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68화 (68/221)

068화 환영 연회의 시작

모든 사람이 연회장에 왔다.

중앙은 춤을 출 수 있도록 남겨 줬다.

그리고 나머지 자리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테이블 위에는 손님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가문이 적힌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곧 시종의 말이 들려왔다.

“헬리오 대공 전하와 벨로나 공작 부부께서 드시옵니다.”

연회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들과 비견될 만큼 중요한 인물이 연회장에 들어왔다.

“헉!”

그리고 모두가 경악했으며 눈앞의 상황을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만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공의 표정은 굳었고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공작부인만 느긋해 보였다.

가문의 연회가 생겼을 시에 주최자가 상석인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자신보다 높은 상대를 앞에 두고 상석에 앉는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남작, 백작, 후작 등은 아예 상석의 의자를 없애고 손님들을 응대한다.

힘들 때는 연회장 뒤편에 있는 가문 사람들을 위한 작은 공간에서 잠시 쉰다.

공작은 달랐다.

모든 귀족의 정점에 있었다.

왕, 직계 가족 혹은 영향력이 있는 왕족이 오지 않는 이상에는 상석을 만들어서 앉는다.

타국이라고 해도 선왕의 동생이며 현왕의 숙부이자 실질적인 지배자인 대공은 상석에 앉아야했다.

주최 가문이 공작 가문이면 그러함이 마땅했다.

그런데 대공과 공작 부부의 자리를 동등하게 같이 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귀족들의 충격은 상당했다.

일부 귀족들은 눈을 비비며 다시 그들의 자리를 봤다.

“제 눈이 잘못된 건가요? 이거 환상 마법인거죠?”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다른 일부는 이것이 가져올 여파를 걱정했다.

“대공 전하를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까?”

“왕족에게 수치를 주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왕족과 귀족은 동등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왕의 가신이니, 왕의 가문이 가장 위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왕족과 귀족이 나란히 있다는 것은 대공의 격을 떨어뜨리는 짓이며 외교적 결례였다.

헬리오 왕국에서 항의한다면 고개 숙이고 사과를 해야 할 만큼 무례한 자리 배치였다.

모두가 대공이 분노하며 난리를 피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의 가신들이라도 나설 것이라고 여겼다.

“대공 전하.”

발렌티노 공작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사과를 하려고 그를 불렀다.

그 말을 듣지 않고 대공이 말을 꺼냈다.

“내 자리는 어디지?”

너무 담담했다.

눈앞에서 당한 모욕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가운데 자리입니다.”

특히 대공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순순히 그녀의 안내를 따랐다.

“그래도 왕족이라고 가운데라니, 고마워해야 하나?”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그녀가 이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녀는 정숙하며 예의바른 말투로 응대했다.

그 모습만 보면 이런 배치를 했다고 믿지 못할 것이다.

“실수를 한 것이겠죠?”

“그, 그렇겠지. 설마 이것도 의도적으로 한 거겠어?”

그것만으로 귀족들의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예상치 못한 일은 또 벌어졌다.

대공의 자리에 너무 충격 받은 귀족들은 이제야 공작부부의 자리를 깨달았다.

미처 인식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석에 의자는 셋이었다.

가운데 자리가 대공이라면 양쪽의 자리는 공작 부부의 자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운 걸요.”

원래 주최자 부부는 함께 앉고 더 높은 신분의 상대 가까이에 남편이 앉는다.

이는 남편이 아내보다 위에 있음과 영향력도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사회적 관습을 그녀는 깨 버렸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남편과 별개로 힘이 있음을 자리 배치로 보여 준 것이다.

공작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딴 짓을 할 줄 몰랐다.

그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대공까지 있는 자리에서 소리를 치며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았다.

곧 공작이 잔을 들며 말했다.

“수도에서 돌아온 나를 환영하기 위해 모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부디, 이 연회를 즐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연회의 시작이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주최자인데 저희가 춤을 추지 않으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그녀가 입을 열자 공작이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데리고 중앙홀로 나왔다.

그들은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아름다운 자태였다.

초대받은 귀족들도 중앙홀로 나왔다.

그들도 춤을 췄지만 집중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들은 춤추는 공작 부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죽을 거 같았다.

“가문을 위한다면서 이따위 짓을 하다니 참 대단하군.”

공작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가문을 위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대공을 모욕하고 나의 격을 떨어뜨렸지.”

헬리오의 왕족이자 최고 권력자인 대공과 귀족인 공작 부부를 동등하게 대우했으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편을 아내와 동등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틀린 말씀만 하는군요.”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유지하며 그의 말이 전혀 맞지 않다고 대답했다.

“나, 페루제와 격이 동등하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에요.”

다정하면서도 남편에 대한 애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당신이 저에게 고마워해야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말투였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고마울 것이 따로 있지 이딴 짓을 고마워하라고? 그리고 그 따위 말투가 남편에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가?”

뻔뻔한 자태와 무례함에 공작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망신을 당하든 말든 여기서 싸우고 싶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했다.

