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군사협정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아함의 극치였다.
보아하니 진짜로 여기에 온 목적을 들을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를 이리 개방된 공간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저와 담소를 나누고 싶어 하시네요. 저는 잠시 자리를 피해야 할 듯합니다.”
“내가 자네 부인을 뺏어 가는 듯해서 미안하군.”
참으로 기품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공작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것은 통보였다.
“얼른 이야기 나누고 이곳에 돌아오도록 해주겠네. 혹시 안 되나?”
대공도 이 연회장을 떠나서 그녀와 대화하기를 원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그도 급하다는 뜻일 수 있었다.
돌려서 말할 시간조차 아까운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공이 공작을 존중해서 허락을 구하는 상황이다.
부인과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옹졸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였다.
“아닙니다. 그러면 저도 함께 하지요.”
대화는 가능하지만, 단 둘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 된다.
헬리오 왕국의 최고 권력자와 라스타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밀담을 나눈다?
그 말이 알펜 왕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 줄 알고 둘만 두란 것인가.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화가 나는 것은 ‘알펜 왕국’에서 감히 ‘알펜 왕국’을 배제하고 수작질을 꾸미려고 한다는 것이다.
헬리오 왕국과 라스타 왕국이 알펜 왕국을 무시하지 않는 이상에야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그 말에 공작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행복하다는 표정이다.
너무 행복해서 그녀의 얼굴에 빛이 나올 것처럼 밝았다.
안 하던 짓을 하면 곧 죽을 징조라고 하던데 남편이 요절할 예정인가?
그러면 고맙기는 하지만 그것은 희망에 불과하다.
“그이가 이렇게 저를 아낀답니다. 제가 외간 남자랑 있는 것을 보지 못하네요.”
그 모습은 ‘남편의 사랑을 받는 아내’ 그 자체였다.
남편이 있으면 편히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다.
무엇을 요구할지는 몰랐으니까.
몇 가지 추측하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확신하기 어려웠다.
“받은 사랑만큼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어요.”
그 요구가 가문에, 왕국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남편의 개입은 방해였다.
“그이의 심기를 상하게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계산을 마친 그녀가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공작은 한순간에 자신을 아내에게 목메는 남자가 되었다.
동시에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인 척했다.
물론 이곳의 그 누구도 공작이 자신의 아내를 아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 죽이고 싶은 사이라면 모를까.
“그러지 않아도 되네. 두 사람의 담소를 방해해서 되겠나? 허나 부인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생각하게.”
공작이 나름 다정하게 말했으나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가증스러웠다.
게다가 공작부인은 남편을 죽이면 죽였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죽이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대공이 그 모습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새로운 장난이 생각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지. 나도 공작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아.”
장난을 치기 전에 ‘그 결과’를 상상하는 어린아이의 기대감이다.
계속 공작부인에게 당하기만 했으니 한 번은 그녀에게 엿을 먹여도 될 것이다.
아니면 잠을 못 잘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루비로즈 가문의 병사 10만을 빌려주게.”
귀족들은 이번 연회처럼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1천도 아니고 1만도 아닌 10만?
10만이 옆집의 개 이름이라도 되는지 너무 쉽게 말하고 있다.
알펜 왕국의 모든 병사들을 모아도 20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런데 그 절반을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왕국 병사의 절반을 떼어 줄 사람은 없었다.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서서히 굳었던 표정은 풀어지며 다시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그 눈빛은 흉흉하고 차가웠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요. 아버지께서 엄연히 계십니다. 아버지가 없으시다면 제 아우가 있고요.”
나의 소관이 아니니까 아버지나 동생에게 말하라는 뜻이다.
루비로즈 백작과 그 후계자에게 무슨 결정권이 있다고?
모든 결정권은 그녀의 손아귀에 있고, 모든 결정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
아버지와 동생에게 말하라는 것은 대공의 요청에 대한 답변이다.
대공의 요청의 이유는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거절부터 한 것이다.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 압권이었다.
“그대가 루비로즈고 루비로즈가 그대가 아닌가.”
“제가 루비로즈이기는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루비로즈임을 긍정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루비로즈의 핏줄이고 법적으로 백작의 딸이었다.
루비로즈가 페루제 루비로즈는 아니었다.
루비로즈가 페루제 공작부인이라는 것을 긍정함은 루비로즈 가문을 구성하는 방계와 아버지와 동생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영부영 넘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찻잔을 잡은 페루제 부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어떤 왕국들도 군사적 협상을 이런 자리에서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왕국의 안위와 관련이 되어 있고 비밀 유지가 중요함이다.
심지어 이 자리는 협상을 위한 격식이 없었다.
그에 맞는 품위도 없었다.
연회장에서 군사적 협상을 할 때의 격식을 차린다는 것 자체가 웃긴다.
분명히 이 일로 뒤에서 그녀를 조롱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왕국의 안위가 달린 일을 남편의 환영연회에서 한다고 말이다.
설령 없다고 해도 그녀 자체가 이 일을 수치스럽게 생각할지 모른다.
귀족은 때와 장소와 목적에 맞게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은 귀족적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루비로즈 가문의 사병이 그 정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찻잔을 잡던 손의 힘을 풀면서 말했다.
