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불청객
방계를 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방계는 가문을 지탱해 주는 존재가 아니다.
가문을 등쳐먹는 존재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전제를 바꾸게 만든 사람은 공작부인이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겠지.”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은 대다수 방계들을 처리하고 가문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방계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 원로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좌지우지하려는 싹을 아예 말려 버린 것이다.
이것은 성공적이었다.
빠른 결단력과 실행으로 그녀는 적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처단했다.
결국엔 라스타 왕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되었다.
완벽한 성공 사례였다.
이제 방계들을 처리하느냐 처리하지 못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시대에 변화에 맞게 빠른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느냐 못느냐 정해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 첫 번째가 벨로나 공작이지 않은가.
알펜 왕국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알펜 왕국에서는 늦은 편이지. 헬리오 왕국에서는 이미 꽤 진행된 일이니까.”
헬리오 왕국은 빠르게 그 변화를 눈치채고 움직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알펜 왕국은 늦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쭉정이가 누구고 알짜들이 누군지 알 수 있겠지. 제대로 된 사람들이 누군지 파악이 되면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그녀는 가문의 내실을 제대로 다진 자들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름이 알펜 왕국에 널리 퍼져야 할 거야. 지금보다 더욱.”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언제든 준비가 되어있으니, 명령만 해 주십시오.”
실리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의 공식적인 등장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뭐?”
“그게 정말인가?”
공작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미친 것이 아닌가. 여기를 왜 와?”
페루제 공작부인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억지로 여기에 오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것에 얼굴을 찌푸렸다.
공작 부부의 반응은 서로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환영 연회는 말 그대로 나를 환영하기 위한 연회다. 북부 귀족들만 모이는 것이니 정중하게 거절하지.”
발렌티노 공작은 상대의 방문을 거절하기로 했다.
분명히 그 여자와 관련이 되어서 오는 것이 뻔했으니까.
상대의 영향력만 키워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목적으로 오려는지 알아봐. 두 사람 간의 관계도 확실히 조사하고.”
“네.”
공작은 먼저 했던 조사에서 들어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아채고 명령을 내렸다.
부부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이는 오지 못하게 하겠지. 그래도 그놈이 왜 이곳에 굳이 오려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겠지.”
페루제 공작부인 역시 상대의 방문 의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일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 * *
“헬리오의 대공이 공식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헬리오는 알펜 왕국과 라스타 왕국 서쪽에 있는 왕국이었다.
대공의 이름은 아스란 헬리오.
헬리오의 대공인 그는 선왕의 아우이자 현왕의 숙부였다.
갑작스럽게 승하한 선왕으로 왕국은 혼란스러워졌다.
영지와 사병이 있는 왕족들이 어린 왕자를 대신하여 자신이 왕이 되겠다며 나섰다.
여러 귀족이 ‘유일한 선왕이 어린 아들’을 앞세워서 권력을 차지하려고 했다.
세르반 헬리오는 수많은 분란을 이겨내고 왕국의 실세가 되었다.
그것도 단기간에 끝내 버리고 왕국을 안정화시켰다.
능력과 세력이 받쳐줌에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은 그에게 광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때때로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짓거리를 하지만 않았어도,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미치광이를 왕으로 인정할 백성과 귀족은 없었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님으로 부르는 것이 안 된다면 공식적으로 방문을 하겠다?”
그녀는 뭔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어느 왕국의 사절단이 그 나라의 수도와 국왕 폐하가 아니라 공작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냐?”
사절단은 왕국 간의 교류를 위해 방문하는 ‘왕의 대리자들’이다.
그 교류에는 정치, 문화, 외교 등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사절단을 왕실이 아닌 공작 가문에 보낸다는 의미는 컸다.
왕실보다 공작 가문을 더 위로 평가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왕실의 격을 떨어뜨리는 짓이다.
과하게 생각하자면 공작 가문을 하나의 왕실, 즉 왕국으로 인정한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벨로나 공작 가문과 알펜 왕실의 사이를 대놓고 나쁘게 만들겠다는 의도가 아닌 이상에는 이럴 수 없었다.
“사절단을 보냈는데 거절을 하면 헬리오 왕국을 무시한 것이고… 거절하지 않으면 왕실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이란 말이지…….”
헬리오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을 거절함은 그들을 보낸 왕을 거절한 것이다. 헬리오 왕국의 실권자인 대공을 거절한 것이기도 하다.
공작이 왕을 무시했다?
공작이 귀족 계급 중에서는 가장 높다고 해도 왕은 아니었다.
상대는 타국의 왕이라고 해도 왕이다.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자국의 정적들에게 좋은 빌미를 주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헬리오의 대공이 초대 손님으로 오는 것은 확정되었겠군.”
그녀가 혼잣말하듯이 말하고는 실리를 쳐다봤다.
“가신, 방계 부인들 다시 불러. 계획 수정을 좀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혹사당한 부인들은 헬리오 대공 때문에 다시 혹사를 당하게 되었다.
그녀들이 피곤해 하든지, 말든지 공작부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알아보라는 것은?”
“헬리오 왕국 내에서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실리는 알아낸 것이 없다는 대답을 하면서도 차분했다.
군사적 충돌을 생각했다면 군대와 관련된 물자의 흐름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병사 훈련의 강도 변화 등도 없어 보였다.
