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원하는 것은 망가뜨려서라도 가져야한다
대공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주도권을 쥘 필요가 있었으니까.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번에 내가 새로 재상을 임명했네.”
“그러시군요. 능력이 출중한가 보네요.”
그녀는 관심을 두지 않고 차에 집중했다.
대공의 다음 말에 입에 찻잔을 가져다 대려던 손이 멈췄다.
“재상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더군. 그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이야.”
가뜩이나 숨 막히던 연회장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아까의 일은 서로 농담으로 주고받고 끝났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한 왕국의 재상을 죽이려고 한 범인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을 지목한 것이다.
그것도 헬리오 왕국의 대공이 직접 말이다.
그 무게는 다른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작위가 높을수록 말이 가진 권한이 컸다.
반대로 그 말이 가져올 빌미는 정치적 영향력을 넘어서 가문까지 해칠 수 있었다.
특히 대공처럼 정치적 적이 많은 인물은 더욱 그러했다.
즉, 확신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발언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명백하게 밝혀내야 합니다.”
이것이 혼인 전의 일인지 아니면 혼인 후의 일인지에 따라 공작 가문까지 엮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경우에는 아내의 편을 들었다.
가문이 엮인 이상, 비록 혼인 전이라고 해도 그녀의 명예는 가문과 연관되어 있었다.
지금은 법적으로 남편이었고 그녀는 이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저희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요.”
공작은 달랐다.
그는 이 일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일 수 있었다.
벨로나 가문을 가엾게 여긴 신의 안배!
“제발 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녀는 자신의 아내를 죄인으로 만들 의지가 충만했다.
생각해 보면 혼인 전의 죄인 것만 드러나면 교황의 허락 없이 혼인 무효를 할 수 있었다.
혼인 전의 부덕함을 감춘 여인은 진실 되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 혼인이 무효가 된다.
부덕함을 미리 알렸다면 무효가 되지 않는다.
“저는 제 아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지만…….”
공작은 100% 저 악독한 여인이 그랬을 것이라고 여겼다.
혼인 무효를 주장하면 그녀는 미리 말했다고 거짓말을 하겠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만약 혼인 전의 죄가 진실이고 그녀가 죄인이라면 이 혼인도 무효지요.”
공작은 정말 이게 기회구나 싶은지 술술 말을 내뱉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나 어쩌겠는가.
저런 인간이라도 자신의 남편이다.
그러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그이의 매력이기도 했다.
이러니 마음을 터놓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 처음부터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녀가 차를 우아하게 들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공작뿐 아니라 모두가 그녀가 부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자가 대공 전하께 간 모양이군요. 이름을 개명했고요. 그에 관한 정보는 대공께서 감추셨으니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와 그렇지 못한 발언이었다.
게다가 대공의 재치에 감탄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감추고 거짓이라고 주장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그런데 도리어 인정하는 말을 하다니!
연회장 내내 일어나는 경악스러운 일에 귀족들은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제가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것을 이리 쉽게 인정하는가?”
대공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렇게 깔끔하게 인정할 줄은 몰랐다.
이것을 빌미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우위를 점치려고 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공작과의 이혼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이 조사를 명령하고 그것이 사실임이 드러난다면 공작은 혼인 무효를 주장할 수 있었다.
혼인 무효 승인은 교황뿐 아니라 국왕도 가능했다.
근거를 가지고 주장만 한다면 무효 시킬 수 있었다.
공작과 왕에게는 아쉽게도 이 일은 헬리오 왕국 내의 살인 미수 사건이었다.
알펜 왕국에서 이 일을 조사할 명분이 없었다.
헬리오 대공이 조사하지 않겠다고만 하면 공작이 혼인 무효를 주장할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조사를 막으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계획이 망했다.
이렇게 대놓고 인정을 하면 혼인 무효를 하겠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대공은 속으로 난감해했다.
“헬리오 왕국에서 재상이 될 만한 인재에, 제가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대상은 한 명이지요.”
다시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남들은 심장이 멈추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고 말이다.
“너무 가지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죠.”
그녀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를 회상하는 듯한 아련함까지 보였다.
정말 그자를 알게 되었을 때는 헬리오 왕국을 관리할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했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헬리오 왕국 곡창지대의 영지를 주겠다.”
“그대가 원한다면 수많은 미녀도 주마.”
“그대가 원한다면 넓은 창고를 가득히 채울 금은보화도 주마.”
그래서 온갖 회유를 했었다.
“그 곡창지대는 그곳을 얻기 위해 그대의 군대가 죽일 헬리오 왕국 백성들의 피로 얻게 될 것이니 거부하겠습니다.”
“그 미녀들은 그대의 군대가 없애 버릴 고향의 여인일 것이 뻔하니 거부하겠습니다.”
“그 금은보화는 당신의 군대가 도륙할 일가족의 재산일 것이니 거부하겠습니다.”
자신의 선의를 거부했다.
헬리오 왕국을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자꾸 거부하더군요. 계속 제안을 했지만 안 되더군요. 그렇지만 포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
뭔 소리인지 모를 말이었다.
말과 행동이 달랐다.
포기하지 않았다면 왜 그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나왔다.
