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57화 (57/221)

057화 안주인의 위치가 단단해야 가문이 번창할 수 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명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문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악!”

“왜 이러십니까!”

“살려 주십시오!”

비명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병사들에게 머리채를 잡혀서 끌려온 사람들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잘 꾸며 놓은 머리는 엉망이 되었고 드레스는 찢어졌으며 화장도 이상해졌다.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가 여인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한 손을 들고는 까닥거렸다.

병사들이 험하게 데려온 여인들을 놔줬다.

그들은 무릎을 꿇린 상태로 공작부인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그들을 보지도 않았다.

실리가 따라 준 차를 우아하게 마셨다.

“부른지가 언제인데 오지도 않고 그 흔한 서찰조차 보내지 않는 것들이냐…….”

그녀는 잠시, 잔에 든 차를 보았다.

방안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그녀의 시선을 받을 수 없었다.

“잘하고 있다고 뻔뻔하게 거짓을 말하는 것들이나 하나같이 예의 없는 것은 같군.”

그들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두려워서 고개를 숙였다.

“고생했다. 가 봐.”

“예!”

병사들이 절도 있게 대답하고 방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서도 그녀는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너희가 왜 끌려왔는지 아니?”

그녀가 무심하게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예? 그, 그것이…….”

당연히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따라오라고 하더니 머리를 잡고 끌고 갔으니까.

그들이 벨로나 공작가문의 가신부인들 목숨을 쥐고 있다는 공작부인과 척을 질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평생 자신들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다.

결국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이유조차 모를 줄이야. 이렇게 천박하다니.”

경멸하는 얼굴도, 비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너무 담담했다.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것이 모욕이 아니라 사실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귀족적인 사교계로 만들려면 고생을 하겠어.”

귀족적인 사교계.

도대체 그녀는 어떤 사교계를 원하길래 이러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드디어 그녀가 잡혀 온 여인들을 바라봤다.

시선조차 주지 않다가 드디어 본 것이다.

곧 다시 차에 집중했다.

그들은 그 찰나의 관심밖에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는 차의 색깔을 탐색하는 것처럼 바라봤다.

“나는 안주인의 위치가 단단해야 가문이 번창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야.”

페루제 공작부인은 안주인으로 그 권위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 찌를 듯한 권위로 자신의 남편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남편이 가문 밖의 일을 잘해도 가문 안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거든.”

그녀가 과자 하나를 집어서 입에 가져다댔다.

하나를 집어먹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과자를 먹어도 기품이 있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귀족적이다.

“저택의 고용인들과 가문의 여인들을 관리하는 것은 부인들의 일이지.”

보통 아내들은 집안일 즉 가문 내부의 일을 담당한다.

그 일들 중에는 저택 내부의 일로 고용한 사람들의 관리가 포함되었다.

“너희도 안주인이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란다.”

여기에 더해서 위세가 조금이라도 있는 가문에서는 방계들과의 관계유지도 아내의 일이다.

“가문에 속해 있지는 않아도 정부들이지 않느냐. 남편의 여인이면 가문의 여인이고 이는 곧 안주인이 보듬어야 할 사람인 거지.”

끌려온 여인들은 초대된 부인들의 남편이 곁에 두는 정부였다.

모두가 정부였다.

“방계들도 관리를 하는 마당에 남편의 여인을 관리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법적인 부인은 아니었지만 정부는 남편이 총애하고 대우를 해 주는 여인이다.

몸과 웃음을 팔아서 남편의 애정을 받고 귀한 것을 선물을 받는 여인들이었다.

“방계보다 더 돈독한 사이인 것을 말이야.”

잠도 같이 자고 애교도 떨면서 남편 곁에 붙어 있는 정부가 방계들보다 남편보다 가까운 것은 당연했다.

“안주인의 말을 들고 순종해야 할 것들이 감히 오라는 명령을 거절해? 감히? 정부 주제에?”

그런데 여기에 오게 된 부인 중 어느 누구도 위세가 있는 가문출신이 아니었다.

그냥 평생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을 정도였다.

“정말 이렇게 기강이 해이할 동안에 아무도 바로 잡지 않았다니 믿기지가 않아.”

정부들은 억울했다.

갑자기 자신들에게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귀족에게 정부는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였고 가주의 총애에 따라 부인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있었다.

부인을 무시하며 기세가 등등한 정부들은 여럿이다.

어차피 자신을 총애하는 귀족이 편을 들어줄 테니까.

“이미 지난 일을 어쩌겠니? 그치?”

그 귀족들을 믿고 한번 뻔뻔하게 말대꾸를 해볼 수 있었다.

평소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아니다.

소문에 의하면 궁수들로 공작을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공작을 죽이려고 했다는 소문이 도는 여인이 살아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오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작이 죽이지 못할 만큼 대단한 여인이라는 것이다.

공작을 죽이려고 들만큼 군대, 자금도 엄청나다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라도 바로 잡으면 될 것을 말이야.”

정부들은 후자가 정답임을 바로 알아챘다.

“불만이면 너희들을 물고 빠는 것들에게 말하렴. 나는 마음이 넓어서 다 들어줄 수 있단다.”

영지도 없는 귀족들이 공작도 한 수 접을 수준의 군대를 가진 여인과 대적할까?

그것도 정부를 위해서?

이곳에서 공작부인이 그들을 죽인다고 해도 막을 사람은 없었다.

죽인다고 해도 항의 한 번 제대로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정부들 중 하나가 위기감을 느꼈다.

