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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72화 (72/221)

072화 빛 좋은 개살구

페루제 공작부인의 서슬 퍼런 눈빛에도 대공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가 곧 입을 열었다.

“아스파라 성을 주지.”

대공의 말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 어떤 일에도 의연할 것 같은 그녀마저 놀라게 만드는 선물이다.

“그게 진심이십니까? 그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준다는 말을 하시는지 아시는 것입니까?”

“알지. 알기에 준다는 것이야.”

아스파라 성과 그 일대는 라스타 왕국의 백성들에게는 아픈 손가락과 같았다.

“라스타 왕국의 사람들에게 그곳은 애환이 담긴 곳임을 잘 알아.”

그곳은 한 영웅과 관련된 성지였다.

라스타 왕국 건국 초기의 영웅이었다.

“그대들의 가슴 속에 가장 깊게 있는 영웅의 잠든 곳이기도 하고 말이지.”

“그곳이 많은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지요.”

백성들을 위해 칼을 들고 백성들을 위해 방패를 들며 싸웠다.

숙여야 할 때는 귀족들에게 숙였고, 고개를 들어야 할 때는 귀족들에게 당당하게 들었다.

왕에게 충성했고 충언을 했다.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되 자신감이 넘쳤다.

타인을 배려하고 위할 줄 알았으며 상대를 혼내야 할 때를 알았다.

공사에 치우침이 없어서 공을 치하할 때에 모두가 불만이 없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가 존경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

모두가 존경했지만 오직 1명은 그를 질투하고 싫어했다고 한다.

하필 그 1명이 왕의 측근인 재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헬리오 왕국이 공격을 했다.

영웅은 급하게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으러 갔다.

적국의 병사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였지만 영웅은 분투했다.

지원군만 와 준다면 승리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영웅이 기다리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재상이 일부러 지원군을 늦게 가도록 한 것이다.

결국 영웅과 그 부하들은 모조리 죽고 말았다.

그 이후에 재상은 그 죄로 인해 사형을 당했다.

아스파라 성은 백성들, 귀족들 나아가서 왕까지 존경했던 영웅이 죽었던 장소였다.

“영웅께서도 자신이 죽은 장소가 라스타 왕국이 되기를 얼마나 바라시겠는가. 자신을 죽인 헬리오 왕국에 속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말이야.”

“영웅께서 원통해하셨다고 전해지고 있죠.”

“내가 듣기로는 영웅뿐만 아니던데?”

그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지금도 온갖 음유시인들의 주제로 쓰이고 수많은 연극에 등장한다.

“국왕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있어도 그 영웅의 죽음을 모르는 이는 없다는 말이 있다며? 그 정도로 뜻깊은 곳을 내가 통 크게 그대들에게 돌려주겠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지.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말하겠는가?”

세월이 흘렀음에도 백성들과 귀족들, 왕족들은 영웅의 죽음을 잊지 않았다.

라스타 왕국에서 아스파라 성은 ‘영웅의 무덤’이라 불리며 반드시 찾아야 하는 영토였다.

그 열망에 따라 주기적으로 군대를 보냈지만 한 번도 점령하지 못했다.

가지지 못할수록 더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오죽하면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도 아스파라 성으로 가는 출병은 허락할까.

대공의 절묘한 수였다.

“정말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군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스파라 성’은 라스타 왕국의 백성뿐 아니라 귀족, 왕족까지 합심해서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드디어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신분과 상관이 없이 모두가 열망하는 일을 거절한다?

“그렇지요. 라스타 왕국의 대부분이 찾기를 원하는 곳이지요.”

그것은 모든 신분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겠다고 하는 짓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권세가 있고 강한 병사가 있다고 해도 아니 되었다.

모든 백성의 마음속에 불만을 생기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심이란 평소에는 약하지만 때를 잘만 탄다면 무엇보다도 강해지는 것이다.

군부 세력이 신생 귀족이 되어서 살 수 있게 된 것도 그 민심과 때를 잘 이용해서 혁명을 한 덕분이었다.

솔직히 그녀가 없었다면 그들은 토벌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녀가 잠시 눈을 찌푸리고는 곧 표정을 정돈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단지 대화 내용이 귀부인과 어울리지 않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대공께서 정말 생각을 많이 하신 듯싶습니다.”

그녀가 다시 우아한 자태로 차를 마셨다.

표정은 온화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한 지역의 영토를 날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음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거절하기 힘든 조건이에요.”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군. 고심한 보람이 있어.”

계속 언급했지만 아스파라 성과 그 일대가 역사적인 가치와 백성들의 열망이 담긴 장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지역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중점으로 본다면 별로였다.

지역 특산물이 상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아니었다.

특산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위치적으로 물류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뤄질만한 곳도 아니었다.

인구가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월등히 많은 것도, 군사적 요충지도 아니었다.

단지 ‘영웅이 죽었던 장소’라는 이력만 있는 지역이었다.

이성적으로 보면 ‘아스파라 성’은 찾아올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아스파라 성을 넘어 다른 영지들까지 가지려는 것이 아니면 모를까.