“그래서 시신이라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의 모든 귀족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정말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무서워서 사교활동을 쉬기로 마음먹는 부인들도 있었다.
‘이거, 무서워서 살겠나. 당분간 사교계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혹시 부르기라도 하면 어쩌지? 제발 나는 부르지 말기를…….’
방계 가문, 가신 가문의 부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내가 저런 사람에게 처음에 무례하게 군 것인가. 내가 미쳤구나. 미쳤어!’
‘첫 만남이라고 자비를 베푼 것이구나. 정말 허리가 아플 정도로 숙이며 말을 들어야겠어.’
앞으로 저런 인물을 모셔야 했으니까 그들은 그녀 앞에서는 숨소리도 제대로 못 쉴 것임을 예감했다.
그것은 앞으로 사교계 활동에서 그녀를 만나게 될 모든 귀부인에게 해당되었다.
“살아서 가질 수 없다면 죽여서 가지고 싶은 인재였거든요.”
그녀는 가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가져야 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그것이 망가져서 사용을 못하게 될지라도, 그 사람을 죽여서라도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참! 참고로 헬리오 왕국 사람을 고용했었답니다.”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정말 순수한 어린 영애처럼 보일만한 웃음이었다.
“헬리오 사람을 죽이는데 헬리오 사람을 써야지요.”
그녀처럼 얼굴과 말의 내용이 이렇게 다른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요?”
무려 재상을 죽이려고 한 일이 드러났다.
비록 재상이 되기 전의 일이라고 해도 지금은 재상이었기에 문제가 컸다.
게다가 본인이 자백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타인을 죽이려고 한 일을 감사하라고 한다.
“제가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가 대공 전하를 찾아갔겠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그 인재를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가 말을 하면서 미소가 지워지고 안타깝다는 얼굴로 변했다.
“슬프게도 전하께서는 저만큼 인재를 보는 눈도 인재를 찾을 행운도 없으시니까요.”
정말 꾸준히 상대를 화나게 만들었다.
대공이 원하는 것만 없었어도 당장에 칼을 뽑고 죽이려고 들 정도였다.
그녀라면 그에 대한 대비했을 것 같기는 하다.
“제가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전하께서 그가 인재임을 알아본 것이지요.”
결론은 그거였다.
내가 죽이려고 했기에 그 인재가 너에게 갔고, 내가 죽이려고 했기에 그 인재가 인재임을 네가 알 수 있었으니 고마워해라.
어떤 사고를 해야 그런 결론이 나는지 모르겠다.
귀족들은 이제는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할 지경에 도달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러는지 예상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대공이 자신의 분노를 갈무리했다.
곧 크게 웃었다.
연회장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재상도 고마워하고 있어. 자네가 아니었으면 나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는 작게 혀를 찼다.
그녀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혼인 무효를 무마해 줄 명목으로 가져온 것들이 이렇게 버려질 줄은 몰랐다.
공작의 편에 서서 혼인 무효를 돕는다는 길도 있었다.
그것은 대공이 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알펜 왕국에 머물던 그녀의 관심이 헬리오 왕국으로 향한다면 그야말로 개판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자네보다는 인재를 보는 눈도 행운도 떨어지지 않는가.”
무엇보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알펜 왕국은 들어줄 수 없었다.
“가져와라!”
명령이 떨어지자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헬리오의 시종들이 상자들을 들고 들어왔다.
“헉! 저게 다 뭐야?”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눈이 흔들렸다.
시종들이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정말 많은 보석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상급이었다.
“저게 다 얼마에요?”
“진짜 공작부인이 대단하시네요.”
“거슬리게 하면 안 되겠어요.”
일부 귀족들은 볼 일도, 만질 일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재상을 죽이려고 했던 일은 이렇게 쉽게 무마가 되었다.
죽임당할 뻔한 당사자가 고맙다고 선물을 보내왔는데 조사가 뭔 일이란 말인가.
혼인 무효는 물건너갔다.
그녀가 그 선물을 보고 인사를 했다.
“이리 선물까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재상이 여러 번 당부했지. 정말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말이야.”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재상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러지.”
살해 지시자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하며 선물을 주는 희대의 일이 생기는 모양이다.
“이런 하찮은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것은 아닌 듯한데 말입니다.”
그녀에게 벨로나 공작 가문의 큰 어른이 모욕을 당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대공을 선왕 시해자라고 말한 일도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에 헬리오 왕국의 재상(재상이 되기 전에 죽이려고 했음)을 죽이려고 했던 일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이 그녀에게는 ‘하찮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일을 하찮게 만들었다.
대공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했던 모든 말의 가치를 없애 버렸다.
그녀는 이번에도 승자였다.
다시 대공을 바라보고는 우아하게 말했다.
“바쁘신 시간을 쪼개서 이 연회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것인지요? 설마 정말 농담을 하려고 시간을 허비하면서 여기에 오신 것입니까?”
그녀가 비아냥거렸다.
비아냥거림이 그녀와 너무 어울렸다.
“여기서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따로 시간을 내겠습니다.”
승자의 여유로움은 표정에서 보였고 승자의 오만함은 말투에서 드러났다.
마치 승전한 장군이 패배한 병사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