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69화 (69/221)

069화 가문을 팔아먹은 여인

칸나 백작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아들도 어머니를 모욕한 대공에게 뭐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침묵해야 했다.

아들이 대공에게 따지려고 하는 기미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거라. 나서면 아니 된다.’

어머니의 표정에서, 눈빛에서 그 뜻을 눈치챈 아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가 여기서 나서면 어머니가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괜히 대공도, 페루제 공작부인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지금도 충분히 칸나 백작부인에게 줄 수 있는 모욕을 너무 잘 주고 있었다.

자신의 편을 들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자신의 힘으로 이 상황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놓고 가문을 팔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 그게 무슨…….”

그녀는 말을 떨며 말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환청인가 싶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리 싸게 팔았는지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더군.”

대공이 말하며 그녀를 비웃었다.

자신의 아버지의 집안이고 자신의 뿌리인 ‘공작 가문’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칸나 백작부인이다.

자신이 정확하게 말을 들었음을 깨닫고 수치스러워졌다.

공작의 말로 자신은 가문을 팔아먹은 희대의 악녀가 되었다.

곧 얼굴이 붉어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벨로나 공작은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칸나 백작부인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공의 말은 엄연히 공작인 자신이 있음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가문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패배를 말하는데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대공전하! 이렇게 가문을 모욕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이러실 것이라면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시지요! 이 일은 추후에 정식으로 항의를 하겠습니다.”

살기를 띄우며 말하는 벨로나 공작을 보면서 대공은 시큰둥했다.

자신의 가문 욕한다고 왕족을 죽이는 귀족은 없었다.

자기 가문을 욕한다고 다른 귀족을 죽이는 귀족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상대를 죽인다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왕족과 귀족은 없었다.

대공에게 항의는 할 수 있어도 그를 해칠 명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들렸나? 미안하군. 내가 생각이 짧았네.”

대공은 사과하면 그뿐이었으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욱하고 대공을 죽이려 들 가능성도 존재했다.

물론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다행히 공작은 미치지 않았다.

“제가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결투란 상대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옳았음을 힘으로 증명하려고 쓰는 방법이다.

각자의 무기로 대련을 하여 싸우는데 다치는 일이 많았다.

진짜 검이나 창으로 싸웠으니까.

어떤 학자들끼리의 결투에는 패배자의 코가 잘려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누가 이길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겠지. 괜찮겠나?”

그렇지만 대공도 공작과 같은 소드마스터였다.

쉽게 제압하거나 죽이지 못한다.

결투를 해봤자 서로에게 좋은 점이 없었다.

결투를 하게 되면 진지하게 싸우게 될 것이고 양쪽 모두 성한 몸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 개판에도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페루제가 잔을 내려놓았다.

“대공전하.”

다정한 말투였다.

벨로나 가문이 모욕을 당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미소’였다.

대공을 부른 것이 전부임에도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모습과 말을 하나라도 놓칠까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전하의 말씀처럼 칸나 백작부인께서 제 편의를 많이 봐주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경악했다.

‘편의’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의 의미는 명확했다.

칸나 백작부인이 가문을 팔아넘겼다는 말을 긍정한 것과 같았다.

당연히 부정을 하고 가문의 치부를 감추려고 할 줄 알았다.

“부인! 왜 그따위 망언을 하시는 것이오!”

공작의 얼굴이 빨겠다가 하얗게 되었다.

그녀는 공작의 분노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어찌 제가 대공전하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뭐?”

대공이 의아해하며 눈을 찡그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대공께서는 사람 하나 죽여서 나라를 가지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렇게 쉽게 해보고 싶은데 방도를 알려주시지요.”

“헉!”

어떤 부인은 자신이 쥐고 있던 부채를 떨어뜨렸다.

어떤 신사는 자신의 귀를 파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이는 침이 떨어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침이 흐르는 것을 닦지 않았다.

공작조차 부인이 한 말이 자신의 들은 말이 맞는지 믿지 못하여 얼어붙었다.

“저는 그래도 가문 간의 계약서도 쓰고 정식 절차를 밟았습니다.”

참으로 은은한 웃음이었다.

어느 순간, 대공의 검이 페루제 공작부인의 목 근처에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검을 들이댔다.

대공을 죽였다는 죄로 죽을 수 있었음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서늘하게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세상에는 해서는 아니 될 말이 있다는 것도 모르나?”

그는 자리로 가는 계단에서 검을 들며 서 있었고, 그녀는 계단의 목적지인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

칸나 백작부인에게 갔다가 그녀에게 오면서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최대한 빠르게 검을 뽑아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마지막 이성이 그녀를 죽이지 못하게 했지만 말이다.

공작은 너무 놀라서 대공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생각했다.

대공이 그녀를 죽여 주지 않아서 아쉽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녀를 죽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 이 상황을 방관했다.

“말 한마디를 잘못해서 죽는 사람들이 많음을 모르는가.”

