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미움이 주는 영향
그녀는 차를 근처에 두고 내정에 관련된 서류를 보았다.
그 서류는 영지가 있고 힘이 있는 가문의 가주를 아들로 둔 노부인들에 대한 자료였다.
“요즘 노부인들이 ‘정부 때리기’에 엄청난 관심을 보이는 중입니다.”
실리의 말에 그녀가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실리를 잠시 보고는 다시 시선이 서류로 향했다.
“뭐라고 한다고 하지?”
“공작부인의 혜안이 남다르다며 칭찬을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을 때는 그런 하찮은 여자와 상대하면 격만 떨어진다고 했다.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고 가신 가문의 부인들 목숨을 손에 움켜쥐었을 때는 무섭고 소름이 돋는 여인이라며 피하고 싶어 했다.
그녀를 경계하여 초대받기도 꺼려하고 초대를 받아도 거부할 생각만 가득했던 사람들이다.
공작도 그런 분위기를 알았기에 페루제 공작부인과 내기를 한 것이기도 했다.
“여인은 투기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역시 덕도 없는 여인이라느니, 잔인하다느니, 시대가 변했어도 이건 아니라느니 하는 헛소리를 뱉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랬던 부인들이 지금은 ‘정부 때리기’에 같이 참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다.
참으로 태세 전환이 빠른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생각에는 신념이나 진중함은 없었다.
그들의 생각은 새털보다 가벼우며 가치가 없었음이 입증되었다.
“정부로 인한 모욕이 싫었다면 귀족답게 제대로 나섰어야지. 남편과 이혼할 각오로 싸워서 쫓아냈어야지. 그런 각오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나를 통해 쉽게 승리를 얻으려고 하는 꼴이라니 웃기네.”
“자신들의 부족함을 모르는 아둔한 인사들과 부인을 어찌 비교하십니까? 그들과 공작부인의 격이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크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하시지요.”
무표정하게 서류만 보면서 질문하던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신기하네. 한 명이라도 있을 줄 알았거든. 뒷말하는 것들이 말이야. 하도 뒤에서 내 이야기를 하길래.”
그 미소는 비웃음이었다.
그런 그들이 정부를 때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인식을 한순간에 뒤집어버렸다.
“그럴 리가요. 설령 있다면 없게 만들면 그뿐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음…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실리의 말은 단순했으나 그 진의는 단순하지 않았다.
“설령 있다면 없게 만들면 그뿐입니다.”라는 말은 공작부인을 거스르게 하는 상대가 설령 살아 있다면 없게 만들면 그뿐이라는 뜻이었다.
상대를 죽여서라도 공작부인에게 불만을 표하는 사교계 여인이 없게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안달이 나겠지.”
이 말은 노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노부인뿐 아니라 후계자를 키우고 있는 부인들,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부인들도 그러했다.
“아니, 공작 각하는 언제쯤 환영회를 한다고 말을 해 주실까?”
“빨리 좀 공작부인을 위한 환영회를 열었으면 좋겠어.”
“도대체 언제 초대장이 오는 거지?”
“환영회를 열기는 열겠지? 미리 연회를 위한 드레스를 맞춰놓을까?”
북부의 영지가 있는 가문의 모든 부인은 공작부인의 환영연회에 참석하기를 원했다.
그 안에 숨은 의미는…….
당당하게 초대를 받고 나중에 ‘정부 때리기’에 적극적으로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웃기는 사실이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수도에서 돌아온 ‘공작을 위한 환영연회’를 하려고 했다.
“공작 가문에 새로운 안주인이 왔으니 연회를 열기는 했어야지.”
“그럼요. 공작 가문의 격에 맞게 크고 화려하게 말이에요.”
“부인께서 자신의 품위에 맞게 꾸미시겠죠.”
그런데 부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위한 환영연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공작보다 공작부인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 * *
부인들은 초대장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초대장이 오지 않자 조마조마해졌다.
먼저 나선 것은 노부인들이다.
“어머니, 어쩐 일로 집무실에 오셨습니까?”
“벨로나 공작 가문에 편지 하나 보내거라.”
“벨로나 공작 가문에요? 공작부인에게 보내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저를 통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덕한 여인과 상종하지 마십시오.”
“무슨 소리냐? 공작 각하에게 보낼 것이고 너는 내가 말하는 내용을 적어서 보내거라. 그리고 공작부인은 소문처럼 그런 분이 아니다.”
노부인들이 나선 것이 은밀하게 소문이 돌자 다른 부인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벨로나 공작 각하께 서신을 보내세요.”
“그대가 공작 각하와 할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서신을 보내라는 것이오?”
“보내라면 보내세요! 한 번도 화라고 내 본 적이 없는 내가 진짜 화가 나서 진상짓을 하기 전에요!”
그런 부인들의 노력이 합쳐져서 발렌티노 공작은 부인들의 요청이 적힌 서신들을 엄청나게 받게 되었다.
* * *
“오늘 날씨가 참 좋구나. 하늘이 참으로 맑아.”
“예. 산책하기 딱 좋은 날입니다.”
“이따가 산책이나 해야겠구나.”
그 소식을 듣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녀는 차를 마시면서 밖을 바라봤다.