헬리오의 대공만 없었다면 진짜로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부부 싸움을 했을지 모른다.

“그럼요. 당연하죠. 지금 반응이 더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녀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서 미소가 지워졌다.

아니, 미소가 바뀌었다.

서늘하고 지금이라도 당장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듯한 얼굴이었다.

광기가 엿보였다.

“라스타 왕국에서 국왕 전하조차 내게 고개를 숙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왕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당연한 당신과 내가 어찌 같죠?”

그녀는 혁명을 통해서 라스타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혁명을 같이 한 신생 귀족 세력인 군부도 그녀를 적대하기는 해도 대항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대적했던 군부 세력이 얼마나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는지 아니까.

“내가 당신보다 더 위에 있잖아요. 그런 내가 당신을 위해서 ‘나의 격’을 낮췄는데 고마워해야죠.”

공작은 그동안 그녀가 자신에 대해 어찌 생각했는지 드디어 알았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작이 보기에 그녀는 왕에게 충성하는 자신을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개’처럼 생각하다니!

수치스러웠다.

“전하께서도 그것을 아시기에 가만히 있던 거예요. 나와 동등하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니까.”

“핫! 그대.”

공작이 이성을 잃고 한판 제대로 붙어 보려고 할 때였다.

“에잇! 지루하군! 공작부인! 이게 뭔가! 기대했는데 지루하기 짝이 없어.”

연회장의 분위기, 사람들의 동요와 호기심 등을 따분한 표정으로 보던 대공이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중앙 홀의 사람들은 춤을 멈췄으며 모두의 시선이 대공에게 향했다.

대다수가 광증이 있다고 알려진 대공이 기행을 부릴까 봐 걱정했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발렌티노 공작에게 대공이 다가왔다.

어느덧 그는 중앙 홀에 섰다.

“여기를 즐겁게 만들어야겠어.”

장난을 치려는 순간, 아이가 느끼는 기대감이 대공에게서 느껴졌다.

“이 연회장에 칸나 백작 부인이라고 있는가?”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연회장이 울렸다.

공작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언급된 상황에 당혹스러웠으나. 곧 진정했다.

“어찌 제 고모님이 이곳에 계신지 물으시는 지요?”

“아~ 한번 만나고 싶어서 말이지. 있다면 어서 여기로 부르게.”

그 모습을 담담하게 보던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전하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상석에서 앉아서 만나시지요.”

“하긴 자네 말이 맞아! 엄연히 대공인데, 이런 홀에서 귀부인을 만나면 쓰나!”

대공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다시 갔다.

칸나 백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공이 그녀를 직접 호명해서 찾았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녀가 이곳에 초대되었음도 안다는 의미였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칸나 부인을 찾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걱정된다고 칸나 백작 부인이 없다고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거짓을 말했다가 들킨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대공을 기만한 행동이니까.

대공이 앉자 공작부부도 자신들의 자리에 앉았다.

“대공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칸나 백작 부인과 아들이 그의 앞에 섰다.

“나는 백작 부인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니까, 그대가 여기 올 필요는 없네.”

그 말에 그녀의 아들은 자리를 비킬 수밖에 없었다.

칸나 백작 부인은 두려움에 떨었다.

대공이 광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알펜 왕국까지 알려져 있었다.

칸나 백작 부인이 떨리는 손에 힘을 줬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이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무서워하나, 섭섭하게. 누가 보면 내가 자네를 죽이려 든다고 오해하겠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뭘~ 괜찮아. 내 광증이 언제 도질지 모르는 것은 사실이니까. 갑자기 광증 때문에 그대를 죽일지도 모르니 조심하게나.”

장난스러운 말투와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칸나 백작 부인은 더 공포에 떨었다.

그가 침묵하더니 거만한 자세로 한 손을 턱에 괴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으흠…….”

그녀는 자신이 덫에 걸린 짐승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공작은 마치 뭔가를 고민하는듯했다.

“역시 안 되겠어.”

그는 아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 유명한 칸나 백작 부인을 직접 보는데 앉아만 있을 수 있나! 가까이에서 봐야지!”

크게 웃으면서 그녀의 두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 말에 귀족들이 작게 소곤거렸다.

“도대체 칸나 백작 부인이 헬리오 왕국에서 유명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러게요.”

“타국의 대공이 올 정도로 뭔가를 했으면 저희가 모를리 없잖아요.”

“그러니까요.”

대공은 주변에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호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계속했다.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

알펜의 귀족들은 아직도 몰랐다.

소문으로만, 종이에 적힌 정보만으로는 와 닿지 않았으니까.

“페루제 루비로즈에게 이 공작 가문을 헐값에 팔아넘긴 칸나 백작 부인이 누군지 알고 싶었거든.”

그녀가 위험하고 유능하며 무서운 사람임을 말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은 진실을 거짓처럼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그녀는 광증에 여러 사람을 죽인다는 대공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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