“다시는 오만하게 굴지 않고 부인께 순종하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이 시작이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이번만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아까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인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중이다.

“정말 반성을 했니?”

공작부인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들의 눈빛에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들은 기혼자라는 것말고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매일 정부랑 놀러 다녔다.

정부를 대놓고 집에 불러오는 것은 예사고 그 정부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은 번번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정말입니다!”

이들의 남편 중 일부는 자기는 정부랑 온갖 짓거리를 하면서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며 때렸다.

남편에 대한 두려움에 뭔가를 책잡힐까 봐 집안에만 있는 아내를 말이다.

생활에 필요한 것만 써도 사치를 한다며 폭력을 행사했다.

정부에게 쓰는 돈이야말로 사치인데 말이다.

“믿어 주십시오.”

이들의 남편 중 일부는 평소에 아내를 무시했다.

무식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느니, 너 따위가 알면 얼마나 알겠냐느니, 꾸며 봤자 예쁘지도 않으니 돈쓰지 말라느니 하는 말로 아내의 자존감을 낮게 만들었다.

정부가 부인을 조롱하면 같이 조롱하는 부류였다.

그러면서 정부에게는 온갖 달콤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일부는 아내를 가정부로 생각하는 부류였다.

정확히 하자면 가정부들을 관리하는 ‘시녀장’ 정도의 취급이다.

그래서 아내를 아내로 여기지 않고 고용인처럼 대했다.

아내에게 권위적으로 굴면서 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를 아내처럼 대접해 줬다.

“절대로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들은 매일 매일이 굴복하는 삶이고 조롱당하는 삶이었다.

‘여인의 의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배워 왔고 사회 분위기가 그러했기에 참았다.

그런데 공작부인이 상상만으로 하던,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체념했던 일을 실제로 해준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실리에게 말했다.

“그것을 가져와라.”

“네.”

시녀 하나가 쟁반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는 가져왔다.

정부들은 경악했다.

“그, 그것은…….”

한 정부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대들의 말을 믿기는 해. 그러나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과는 별개지.”

정부들이 애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가 그 울먹이는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저것들 재갈을 물려라.”

실리가 얼른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모시는 분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얼른 조치를 취한 것이다.

혹시 몰라서 미리 재갈을 준비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

조금만 더 시끄럽게 굴었으면 저 정부들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따위 일로 징징거리는 것은 귀족답지 않았고 귀족의 정부답지도 않았다.

“내 남편의 정부도 아닌데 내가 벌을 내릴 순 없지요.”

그녀가 초대된 부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에요.”

정부에게도 부인들에게도 하대를 했으나 차이는 있다.

정부들에게는 권위적이며 상대를 겁주는 느낌으로, 부인들에게는 존중하는 듯한 말투로 했다.

“그러니까 부인들이 직접 내가 준비한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맞겠네요. 그쵸?”

솔직히 둘 다 권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무엇이든 상대적인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부인들은 두려움을 잊고 마치 이단 종교 교주의 신봉자들처럼 페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광신도처럼 그녀의 말에 열광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증오와 미움이 터져 나왔을 수 있다.

“만약 그대들의 남편 되는 분이 뭐라고 한다면 나에게 말하세요. 삼 일 뒤에 다시 초대할 생각이니까요.”

너희가 정부를 때린 것으로 뭐라고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음에도 이번처럼 꼭 와 주세요.”

“네!”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부인들에게 공작부인은 성녀이고 신이었다.

“그러면 누구부터 할까요?”

그 물음은 광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부인들이 빠르게 손을 들었다.

“저부터 하도록 해 주십시오! 저것이 예전부터 정실부인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나댔습니다.”

“아닙니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저것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저는 유산까지 했습니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저것을 벌줘서 가문의 기강을 바로 세우겠습니다.”

모두가 열렬하게 정부를 때리기를 원했다.

오랜 세월 담겨 있던 분노가 표출되자 무서웠다.

짝!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박수를 치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대로라면 결정을 못 할 거 같으니까. 먼저 온 순서대로 하죠.”

모든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인들은 각자의 순서가 될 때까지 다른 부인의 남편 정부가 맞는 것을 바라봤다.

부인들은 그동안 당했던 서러움만큼 정부를 때렸다.

등에 피가 너무 흘러서 등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정부는 뼈가 보이기 직전까지 갔다.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부인, 그만하세요. 다음에도 불러야 하는데 죽으면 어쩝니까?”

모두가 공작부인의 말에 즉각 멈췄다.

한 번으로는 그동안의 분노를 풀어 내기 부족했으니까.

그렇게 모든 정부가 혼절할 때까지 때리고 나서야 초대된 부인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엿보였다.

처음의 두려움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교육은 꾸준히 해야 하는 법이지요. 정기적으로 모일까 하는데 어떠신가요?”

“불러만 주십시오!”

“맨발로라도 달려가겠습니다!”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는 법을 많이 알려 주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녀가 잠시 표정이 굳고 부인들을 바라봤다.

“부인들, 이번 한 번뿐이에요. 아까처럼 거짓말을 했다가는 부인들은 저 정부들보다 더 험한 모습이 될 거예요.”

공작부인이 말한 거짓말이란 아내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아까의 공작부인을 떠올리며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진담이지만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그쵸?”

그녀가 다정한 미소로 말하자 모두의 얼굴색이 돌아왔다.

“네!”

그들은 강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삼 일 뒤에 봐요.”

부인들에게는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가슴 속의 응어리 중 일부를 떼어 버린 날이었으니까.

“자, 슬슬 낚아 볼까?”

그 일은 페루제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0