정말 죄송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감히 자신의 주인에게 의구심을 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페루제 공작부인은 ‘신’이었고 ‘신’에게 의구심을 품는 것은 죄였다.

그녀는 과한 실리의 태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에 무게를 두기에는 바빴다.

“그래. 겉으로는 왜 이딴 것을 했나 싶기는 하겠지.”

“네. 그래 봤자 드워프가 아닙니까?”

드워프.

그들은 대공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원흉이었다.

대공이 직접 알펜 왕국까지 온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곳의 국제정세를 알아야 한다.

라스타 왕국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북쪽에는 알펜 왕국이 있고 동쪽에는 카플란 왕국이 있으며 서쪽에는 헬리오 왕국이 있다.

카플란 왕국의 동쪽에는 한 제국이 있었다.

이단 종교를 믿는 이단자들이 만든 ‘아스만 제국’이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와 사상을 퍼트리기 위해 카플란 왕국을 공격해 왔다.

카플란 왕국보다는 적지만 국경이 닿아 있는 알펜 왕국이 도와야 마땅했다.

그들이 밀리면 다음 차례는 알펜 왕국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제대로 도왔으나 언젠가부터 달라졌다.

그들은 선심을 쓰듯이 거의 전투가 중후반에 접어들 때쯤에 군을 보냈다.

카플란 왕국에서 피해를 있을 대로 본 다음에 말이다.

헬리오 왕국의 서쪽에는 드넓은 초원이 있다.

얼마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곳에는 ‘드워프’라 불리는 유목민족이 여러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겨울만 되면 헬리오 왕국을 공격하여 여인과 식량을 약탈해 갔다.

토벌하려고 하면 광활한 평야로 도망을 가 버리니 잡기도 어려웠다.

얌체같이 치고 빠졌다.

헬리오 왕국의 백성들은 드워프를 미워했고 그들을 비하했다.

그들이 난쟁이에 근육만 많은 놈들이라는 이미지가 생긴 배경이기도 하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에 군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거기에 약간의 호의를 보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

“그래도 너무 베푸셨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심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대공이 얼마나 급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라도 기다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이 긴박하니까. 그런 것을 정하는데 시간을 보내기에는 말이야.”

“그 정도입니까?”

실리도 헬리오 왕국에 대한 상황은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공이 직접 올 정도로 긴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많은 부족으로 나눠서 분열하던 드워프들이다. 대공이 올 만한 일이 무엇이겠느냐?”

“대공이 대놓고 연회장에서 군사지원을 요구할 정도로 긴박한 일이라니요. 제가 아둔하여 부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그동안의 정보를 토대로 말이야.”

실리는 생각하다가 자기 나름대로 답을 찾아냈다.

셀 수 없이 많은 드워프 부족이 하나로 통합되고 있음이다.

그들의 힘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일입니다.”

실리는 경악했다.

‘드워프’가 존재한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부족 간 동맹도 수시로 깨고 배신하는 그들이었기에 더 믿기 어려웠다.

“오랜 세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라고 해서 지금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정보력이 좋아도 ‘초원과 드워프’에 관한 정보는 헬리오 왕국이 우위에 있었다.

아무래도 인접해 있었으니까.

정보를 받는 시간도 더 빠르고 말이다.

“우리 측에 정보가 넘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온 것을 보면 그들의 통합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겠지.”

헬리오 대공보다 시간이 걸려도 공작부인도 ‘드워프’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못 참고 대공이 억지로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공작부인이 정보를 확인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음이다.

“실리, 동쪽의 아스만 제국은 이단자 고블린들이 세웠다. 그것을 잊지 말아라.”

아스만 제국은 사막의 약탈자라 불린 고블린들이 세웠다.

그들도 드워프처럼 많은 부족이 서로 대립했으나 ‘이단 종교’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예전처럼 부족끼리 싸우며 약탈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자기들끼리 도적질할 수 없게 되었고 노략질의 대상을 타국으로 삼았다.

타국을 향한 노략질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것이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아스만 제국에서는 다르게 말하겠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적들이 세운 나라가 운이 좋아서 제국이 된 것뿐이다.

그런 것들에게 에클레시아가 무너지고 서대륙의 평화가 흔들리는 꼴은 볼 수 없다.