그녀가 권력을 쥐고 한번도 아스파라 성 탈환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였다.

잔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헐값에 엄한 병사들을 보내는 것과 같았다.

완전히 손해를 보는 장사다.

“10만은 과합니다. 그러니 5만으로 만족하시지요.”

대공이 반으로 확 줄여 버리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 7만”

그도 10만은 과했음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확 반으로 줄여 버릴 줄은 몰랐다.

너무하지 않은가.

자신이 얼마나 급한지 알면서 말이다.

“4만이요.”

대공의 말에 바로 답변을 해줬다.

거절이다.

“6만.”

“3만.”

대공의 제안에 바로 거절했다.

그것도 보낼 병사의 수를 더 줄였다.

이렇게 계속 말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알겠네. 이제 그만하지. 5만으로 하지. 되었나?”

그녀는 여기서 계속 줄이다가 아예 주지 않겠다고 할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것을 더 좋아할지 모른다.

대공은 그녀도 개념이 있음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남들은 당연히 받아들일 상황도 거부하는 여인이었으니까.

참고로 헬리오 왕국 입장에서도 ‘아스파라 성’은 패배한 적이 없다는 자부심 빼고는 그리 이득이 되는 곳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내일 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요.”

“좋아. 그러면 기다리지.”

역사상 가장 개방적인 ‘군사적 협약’으로 기록될 일이 여기서 발생했다.

그리고 곧 대공은 연회장을 나갔고 곧 연회는 끝났다.

많은 참석자가 나가면서 작게 소곤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공작부인의 눈과 귀가 많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다리 힘이 풀려서 지금도 겨우 겨우 걷고 있다니까.”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대공이 칸나 백작부인에게 가문 팔아먹었다는 말한 것이 이해가 된다니까요.”

“그렇지. 광증이 있다는 대공 전하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거 보고 소름이 돋았어.”

연회장을 떠나면서 모두가 공작이 아닌 공작부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벨로나 공작을 위한 환영연회’는 결국 ‘공작부인을 각인시키는 연회’였다.

그리고 연회가 끝나고 그녀는 집무실에 있었다.

해가 지고 달조차 구름에 사라진 늦은 시간이었다.

쿵, 쿵, 퍽, 퍽, 쿵, 쿵.

집무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보던 서류와 펜을 책상 위에 놓았다.

“실리, 밖이 시끄럽구나.”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느껴졌다.

실리가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얼른 나가 보겠습니다.”

“대공 전하 때문에 없던 일이 생겼다.”

“일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공작부인에게 말을 하고는 집무실을 나왔다.

실리는 무심히 복도를 쳐다봤다.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고 벽과 바닥에는 피가 낭자했다.

시체를 치우고, 피를 닦는 시종들과 하녀들이 보였다.

“좀 조용히 처리해야지.”

그녀가 진중하게, 작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청소하던 이들 중 하나가 다가왔다.

회색 머리카락의 순박한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그가 민망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빠르게 처리를 한다는 것이…….”

복도를 청소하는 인력들은 그들의 대화에 관심 없다는 듯이 묵묵히 일했다.

그들도 그 인력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실리가 질책하듯이 말했다.

일반인이라면 무서워하며 사과부터 할 분위기였다.

“한동안 조용했으니까요. 조용히 청소하는 법을 몸이 잊은 모양입니다.”

그런 분위기에도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마치 조카가 이모에게 농담하는 모양새였다.

상대의 호의적인 태도에도 실리는 어떤 감정적 변화도 없이 말했다.

“너희를 밤에 고용한 이유를 기억하거라.”

그들은 ‘밤의 고용인’이다.

밤을 담당하는 시종, 하녀인 동시에 공작부인의 적들을 도륙하는 호위 병사였다.

“물론입니다. 시체 처리와 청소는 잊어버려도 상대를 죽이는 것을 잊어버리면 저희 잘리지 않겠습니까.”

그가 윙크하며 말했다.

실리는 어쩌다가 저런 진중하지 못한 놈을 만났을까 싶어서 한숨이 나왔다.

“오늘 부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시네.”

그 말에 그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믿고 가겠네. 공작부인께서 마실 차를 가지고 와야 하니까.”

실리에게 장난스럽게 말해도 차마 공작부인에게는 그리 할 수 없었다.

“편히 갔다 오십시오.”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고 강하다고 자부했다.

그럼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에게는 대적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존재만으로 절대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녀라는 생각이 드는 존재였다.

실리가 아직 처리하지 않은 시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자 한 시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아까의 조카 같은 표정은 사라지고 살기가 어린 얼굴만 남았다.

“마스터, 아직 잔당들이 남아 있습니다.”

“최대한 애들을 풀고 조용히 처리해.”

목소리조차 날카로웠다.

부하들의 나태함에 자신이 모시는 분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동안 조용했다고 해도 공작부인께서는 적이 많은 분이시다. 근래의 평화에 젖어서 이번처럼 나태해진다면 그때는 너희가 나에게 죽을 줄 알아.”

“네, 죄송합니다.”

회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과거엔 라스타 왕국의 최고 암살길드 마스터였고 지금은 밤의 고용인들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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