경제적 교류는 지금도 활발히 진행 중이었다.
사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왕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정보의 누락이 있는 것이 아니고?”
“두 번이나 재확인을 요청하고 받은 결과입니다.”
실리도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목적을 찾아내려고 했다.
공작부인의 정보 조직들도 백방으로 이를 알아내려고 했다.
헬리오 왕국에 특별한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방문 목적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국내에 이유가 없다면 목적은 하나겠군.”
헬리오 왕국 내부에서 방문 의도를 찾을 수 없다면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헬리오 대공이 이곳에 방문하려는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자국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짜증나게 만들기 위함이겠지.”
페루제 공작부인과 헬리오 대공은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조력자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숙적이기도 했다.
헬리오 대공은 공작부인이 무너지는 것도 원하지 않지만, 반대로 그녀가 지금보다 더 강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연회에서 뭔 짓을 해도 나에게 해를 입힐 수 없을 텐데. 이해가 되지 않는군.”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오고 있음에도 그녀는 여유로워 보였다.
타국의 대공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한들, 한순간일 뿐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한 준비와 시간은 낭비였다.
그녀는 대공의 비합리적인 움직임에 의문을 품었다.
* * *
드디어 기다리던 공작을 위한 환영 연회 당일이다.
공작부인이 엄선한 ‘북부의 귀족 가문’의 사람들이 공작령에 몰려들었다.
연회 준비를 돕던 방계와 가신들은 그 손님들을 기다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명령에 따라 연회를 같이 준비했던 부인들이 서서 손님들을 맞이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복화술을 하듯이 대화를 작게 나눴다.
“이틀 쉬고 여기서 이렇게 웃고 있네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택으로 가서 드러눕고 싶어요.”
이틀을 쉬었으나 피로는 풀리지 않았다.
눈 밑은 약간 거뭇거뭇했다.
화장으로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피로감이었다.
“저도요. 대공 전하가 한분 더 오게 되었다고 거의 다했던 연회 준비를 갈아엎다니요.”
한 부인이 공작부인의 매서움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연회의 컨셉, 자리 배치 등 하나하나 그녀들이 정하고 공작부인에게 보고를 올려야했다.
그녀가 정한 양식에 따라서 그 의미와 근거를 써야 하는데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저는 공작부인의 ‘다시’라는 말을 다시 듣는 꿈까지 꿨다니까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갈구는 것도 남달랐다.
그녀는 귀족 부인들을 고용인들처럼 고문하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정체 모를 차를 마시게 했다.
그 차를 마시면 어떤 독방에 있게 하는데 그 이후가 끔찍하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배를 스스로 찢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 점차 나아진다.
10분 정도면 괜찮아졌다.
그 고통이 끝나면 공작부인 앞으로 다시 불려 가는데…….
“앞으로는 잘할 거라 믿지요.”
이렇게 말하고는 “그만 가서 다시 해요.”하며 축객령을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저는 저희가 죽는 줄 알았는데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해요.”
여기 부인 중에 벌로 받은 ‘차’를 마시지 않은 이는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 차를 마신 후로는 기운이 생생하게 다시 생겨서 일할 수 있었다.
월경이 불규칙했던 사람도 제대로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 차를 마시고 난 뒤에 기운이 나는 기분이 들어요. 이상한 일이에요.”
“저도 제대로 그날을 경험했다니까요. 몇 달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말이죠.”
“에이, 착각이고 우연이겠죠.”
“역시 그렇겠죠?”
차의 효능을 보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벌’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 져서 그런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그녀의 지적 감각, 미적 감각을 따를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더 소름이 돋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앞으로 이런 대규모 연회가 있을 때마다 저희는 이런 꼴이 되겠죠.”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네요.”
“요즘 연회 준비에 관한 책을 엄청 읽고 있어요.”
“저도 그래야겠네요.”
이게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공식적이며 대규모의 연회가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지금은 처음이라서 봐준다는 듯한 말투로 예상하건데 앞으로는 더 숨 막히게 일을 시킬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의 노력은 빛이 났다.
초대된 손님 중에 이번 연회에 불만을 표할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가 감탄하며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봤다.
“세상에나 안을 이렇게 화려하게 꾸몄네요.”
“그러게 말이야. 소문대로 완전히 다 바꿨나 보군.”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내부였다.
낡은 것들은 새로 다 바꾸고 장식품도 싹 갈아 치워 버렸다.
넓은 공작성을 완전히 새롭게 단장하는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몰라도 안주인에게 배분되는 1년 예산의 반을 여기에 쏟아 부었을 것이다.
이번 공작부인이 이 연회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공작 가문의 옛 그림들이나 장식품들이 보이지 않는 거 같네요.”
“그렇죠? 상단들이 쉴 틈도 없이 공작 성을 드나들었다고 들었어요.”
내부는 공작 가문의 역사가 느껴진다기보다는 새로움에 초점을 맞춘듯했다.
어쩌면 가문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의도.
가문의 새로운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함일지 모른다.
귀족 남성들은 연회 준비를 안주인의 의무로 자신들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연회에서 그녀는 북부의 귀족들에게 자신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연회는 단순히 사람들을 모시는 자리가 아니었다.
‘의도’를 보여 줄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공작 가문은 이제 새롭게 태어날 것임을 말이다.
혹은 그 새로움은 공작부인이 만들어 낼 것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