“나는 에클레시아의 독실한 신자이며 교황 폐하께 인정을 받은 수호자로 이 일을 묵과할 수 없다.”

왕국은 달라도 종교는 에클레시아 하나인 이곳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은 신실하기로는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

“에클레시아를 새로운 위협에서 지켜내야지.”

드워프들이 어떤 방식으로 부족들을 합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2의 아스만 제국이 나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참고로 아스만 제국의 황제와 그녀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음에도 사이가 나빴다.

그녀에게 이단 종교를 퍼뜨리려는 아스만 제국은 최악의 적이었다.

아스만 제국의 황제에게 사사건건 카플란 왕국 너머에서 자신을 방해하는 그녀는 최악의 악녀였다.

자신들의 종교전도를 막는 숙적이 그녀였던 것이다.

그의 적은 참으로 골고루 여러 곳에 포진되어 있었다.

차별 없이 적을 만드는 대인배다.

진지하게 말을 하던 공작부인은 갑자기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만약의 가정 하나가 떠오르자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로 그리될 수만 있다면 헬리오 왕국을 위축시킬 하나의 패를 가지게 되니까.

“그러나 그들이 에클레시아로 종교를 개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싸우는 중에 드워프들과 접선을 할 생각이었다.

헬리오 대공은 그들을 적대시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꿀 수 있었다.

“같은 에클레시아 신자들끼리 싸우게 된다면 나에게 이득을 주는 쪽의 편이 되는 것이 당연하니까.”

라스타 왕국이 드워프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것은 없었으니까.

헬리오 왕국과 달리 말이다.

* * *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그녀는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했다.

“그이에게 연통을 넣어라.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말이야. 란델리노가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인데 만나야지. 이 어미 때문에 눈치를 보고 못 만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알겠습니다.”

실리는 벨로나 공작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뭐?”

“공작 각하께서도 같이 식사를 하실 예정입니다.”

란델리노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과거에는 무서워서 감히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가 불편했다.

두렵지는 않으나 불편했다.

불편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공간에 같이 있기 싫을 정도로 그가 정말로 싫었다.

거의 수도에만 있던 아버지.

영지에 와도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던 아버지.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던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아버지 따위’로 인해 망치기 싫었다.

아버지와 먹기 싫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 알았어.”

그가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빛에서 애정을 느꼈다.

목소리에서 관심을 느꼈다.

우아한 자태에서 당당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 애정, 관심 그리고 당당함을 깨닫게 해줬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인정을 받아서 후계자가 될 것이다.

공작 가문의 후계자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후계자로 모든 것을 가질 생각이다.

자신에게는 그를 위한 열망도 노력할 의지도 자질도 있었으니까.

가장 큰 이유는 유일무이한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설령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는 어머니의 아들이다.

그런 자신이 고작 ‘싫어하는 사람’과의 식사를 피하다니!

귀족답지 않았고 어머니의 품위를 더럽히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 괜찮아. 어머니가 계시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란델리노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짜증이 났던 감정을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괜찮아. 더는 옛날의 내가 아니야. 더는 무력하기만 한 내가 아니야.”

그렇게 마음의 불안감을 억눌렀다.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더라도 그 안에 곪은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고통과 고독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었으니까.

억지로 감춘 그 상처는 언제 터질지 모를 마음이었다.

* * *

란델리노와 공작부인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가정교사에게 배운 것처럼 완벽한 인사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칭찬하며 정말 귀족적이라고 했던 자세였다.

이 인사하나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한 줄 안다면 칭찬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

매정하게도 그런 아들을 힐끔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남편의 무심함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래도 아들이거늘 어찌 저리 매정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다.

“의외군요. 솔직히 거절할 줄 알았거든요.”

사이가 워낙 좋지 않는 부부다.

얼마나 사이가 나쁜지 식탁 근처에 대기 중인 고용인들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긴장감에 미소는 없었고 몸은 굳어 있었다.

언제라도 일이 터질 때에 조치할 생각만 가득해 보였다.

“나를 위해 연회를 준비해 준 부인인데 어찌 그러하겠는가.”

“제 노고를 알아주신다니 기쁘군요.”

아들이 친부에게 외면당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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