“무슨 겸손인지 모르겠네. 자네 가문의 사병이 20만인 것을 모르는 이가 있는가?”
주변이 웅성거렸다.
그것을 아는 귀족들도 있었고 모르는 귀족들도 있었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으나 이렇게 확인까지 받으니 마음이 복잡하군.”
“20만? 무슨 귀족 가문이 병사를 20만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오?”
“그 소문도 사실일 수 있겠네요.”
“소문? 무슨 소문?”
“20만에다가 주변 영지의 군대까지 동원하면 30만도 가능하다고요.”
“힉!”
양쪽 다 머리가 복잡하기는 같았다.
“머리가 아프네.”
“대놓고 누구 하나 밀어줬다가는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겠는데요.”
소드마스터이자 왕의 최측근인 공작과 30만 대군의 주인인 공작부인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누가 승자가 될지 보이면 좋을 텐데 애매했다.
둘 모두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과자를 집어 들고 작게 한입을 물었다.
그 작은 부분을 천천히 씹었다.
그 시간 동안 생각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얼른 다 먹고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제가 적이 많습니다. 가문의 병사를 반이나 떼어 주면 저와 가문은 누가 지키겠습니까?”
“남은 10만이 있지.”
“10만은 가문을 지키기에 부족합니다.”
“내가 듣기로 곧 있으면 더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쨍그랑!
그녀가 찻잔을 떨어뜨렸다.
시녀들이 얼른 다가와서 깨진 찻잔을 치웠다.
찻잔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서 대공을 봤다.
정말 사람 하나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눈빛이었다.
“전하, 제가 헬리오 왕국의 사정을 몰라서 여기서 조용히 있는 줄 아십니까?”
“어차피 나중에 모두가 알 일이 아닌가?”
“그것이 지금은 아니지요.”
지금은 알 때가 아니라는 말이 내가 허락한 때가 아니라고 들리는지 신기한 일이다.
더 이상 장난을 쳤다가는 도움은 받지 못할 것이다.
대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군을 보내 보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네. 그만하지. 그러니 자네도 루비로즈 백작에게 말하라느니, 그대 동생에게 말하라느니 하지 말게.”
그는 네가 자꾸 그러면 나도 엇나가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돌려 말했다.
“저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허나…….”
그때였다.
다시 찻잔이 그녀 앞에 왔다.
떨어뜨린 찻잔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것이었다.
“제가 듣고 아버지께 잘 말해드리겠습니다.”
겉으로는 아버지께 조언을 해드리겠다는 말이었지만 속의 뜻은 달랐다.
“아! 내가 그동안 오해를 했나 보군! 미안하네. 나는 자네가 다 가진 줄 알았지!”
네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명령을 내리겠다는 말이었다.
대공이 호탕하게 웃었다.
기분이 좋은 듯했다.
“좋네. 잘 듣고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해주시게.”
“네, 그러면 어떤 일 때문에 10만이나 필요하신지요.”
“그런 대군이 필요한 일은 하나지.”
“그렇군요. 그것뿐이지요.”
공작뿐 아니라 귀족들은 그들만의 대화에 감칠맛이 났다.
“그런데 그것은 과한 생각이 아닙니까? 희박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조짐이 보이면 빠르게 처리를 해야지. 그냥 놔두면 걷잡을 수 없어. 그렇지?”
“그렇기는 하죠.”
궁금해 죽겠는데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으니까.
우리끼리만 알 것이라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너무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제가 군을 보낸다는 뜻은 자국의 땅에 타국의 군대가 지난다는 것인데요?”
일리가 있었다.
10만 대군이 타국의 땅으로 아무런 제재 없이 들어온다.
그러다가 헬리오 왕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들어와서 갑자기 공격한다면?
10만의 군대를 막는 틈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른 군대를 추가로 보낸다면?
그렇게 된다면 국내의 적들과 국외의 적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가 찢어져야 한다.
군대는 분산시키는 것은 군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패배의 지름길이었다.
왕국에 위협적인 일이 생길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대공은 아무렇지 않았다.
“에이, 그대가? 지금 그대의 관심은 알펜 왕국과 동쪽이 아닌가?”
정말 떨떠름하게 만드는 발언이다.
“저도 알펜 왕국의 귀족이니까. 그이도 알펜 왕국의 공작이고요. ‘귀족들의 위에 선 자’로 왕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올바른 일이지요”
공작부인이 귀족이 되었으니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당연한데도 마치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알펜 왕국이잖아’라고 느껴졌다.
아까의 충격적인 모습들이 그녀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모양이다.
“그리고 자네 섭섭하지 않도록 내가 선물을 또 준비하지 않았는가.”
“저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무서워서 받을 수가 없군요.”
그녀는 담담했다.
선물에 대한 관심은 없어 보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주게. 이 선물을 받으면 절대로 헬리오 왕국 안에 들어와서 전쟁할 생각은 없어질 것이야.”
그러나 페루제 공작부인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조차 없앨 선물은 누구라도 흥미를 가질 법했다.
“정말 궁금하군요. 그 선물이 무엇인지요”.
차갑게 웃었다.
정말 재미가 없으면 상대를 죽일 것 같은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