집무실에 오직 측근인 실리만 곁에 두고 있음에도 그녀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름답고 우아했다.
“이 날씨처럼 계획대로 진행이 되니 마음도 좋습니다.”
“그것들의 인내심이란 딱 거기까지지.”
사람의 인내심이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엄청나게 인내심이 강하고 누구는 혀를 찰만큼 인내심이라고는 없다.
“남편이랑 약조한 기간에 맞췄으니 좋네.”
그러나 하찮은 사람이 인내심이라는 것을 가질 만한 최대한의 기간은 존재했다.
이는 오지 않는 초대장을 기다릴 수 있는 기간이자 벨로나 공작에게 서신을 보낼지 말지를 고민하는 기간이었다.
“맞습니다. 부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군요.”
“그래. 미리 서신을 보냈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부인들을 초대하여 친목을 다지지 않았다.
사교계의 만연한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시도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남편의 환영연회를 열기 전에는 부인들을 초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서신을 보냈다.
처음 그 서신을 받았을 당시에 부인들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개념이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부인들은 그녀의 초대에 응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때리고 싶겠지. 얼마나 때리고 싶겠어.”
그런 와중에 ‘정부 때리기’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정부들을 끌고 와서 모욕을 주고 때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완벽한 자신의 삶에 오점을 남긴 정부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겠어.”
‘정부 때리기’를 하면서 있었던 일들이 들려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참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페루제가 만든 모임은 정부를 때려도 투기하는 하찮은 여인이라며 수군거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남편이 완전히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
“참기만 하던 와중에 이런 기회를 잡게 생겼는데 놓치고 싶지 않겠지.”
교육이라는 명분과 페루제 공작부인이라는 방패가 있기에 가능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 남편이라고 해도 뭐라고 더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짜로 그녀는 무서운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도는 하나잖아?”
노부인들은 젊은 날의 분노를 그곳에서 풀기를 원했고 가주를 남편으로 둔 부인들은 남편의 정부를 때려서 가슴이 시원해지기를 원했다.
“자기들도 정부를 때리려면 얼른 그이의 환영연회를 열고 나에게 초대장을 받아야지.”
“맞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도는 공작 각하께 서신을 보내는 것뿐이지요.”
공작부인에게 초대해 달라고 서신을 보내고 싶어도 이미 ‘환영연회 이후에’라는 조건을 단 서신을 보냈다.
그러니 그들이 비벼볼 곳은 공작밖에 없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페루제 공작부인이 원하는 대로 이뤄졌다.
“이번 환영연회가 기대되는구나. 너무나도 말이야.”
정부를 괴롭히는 행동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 * *
이것이 란델리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내린 숙제를 해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람의 본질이라…….”
밖의 정원에서 란델리노는 왔다갔다했다.
“본질…….”
그는 어머니가 만족하실 만한 답을 가져와야 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그러한 내용의 책을 읽어봤다.
성서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본질.’
“인간은 선함과 사랑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신체를 움직인다.”
인간은 선한 존재라는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의 본질.’
“이것들은 답이 아닐 거야.”
그는 어머니가 정부들을 때리는 것이 인간 본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랐다.
“인간은 폭력적인 존재다? 아니면 약한 상대에게서 우월감을 느끼기를 원하는 추악한 존재다?”
그것도 아닐 거다.
그러면 평생을 신에게 헌신하는 신관들은 어디에 있으며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사가 어찌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절대로 그런 악한 분이 아니었다.
고귀하고 정의로우며 공명정대하게 벌을 내릴 줄 아는 완벽한 사람이다.
그가 고심하며 계속 정원을 배회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란델리노 영식!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가요?”
누군가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레티시아가 보였다.
공작부인이 가신들, 방계들의 부인들과 한 첫 티타임에서 란델리노를 폭행하는데 가담하지 않고 편을 든 유일한 아이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맘에 들게 되어 란델리노의 놀이 친구로 선택 당했다.
레티시아는 기꺼이 놀이 친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노무세키 부인, 마침 레티시아 영애가 우리 란델리노 또래군요. 어리지만 지혜로운 조카를 뒀어요.”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 겸손하십니까? 저는 레티시아가 란델리노의 말벗이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자기 분수를 아는 아이는 많지 않거든요. 괜찮지요?”
“그, 그것이 말입니다.”
“설마 제 부탁을 거절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거절하기에는 공작부인이 보인 모습은 너무 무서웠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감히 공작부인의 제안을 거절할 위치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레티시아에게는 선택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어? 레티시아 왔어? 한동안 오지 않아서 섭섭했어.”
란델리노도 레티시아에게 호의적이었다.
레티시아가 폭행당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나섰을 때, 다수의 폭행에서 자신을 두고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같이 맞았을 때.
그는 그녀를 믿게 되었다.
‘아! 맞다! 레티시아처럼 선하고 좋은 사람도 있다. 인간은 악하다. 그렇지만 어머니와 레티시아와 같은 소수도 있다.’
“그런 거 치고는 너무 반응이 없으시던데요? 여러 번 불렀어요.”
그녀가 삐졌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로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란델리노는 그녀만의 장난스러움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곧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