분노하는 대공, 경악한 귀족들, 벨로나 공작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녀가 언급한 대공이 죽인 ‘한 사람’은 바로 갑자기 죽어 버린 선왕이었다.

선왕이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대공은 지금의 권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선왕의 죽음이 가져다 준 권력 부재의 틈은 그에게 기회였으니까.

간략하게 말하자면 페루제 공작부인은 대공이 선왕을 죽인 죄인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대공이 헬리오 왕국의 권력을 쥘 자격이 없음을 말하며 그의 정적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명분이었다.

“내가 그대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나? 감히 그딴 말을 하고?”

대공에 대한 모독이자 그의 권력을 위태롭게 할만한 발언이었다.

여기서 그녀를 둔다는 것은 자신이 선왕을 죽였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약점이 잡혀서 그런 것이라고 여기기 충분했다.

게다가 그게 더 자극적이고 흥미를 유발했으니까.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 끝날 상황이다.

“풋.”

그녀가 작게 웃더니 나중에는 연회장이 떠나가라 웃었다.

“농담 좀 했다가 이리 울컥하십니까?”

“농담이라고?”

“네. 농담이지요. 설마 진담이었겠습니까?”

엄청난 무례를 저질렀다.

대공이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뭐라 말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조금만 검이 움직이면 죽을 수 있는데 말이다.

“너희도 진정하고 각자 자리로 가렴.”

“네.”

그녀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던 기사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대공께서 아까 농담을 하시기에 저도 한번 해봤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대공이 한 농담’은 칸나 백작부인이 헐값에 가문을 팔아넘겼다는 말이었다.

“지금 그것과 자네의 말이 같다고 생각하는가?”

대공이 선왕을 죽였다는 말과 대공이 칸나 백작부인에게 한 말의 무게는 완전히 달랐다.

한낱 백작부인을 조롱한 것과 선왕의 죽음을 타살로 언급하는 것의 차이는 명백했다.

“저에게는 같습니다.”

“감히 왕과 공작부인이 같다고 말하는가!”

그녀의 웃음이 사라졌다.

시체가 살아서 자신을 보는 착각이 드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대공, 아까도 말했지만 같습니다. 라스타 왕국의 입장에서도 같습니다.”

그녀의 발언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도저히 그녀의 의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유독 아끼셨습니다. 마치 친족처럼요.”

그녀는 알펜 왕국의 귀족이자 라스타 왕국의 귀족이었다.

그녀를 아낀다는 왕은 라스타 왕국의 왕이었다.

알펜 왕국의 왕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라스타 왕국의 국왕은 그녀를 아낄 수밖에 없었다.

혁명을 일으킨 국부 세력에게서 그와 가족들을 지켜줄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면은 그들의 죽음이었다.

“혼인 전부터 폐하께서는 타국에서 홀대를 당할지 모를 저를 걱정하셨답니다. 그래서 친히 저에게 칭호와 자격을 주셨지요.”

그녀의 분노는 그들의 죽음이었다.

“국왕폐하께서 경국(經國—다스릴 경, 나라 국)부인이라는 칭호와 폐하와 같은 곳에서 앉을 권리를 하사하셨답니다.”

그녀의 패배는 그들의 죽음이었다.

왕은 유일무이한 존재였고 모든 이들의 위에 있었다.

왕비조차 왕과 같은 줄에서 앉지 못한다.

왕의 옆자리에 있되 의자는 조금 뒷쪽에 있었다.

그것이 궁정 예법이고 타국에서도 적용되었다.

왕비조차 똑바로 옆에 앉지 못하는데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왕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왕이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 달라고 주는 뇌물이었다.

이렇게 되니 상황이 이상해졌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라스타 왕국의 국왕이 그녀를 자신과 같은 대우를 하라고 한 여인이다.

그런 여인을 보고 헐값에 공작가문을 사들였다고 비아냥거린 것은 명백히 대공의 잘못이었다.

몰랐다고 해도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무례가 된 것이다.

선왕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무례’였지만 한순간에 ‘대공의 무례’에 대한 대응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무례를 무례로 갚아준 것으로 포장 가능했다.

양쪽이 잘못한 상황에서 싸워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남았다.

대공이 날카롭게 노려보더니 검을 거뒀다.

“그래. 농담이지. 농담이고말고. 내가 격했네. 그래도 자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 내가 오해하지 않았는가.”

대공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낸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평소에 농담을 잘하지 못해서요. 다음에는 더 발랄하게 해보지요.”

그녀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화사한 꽃처럼 보였다.

한 치의 양보가 없는 다툼이 끝났다.

꿀꺽.

귀족 중 하나가 침을 삼켰다.

긴장이 풀렸고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워낙 조용하여 그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부터는 부디 그렇게 해주게.”

“알겠습니다. 대공께서도 부디 말을 하실 때 생각을 해주십시오.”

그 와중에도 대공을 공격하는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모두가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는 오해가 될 언행을 하지 않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으득.

대공이 이를 갈았지만 그녀는 차를 음미했다.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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